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야구 새 화두, 야수의 마운드 등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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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0일 대전에서 열린 한화와 두산의 경기는 야수의 등판으로 야구계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한화는 이날 1-14로 경기가 크게 뒤지자 9회초 강경학을 마운드에 올렸다. 강경학은 우투좌타의 내야수다. ‘야수’ 강경학이 공 28개를 던지고도 2아웃만 잡은 채 이닝을 끝내지 못하자 카를로스 수베로 한화 감독은 외야수 정진호를 마운드에 올렸다. 정진호는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으면서 경기를 끝냈다.

한화 이글스 야수 강경학 / 한화 이글스 제공

한화 이글스 야수 강경학 / 한화 이글스 제공

순수 야수 2명이 마운드에 차례로 등판한 건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후 처음으로 있는 일이다. 앞서 1985년에 야수 2명이 한경기에 등판했던 사례가 2차례나 있었다. 그해 4월 17일 MBC 청룡은 해태와의 경기에서 외야수 김정수와 내야수 안언학을 구원투수로 마운드에 올렸다. 그해 5월 15일에는 김정수가 선발 등판하고, 안언학이 구원투수로 나섰다. 당시에는 포지션의 분업화가 명확하게 분류되지 않은 상황에서 김정수와 안언학은 ‘투타 겸업’ 선수였다.

현대 한국프로야구에서는 포지션의 구분이 확실하게 굳혀지면서 야수가 투수를 겸하는 일이 흔치 않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야수의 등판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승패가 기운 뒤 야수가 등판하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역전이 불가능한 경기에 투수를 소모하지 않겠다는 의도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야수 등판 늘어

이런 사례가 최근 몇년 동안 급격히 늘어나면서 메이저리그는 규정을 손보기도 했다. 2019시즌을 앞두고 “야수의 투구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대신 경기가 연장으로 들어가거나 6점차 이상 벌어진 상황에서는 야수가 투수로 등판이 가능하게 했다. 이런 규정이 생긴 상황에서도 2019시즌 야수의 투수 등판은 90차례나 있었다. 야수의 마운드 등판이 하나의 트렌드가 된 셈이다.

한화 이글스 야수 정진호 / 한화 이글스 제공

한화 이글스 야수 정진호 / 한화 이글스 제공

메이저리그를 경험한 수베로 감독은 이 같은 전술로 투수진을 보호하려 한 것이다. 한국프로야구에서는 이런 장면이 익숙지 않다. 한국야구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스포츠맨십으로 여겨진다. 수베로 감독의 이 같은 기용은 한국프로야구에 화두를 던졌다. 사령탑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몇몇 감독은 자신도 수베로 감독과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야수를 마운드에 올릴 수 있다고 했다. 김원형 SSG 감독은 “올해 갑자기 이슈가 됐다. 야수의 투수 기용 자체에 잘잘못이 없다고 생각한다. 다수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김 감독은 “팬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이벤트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대패를 하고 있을 때 또 하나의 볼거리로 보여질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수베로 감독 외에도 야수의 마운드 등판을 실천에 옮기는 감독도 있다. 허문회 롯데 감독은 지난 4월 17일 사직 삼성전에서 0-12로 패색이 짙어지자 외야수 추재현과 내야수 배성근, 오윤석을 연달아 마운드에 올렸다. 이날 경기는 KBO리그 최초 한경기 야수 3명의 투수 기용이라는 진기록을 남겼다. 이어 4월 22일 두산전에서는 포수 강태율이 미트 대신 투수 글러브를 끼고 공을 던졌다. 5월에 들어서도 야수의 투수 등판은 계속 이어졌다. 1일 사직 한화전에서 내야수 김민수가 8회 마운드에 오른 데 이어 9회에는 배성근이 투수로 나섰다. 모두 두 자릿수의 득점 차이가 있었던 경기에서 투수를 아끼겠다는 허 감독의 의도다.

KBO 감독들 의견은 찬반 갈려

이와는 반대되는 의견을 내는 사령탑도 있다. 류지현 LG 감독은 “크게 지고 싶지는 않다”라며 전제를 깐 뒤 “기본적으로 야수들을 올릴 생각은 없다”고 전했다. 그 이유로 “정말 던질 선수가 없을 때가 올 수도 있지만 휴식을 주겠다고 했던 선수들을 갑자기 올리는 것은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고 했다. 류 감독은 자신이 선언한 대로 실천하고 있다. 지난 4월 24일 대전 한화전에서는 선발투수 임찬규가 1.1이닝 만에 강판돼 불펜투수 운용에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야수 카드를 꺼내지 않았다.

롯데 자이언츠 오윤석이 417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홈경기에 등판했다. / 롯데 자이언츠 제공

롯데 자이언츠 오윤석이 417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홈경기에 등판했다. / 롯데 자이언츠 제공

야수 등판에 반대하는 전문가들은 부상에 대한 우려를 표한다. 야수와 투수가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근육이 다르기 때문이다. 수비할 때 송구하는 근육과 투구할 때 쓰는 근육에는 차이가 있다. 때문에 쓰지 않던 근육을 사용하다가 자칫하면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일각에서는 프로야구의 질적 수준 하락을 우려한다. 큰 점수차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야수 카드를 올리는 건 사실상 백기를 흔든 것과 같다. 경기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원하는 팬들에게는 실망감을 안겨줄 수 있다. 패배가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야수가 마운드에 오르는 건 경기를 성의 없게 한다는 인상을 비춰줄 수 있다. 지금까지 야수의 마운드 등판을 실천에 옮긴 건 대부분 하위권 팀들이다. 한화, 롯데는 5월 4일 현재 각각 8위, 10위에 올라 있다.

감독이 쉽게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이유

한화는 대부분 젊은 선수들로 구성돼 선수층이 얕은 팀 중 하나다. 큰 점수차로 지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에 야수의 등판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롯데는 접전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팀이다. 한점 차 박빙의 승부에서 승률은 1승 5패, 0.167로 10개 구단 중 두 번째로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선발 투수의 평균자책도 5.36으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어 경기가 초반부터 무너지는 일이 잦다.

이 때문에 야수의 투수 등판은 팀의 부족한 전력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사례로 비칠 수 있다. 쫓아갈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야수의 투수 등판에 찬성하는 사령탑들도 쉽게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롯데에서는 주로 백업 선수들이 마운드에 올랐다. 주전 선수들이 피칭을 했다면 팬들에게 선사하는 또 다른 이벤트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력 외 선수들이 자신의 보직이 아닌 투수로 나서 공을 던지는 것은 선수 입장에서는 썩 내키지 않는 일이다. 팀 사기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아직까지 야수의 등판 사례에 대한 옳다, 그르다 혹은 정답은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올해 출범 40년째를 맞이하는 한국프로야구에게 변화의 움직임 중 하나로 보인다. 시즌 초반부터 던져진 이 화두는 2021시즌을 관통할 주제 중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하진 스포츠부 기자 h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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