(8)서울대서 일어난 국내 최초 성희롱 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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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화학과 조교 A씨가 지도교수 신정휴의 성희롱 실태를 고발한다는 대자보를 붙였다. 신정휴는 A씨를 비롯한 여자 조교들에게 상습적으로 성희롱을 시도하다가 거절할 경우 고용상 피해를 줬다. A씨는 발령을 받기 2~3개월 전부터 출근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연수 등을 명분으로 원치 않는 신체접촉(뒤에서 껴안고 손과 어깨를 만지는 등)과 집요한 데이트(등산·여행 동반)를 강요받았지만, 신정휴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신정휴는 A씨가 정상적인 업무를 하기 어렵게 방해해 업무 소홀이라는 평가를 받게 하고, 2학기 조교 재임용에서도 탈락시켰다. A씨가 버티자 1993년 7월 1일부터 출근하지 말라고 통보했으며, 임기만료일인 8월 31일이 되기도 전에 부당 해임했다. A씨는 학교와 교육부 등에 이 사실을 알리고 탄원과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아무 대답을 듣지 못하자 대자보를 붙이고, 신정휴가 교수의 품위를 저버렸으므로 교단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1993년 10월에 연 기자회견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1993년 10월에 연 기자회견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1심 유죄, 2심 무죄, 상고심 일부 유죄

물론 A씨의 주장이 바로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같은 과 대학원생들은 학과 규칙상 조교 임기가 1년이며, A씨의 평소 근무태도가 불성실했다면서 가해자 신정휴를 옹호하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태도를 보였다. 1993년 9월 15일, 신정휴는 A씨를 상대로 명예훼손과 협박 혐의를 걸어 고소했다. 다행히 총학생회와 대학원 자치협의회, 여성문제 동아리 협의회 등이 진상조사단을 꾸려 A씨의 문제 제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10월 18일, 국내 최초로 ‘성희롱’ 사건으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접수한다. A씨는 신정휴와 서울대를 상대로 법정 싸움에 돌입한 것이다.

소송접수 다음 날인 10월 19일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공동대책위원회(성폭력특별법 제정 추진 특별위원회, 서울대 총학생회, 대학원 자치회협의회 등이 참여. 이하 ‘공대위’)’가 활동을 시작한다. 공대위는 교육부 등에 진정서 보내기, 성희롱 피해 상담 창구 개설, 공개 토론회, 홍보 활동 등 다양한 연대 지원 활동을 벌였다.

‘직장갑질119 제보 사례 전수 분석을 통해 본 직장인 성희롱, 괴롭힘 실태 보고서’(2021)

‘직장갑질119 제보 사례 전수 분석을 통해 본 직장인 성희롱, 괴롭힘 실태 보고서’(2021)

1994년 4월 18일 1심 재판부는 신정휴에게 3000만원의 손해배상 지급 명령을 내렸다. 이 판결 이후 많은 여성은 “이것도 성희롱이냐, 이러면 3000만원이냐”는 조롱에 시달렸다. 1995년 7월 25일 항소심에서는 1심 판결을 파기하고 A씨가 패소했다. 이 재판에서 성희롱을 판단하는 기준을 어떻게 판단하느냐가 쟁점이 됐다. 공대위는 미국 법정에서 기준으로 삼고 있는 합리적 여성(reasonable woman)의 관점으로 위법성을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재판부의 결정을 비판했다. 1998년 2월 10일 상고심에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신정휴의 교수 지위를 언급하며 성희롱을 일상생활에서 허용되는 단순한 농담 등이 아니라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해 인격권을 침해하는 행동이라고 설명한다. 1999년 6월 25일 파기환송심에서는 A씨의 정신적 손해에 대한 500만원의 손해배상 지급을 명령했지만, 서울대학교 총장과 국가에 대한 피해보상 청구는 받아들이지 않은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했다. 이에 대해 직장 내 성희롱 가해자의 책임은 밝혔지만, 사용주의 책임을 묻지 않은 아쉬운 판결이라는 평가가 많다.

서울대 조교, 성희롱 불법성을 알리다

성희롱의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 신정휴 성희롱 사건은 직장 내 성희롱이 사회에 만연한 사회문제이고, 개인과 개인 사이의 사소한 다툼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 계기를 만드는 데 가장 큰 역할은 A씨의 용기다. 성희롱에 대한 경각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또 같은 처지를 겪을 직장여성들이 용기를 얻기를 바라며 그는 힘든 시간을 버텨냈다.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1995년 4월 명동성당 앞에서 성희롱 추방 거리 캠페인을 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1995년 4월 명동성당 앞에서 성희롱 추방 거리 캠페인을 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공대위가 직장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괴롭힘 중 하나인 성적 괴롭힘(sexual harassment)을 성희롱으로 번역한 데에는 1990년대 초 한국사회의 인식에 대한 고려가 있었다. 가벼운 농담이나 지분거림이 너무나도 일상적으로 일어나지만, 문제 삼기 어려웠던 현실에서 성희롱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렸다는 것은 사건 당시를 기준으로 보면 분명한 성과라고 평가할 만하다.

“지금 성희롱은 육체적·시각적·언어적으로 다 들어가는데 행정법이지 형법은 아닌 거잖아요. 성추행, 강간은 성폭력특별법, 형법인 데 반해 성희롱은 가볍게 인식되는 거죠. 성추행, 강간과 함께 성희롱을 광의의 성폭력 테두리에 포함했더라면… 국가가 책임지는 형사처벌과 국가가 책임지기도 하지만 기관의 책임을 묻는 행정법, 어떻게 보면 혼란을 가져온 것이에요. … 당시엔 성희롱이 불법행위라는 점을 알린 점만으로도 중요했던 시기였어요.”(1993년 ‘공대위’ 총무간사 <여성 가족 정책사 현장 재조명: 직장 내 성희롱 근절 운동과 중점이슈 변화>)

국제노동기구(ILO) 제190호 협약(일의 세계에서의 폭력과 괴롭힘의 제거에 관한 협약)은 직장 내 괴롭힘에 성차별적 괴롭힘을 포함하고, 성적 괴롭힘을 성차별적 괴롭힘의 하나로 보고 있다. 반면 한국은 성을 이유로 한 ‘차별’로서의 성희롱을 금지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성차별 해소를 위한 법률인 ‘남녀고용평등법’, ‘양성평등기본법’에 성희롱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 이러한 특성을 말해준다.

올 초 직장갑질119가 발표한 ‘직장인 성희롱, 괴롭힘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직장 내 성희롱은 수직적 권력관계에 의한 것이면서 괴롭힘과 성차별이라는 성격을 동시에 갖는다고 한다. 가해 행위자가 권력적 우위에 있는 경우가 89%에 달하는데 행위자와 피해자 간에는 고용 형태, 연령, 근무기간 등에 따라 위계가 존재한다. 비정규직이고 여성 혹은 성소수자라면 더욱 피해를 당하기 쉬웠다. 성별은 그 자체가 위계로 작동해 대부분의 피해자는 여성이지만, 남성이 피해자가 되는 경우(12.9%)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조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 뿐더러 신고 후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90%를 넘는다는 것이 놀랍다.

<림보「회사가 사라졌다」공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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