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권력 제한과 인권 보장이 곧 법치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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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21분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탄핵사건의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를 낭독했다. 우리 역사상 최고 권력자가 사법절차에 따라 권력을 잃은 첫 번째 사례다. 조선시대 왕이 신하들의 반정으로 물러나고, 대한민국 대통령이 혁명과 정변으로 하야하거나 사망한 사례가 있긴 했다. 시민은 최고 권력자도 법을 어기면 재판으로 자리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됐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세계사를 보면 공동체가 크게 변화하는 시대에 법이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에서는 진나라가 법가사상으로 춘추전국시대를 끝냈다. 로마공화정은 법으로 평민과 귀족의 갈등을 조정해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근세 초 서유럽 왕들은 로마법을 계수해 영주와 농민의 반발을 억누르고 국가의 기본틀을 형성했다. 17~18세기 영국과 미국, 프랑스에서 일어난 근대 시민혁명은 올바른 체제와 권력에 관한 논쟁에서 비롯됐고, 시민의 뜻을 반영하는 법이 만들어졌다. 법가사상은 왕의 명령인 법을 일사불란하게 시행해 신하와 백성이 왕권을 두렵게 여기도록 하려는 것이다. 조선은 통치이념으로 예를 바탕에 두고 실천하는 수단으로 법을 제정해 <경국대전>으로 성문화했다. 그러나 왕이 자제하지 않으면 법으로 강제할 수 없으므로 조선은 법치주의 국가가 아니다. 법가는 신민에게 법의 준수를 강요하지만, 법치주의는 권력자에게 법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다르다.

‘법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법의 지배’

권력은 법에 따라 행사되고 제한돼야 한다는 법치주의를, 영국과 미국에서는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가 아니라 ‘법의 지배(rule of law)’라고 표현한다. 법의 지배는 권력자가 법 위에 서서 법을 도구로 이용하는 법에 의한 지배와는 다르다. 법의 지배는 법을 통치수단으로 사용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탄압하는 ‘법률적 불법’을 허용하지 않는다. 법치주의, 즉 법의 지배는 근대 시민혁명을 거치며 씨를 뿌렸고, 20세기에 들어와 나치즘과 공산주의 등 전체주의와 싸우고 열매 맺으며 헌법에 둥지를 틀었다.

민주주의는 법치주의를 통해 절차와 형식을 갖춘다. 과거 독재정부뿐만 아니라 권위주의 정부도 법치주의를 내세워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는 민주화운동을 억압하고 처벌했다. 그후 ‘민주화운동 관련자’를 보상하는 법률이 제정되자, 법원은 어떤 기준으로 민주화운동을 판단해야 하는지 문제가 됐다. 필자는 판결문에 이렇게 썼다. “권위주의적 통치행태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은 시민이 정부에 국민의 기본권을 최대한으로 보장하고 국민에 의해 국정이 이루어질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요구는 일반적으로 정부가 민주주의에 필수불가결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처벌하는 것에 대항해, 시민이 국가의사 결정과정에 참여하려는 형태로 진행된다. 민주화운동보상법이 정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키는 활동에 해당하는지 판단할 때도 항거행위 자체의 동기나 목적만 고려요소로 삼을 것이 아니라 당시 정부가 어떤 권위주의적 행태를 보였으며 이에 대항하는 항거자의 행위는 어떤 관련성을 갖고 있는지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산이 높으면 높을수록 골짜기도 깊어지는 법이고, 몰아치는 비바람과 흐르는 물의 방향과 세기에 따라 골짜기의 모습도 달라지는 법이다.”

사회적 소수자 보호가 중요

법치주의는 역사적으로 최고 권력자의 자의와 폭력을 억제하기 위한 원리이다.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발달해왔다. 법치주의 국가가 시민에게 법을 준수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이유는 법이 시민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며 인간의 존엄과 사회 정의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헌법은 제10조에서 인권보장의 대원칙을 밝히고, 이어서 개별적 인권을 자세하게 규정한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헌법재판소는 법치주의의 뜻을 이렇게 설명한다. “오늘날의 법치주의는 국민의 권리·의무에 관한 사항을 법률로 정해야 한다는 형식적 법치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법률의 목적과 내용 또한 기본권 보장의 헌법이념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실질적 법치주의를 의미한다.”

인권 보장을 강조하는 법치주의에서는 사회적 소수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회적으로 억압받고 차별받는 소수자에 대한 보호와 배려가 부족할 때, 개개 인간의 존엄성은 무시되고 공동체의 갈등과 분열은 심해진다. 다수가 원한다고 해서 소수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법이 제정되고 시행되는 사회는 법치주의 사회가 아니다. 신체 정신장애가 있는 여성에게 불임수술을 시행하는 것, 부랑아나 조직폭력배를 함부로 잡아가두고 강제노역을 시키는 것은 모두 불법이고 부정의다. 다수결 원리로 운영되는 입법부나 행정부가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할 때, 선거로 선출되지 않은 사법부는 권력의 향배나 수시로 변하는 여론에 흔들리지 않고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마지막 보루’로서 책무를 다해야 한다. 성전환수술을 한 사람이 신청한 성별 정정을 받아들인 부산지방법원은 판결문에 이렇게 적었다. “성정체성에 관한 장애를 극복하고 새로운 성으로서 우리와 함께 섞여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협력하는 것이야말로 사법이 추구하는 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깔고 있는 것이다. 소수자들이 각 분야에서 자신들의 인격 실현과 행복 추구에 불편함이 없게 됨으로써 우리 사회는 건강하고 성숙한 복지사회가 될 수 있다.”

과거 우리 사회에서 권력자가 법을 국민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이용한 측면이 많았다. 법이 인간의 존엄에 바탕을 두고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권력을 제한한다는 테제는 법조인도 화제로 삼기를 꺼렸다. 교과서는 소크라테스까지 동원해 ‘악법도 법이다’라고 가르쳤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2년, 헌법재판소는 2004년, 과거 권위주의 정부가 ‘공동체를 위해서 개인의 기본권이 희생돼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주려고 소크라테스 재판을 악용했으므로 개선돼야 한다고 했다. 교과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화 시대를 거치면서 시민은 이런 생각을 떨쳐버리고 법은 법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모두가 지켜내야 할 법치주의, 지금 이 땅에서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가.

<박형남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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