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과학기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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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한성순보에 실린 ‘치도약론(治道略論)’이라는 글에서 김옥균은 이렇게 말한다. “요즈음 세계정세는 크게 변하여 만국이 서로 통하고 있으므로 화륜선이 동서 해양을 누비고 다니며 전선은 온 지구를 이리저리 엮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탄광을 개척해서 금은을 캐고 석탄과 철도 캐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기기를 만드는 등 일체가 인민생활에 날로 쓰이는 편리한 곳들로서 손꼽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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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것처럼 김옥균과 개화파는 갑신정변을 일으켜 조선을 개혁하려 했으나 청나라의 개입과 일본군의 배신으로 그 혁명은 삼일천하가 됐다.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의 의도를 지나치게 순수하게 해석했고, 이후 친일파라는 딱지가 붙은 김옥균이지만 개화파의 신념 전체를 매도하긴 어렵다. 개화기의 동아시아를 객관적으로 직시한다면, 서구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빠르게 근대화를 이룬 일본의 위상은 너무나 자명한 것이었다. “일본이 동양의 영국이 되어 가고 있으니, 우리는 동양의 프랑스가 되어야 한다”는 김옥균의 호소 속에는 서구열강의 경쟁으로 무너지던 약소국 조선에서, 무언가 발버둥이라도 쳐야 했던 지식인의 비애가 녹아 있다.

일본- 도리에서 물리로 서구 제국주의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19세기와 20세기, 동아시아의 지식인은 서구열강이 부국강병을 이룩한 원인으로 ‘과학’과 ‘민주’를 지목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서구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나라는 일본이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중앙집권화된 정치체제를 마련한 일본이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한 정책은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였다. 일본의 1만엔권 지폐에 등장하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탈아론’을 주장한 것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은 ‘실학’을 과학으로 대체하며 동아시아의 전통적 세계관과 결별한 사상가였다. “학문이란 그저 어려운 글자를 알고 어려운 고문을 읽으며 와카를 즐기고 시를 짓는 등의 실이 아닌 문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실과 동떨어진 학문은 이차적인 것으로 돌리고 우리가 열심히 공부해야 할 것은 인간의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학이다.”

후쿠자와에게 실학은 물리학을 모델로 하는 것이었다. 이미 네덜란드에서 전래된 ‘해체신서’와 이를 통해 민간에 전승된 ‘난학’의 전통 속에서, 일본의 지식인들은 빠르게 발전하던 서양의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포착하고, 이를 사회의 공적 기예로 전이시켰다. 후쿠자와의 ‘도리에서 물리로의 전회’는 탈아론을 통해 제국주의적 사상으로 발전해나갔지만, 일본이 동아시아를 위협할 수 있었다. 전후의 패배 후에도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난학에서 메이지유신을 거쳐 200여년에 걸쳐 과학기술에 투자했던 축적의 시간 덕분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일본의 천황이 동물학 논문을 쓰고, 물리학자 총리가 탄생할 수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중국- 유교에서 과학으로 동아시아에서 서양의 과학기술과 가장 먼저 조우했던 건 중국이었다. 이미 16세기에 예수회 신부 마테오 리치가 천주교를 전파하기 위해 북경에 당도했고, 당시 발전 중이던 유럽의 천문학과 역법이 전해졌다. 하지만 문명의 수출국이던 중국은 19세기까지도 서양의 과학기술을 무시했다. 서양과학의 우월성을 부정하던 중국 지식인을 전회시킨 건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의 패배였을 것이다. 결국 그 사상의 전회는 1919년 5·4 신문화 운동으로 폭발한다. 신문화 운동의 화두는 과학과 민주였다. 중국 공산당의 초기 설립자인 천두슈는 이렇게 연설했다.

“서양 사람들은 데(Democracy) 선생과 싸이(Science) 선생을 옹호해 많은 일을 치렀고 많은 피를 흘렸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비로소 이 두 선생이 암흑 속에서 차츰차츰 그들을 구출해 광명한 세계로 이끌어내었다. 지금 우리는 오직 이 두 선생만 있으면, 정치적·도덕적·학술적·사상적인 모든 암흑에서 중국을 구해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후 중국의 지식인 사회는 ‘과학과 인생관 논쟁’을 통해 치열하게 싸웠고, 당대의 유명한 학자 및 사상가들의 참전으로 과현 논쟁은 중국의 지식인 사회를 근대화시키는 촉매가 된다. 이후 서구열강과의 전쟁과 국공합작 등으로 중국은 다시 혼란에 휩싸였지만, 과현 논쟁의 여운이 현재 중국의 과학기술에 대한 전폭적인 투자로 이어졌음을 부정하긴 어렵다. 중국의 산업화를 이끈 정치지도자들의 상당수가 이공계 전공자라는 사실 또한 우연이 아니다.

한국- 절반의 근대화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한참 늦었지만, 식민지 조선에서도 과학은 국가 차원에서 구현해야 할 제도적 실천으로 분명히 인식됐다. 하지만 서구의 과학기술을 사회의 공적 차원으로 연결시켜 이를 통해 국가적 차원의 효용을 추구해야 할 지식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식민지 조선엔 과학 대중화를 외치는 변론가들만 넘쳐났고, 실제 과학기술자를 찾아볼 수는 없었다. 역사학자 김선희는 당시 조선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보다 전문적인 분과 지식을 전달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기사는 과학 분과의 이름과 핵심개념들을 나열한 뒤, 과학이 국가발전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반복적으로 역설하는 선에 그쳤다. 사실 그 글을 쓴 어떤 이들도 과학자가 아니었고, 그 가운데 빌딩이나 기계가 아니라 서양과학의 실체를 근본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이들 역시 드물었을 것이다.”

과학사가 박성래는 서양 과학기술을 받아들인 동아시아 삼국의 역사를 정리하며 이런 소회를 남겼다. “일본은 개국 이전에 이미 뛰어난 과학기술 수용의 바탕을 마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근대화에 가장 먼저 성공할 수 있었고, 중국이나 한국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굴욕적인 최근세사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1800년이라는 시점에서 한·중·일 세 나라의 서양과학에 대한 잠재력을 비교해본다면, 그 수준은 일본이 제일 높았고, 그다음이 중국, 그리고 한국이 제일 낮은 위치에 있었다. 이 잠재력의 차이가 그 후의 역사에 크게 작용한 것은 분명하다.”

박성래의 말처럼 한국 근대사의 서술에서 우리는 근대화에 실패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도외시하고, 일본의 침략과 지배계층의 무능으로 과거를 덮으려 한다. 하지만 조선이 근대화에 실패한 진짜 이유는 서양 과학기술의 수용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제 눈을 돌려 오늘의 한국을 마주하자. 미중의 첨단기술을 둘러싼 갈등과 백신 보급을 둘러싼 국제정치의 혼란 속에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어디인가. 반도체를 지키고 백신을 스스로 생산해야 한다. 과학기술뿐이다.

김우재는 한때 초파리로, 지금은 꿀벌로 세계정복을 꿈꾸는 과학자다. 동물의 행동을 신경회로의 관점에서 연구하며, 사회성 행동을 유전학적으로 이해하고 싶어한다. 연구 외에도 과학의 사회적 사용에 관심이 많으며 <플라이룸> 등의 책을 저술했다. 현재 하얼빈공대 생명과학연구센터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우재 낯선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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