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밤리단길’ 뜨자 사라진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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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 임대료 올라 기존 상인들 밀려나고 어린이공원은 주차장으로

원조 경리단길(서울 이태원동)을 시작으로 뜨는 동네에는 ‘리단길’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일산에도 ‘리단길’이 있다. 경기도 고양시 정발산동 밤가시마을에 있는 ‘밤리단길’이다. 2018년 말부터 밤가시공원 주변으로 카페와 레스토랑이 하나둘 들어서더니 SNS를 통해 입소문을 탔다. 단독주택과 빌라, 상가 주택이 모여 있는 골목은 금세 핫플레이스가 됐다. 고양시는 거리 지도를 만들고 밤리단길 띄우기에 나섰다.

밤리단길 거리 지도 / 고양시 제공

밤리단길 거리 지도 / 고양시 제공

조용한 마을에 사람이 몰리면서 후유증이 나타났다. 부동산이 먼저 반응했다. 임대료가 올랐고 상가 권리금이 치솟았다. 밤가시마을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해온 슈퍼와 세탁소, 정육점, 미용실이 문을 닫았다. 그 자리에는 카페와 디저트 가게, 레스토랑이 들어섰다. 개중에는 건물주가 직접 차린 곳도 있다. 다른 리단길 자영업자들이 겪은 일과 다르지 않았다.

김진형씨(가명·45)는 2013년부터 밤가시마을에서 정육점을 운영했다. 장사는 곧잘 됐다. 동네 신혼부부들이 주요 고객이었다. 단골도 생겼다. 건물주는 “장사가 잘되니 옆 점포까지 터서 장사하라”고 권하기도 했다. 김씨는 이곳에서 7년 동안 장사했다.

김씨가 건물주로부터 ‘상가를 비워달라’는 통보를 받은 건 2019년 3월이다. 밤가시마을이 밤리단길이 된 뒤였다. 3월부터 두달 동안 건물주로부터 4차례 내용증명을 받았다. 건물주는 직접 장사를 한다고 했다. 김씨는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개정 전 계약을 맺었고 개정 전 법에 5년간 임대 보장 기간이 만료됐기 때문에 10년 계약갱신요구권도 행사할 수 없었다. 2019년 7월 명도소송을 진행했지만 패소했다. 김씨는 권리금을 받지 못하고 나왔다. 정육점에 있던 집기류도 처분하지 못했다. 지금은 일용직과 배달을 하며 생계를 꾸리고 있다. 김씨는 “TV에서나 보던 일을 내가 당하게 될 줄 몰랐다. 장사 접고 1년 동안 손님들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로 갔냐. 왜 장사 안 하냐고. 삶의 터전이었는데 억울하고 별생각이 다 든다”고 말했다.

세탁소, 정육점 자리에 카페 들어서

12년간 세탁소를 운영한 박호인씨(가명·73)도 정육점과 같은 시기에 밤가시마을을 떠났다. 밤리단길이 뜨고 나서 건물주가 바뀌었는데 식당에 세를 줄 요량이니 비워줄 것을 통보했다. 세탁소 옆 미용실도 함께 문을 닫았다. 세탁소와 미용실 자리에는 디저트 카페와 레스토랑이 들어섰다. 박씨는 “동네에 그런 식당들이 안 들어왔으면 계속 장사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권리금도 못 받고 쫓겨났는데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다”고 말했다. 남은 사람들도 마음이 편치 않다. 동네가 뜨면서 함께 오른 임대료가 고민이다. 밤가시마을에서 28년간 장사를 해온 김학도씨(전파사 운영)는 “나는 그래도 주인을 잘 만나 지금까지 장사를 잘했다”면서도 “동네 전체 상가 임대료 시세가 오르면서 최근에 우리도 월세를 올렸다. 앞으로 더 오르면 어쩌나 걱정”이라고 말했다. 권리금도 치솟고 있다. 밤리단길 부동산중개업소 관계자는 “2년 전만 해도 상가 한칸에 권리금 1000만원 정도였는데 많이 올랐다. 현재 이 동네 권리금 시세는 3000만원선”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밤리단길’ 주민들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주민들도 동네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금연 식당을 피해 집 앞에서 흡연하는 이들과 시비가 붙고 방문객이 마당에 버리고 가는 쓰레기도 골치다. 집 대문 앞에 주차한 방문객과 주민 간 갈등도 잦다. 이미 주차난에 시달리던 밤가시마을은 상권 활성화로 골목마다 주차 전쟁을 치르고 있다.

고양시가 제시한 해법은 마을 내 공영주차장 조성이다. 밤리단길 상인들도 주차장 신설을 요구해왔다. 고양시가 점찍은 주차장 부지는 밤가시 어린이공원 다목적 구장(축구장)이다. 시 계획대로라면 올해 말 어린이축구장이 사라지고 차량 70대를 수용할 수 있는 주차장이 들어서게 된다. 시설 변경을 위한 용역예산도 확보된 상태다. 고양시 관계자는 “밤리단길 명소화로 주차장 조성 민원이 지속적으로 접수됐다”며 “남는 유휴부지가 없기 때문에 어린이공원 부지를 활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밤가시 어린이공원에서 노는 아이들 / 정상희 제공

밤가시 어린이공원에서 노는 아이들 / 정상희 제공

주차난 때문에 아이들 공간 빼앗아

원주민들은 반발한다. 밤가시마을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전면에 나서 어린이공원 주차장화 사업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다. ‘아이들이 뛰노는 공간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밤가시 어린이공원 다목적 구장은 정발산동에서 아이들이 축구와 야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공원 내 놀이터는 남겨놓는다고 하지만 이러면 안전사고 위험이 크다. 놀이터와 주차장이 맞붙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현재 730명의 주민이 주차장 사업 반대 서명에 동참했다. 밤가시마을에서 15년 거주한 윤호섭씨(39)는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당연히 반대한다”며 “지금 핫플레이스라고 해봐야 오래 가지 않을 텐데 왜 아이들 공원을 없애려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어린이의 놀 공간을 어른 뜻대로 없애는 것은 유엔아동권리협약 제31조(모든 어린이는 충분히 쉬고 놀 권리가 있다)에도 위배된다. 아동권리보장원은 밤가시마을 건과 관련해 “아동의 놀이공간으로 폭넓게 사용되는 곳이 다른 목적의 공간으로 변경이 필요하다면 권리 당사자인 아동 의견이 가장 먼저 고려될 수 있도록 유관기관에 전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밤가시마을 어린이들은 공원을 지켜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이들의 목소리는 힘이 없다. 어린이공원 주차장화 사업에 반대하는 엄마들이 분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범가시마을 주민 정상희씨는 “고양시에 아이들을 생각해 달라고 했더니 ‘당장 앞일이 중요하다’고 하더라고요. 무조건 반대하는 건 아니에요. 공원을 살리면서 다른 방법으로 주차난을 해결할 수 있거든요. 아이들 목소리 묵살하고 주민들과 아무런 협의 없이 졸속으로 진행하는 게 가장 큰 문제예요.

이에 대해 고양시 측은 “모든 정책 사업을 할 때 주민 의견을 수렴하고 동의를 구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주민을 설득하고 설명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아 곧 주민설명회를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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