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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이어 한국 배우도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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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여우조연상 받은 윤여정씨 64년 만에 아시아 배우 두 번째로 수상

“나는 경쟁을 믿지 않는다. 다른 배우들보다 조금 더 운이 좋았을 뿐이다.”

지난 4월 25일(현지시간)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가 주관하는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씨는 담담하게 수상소감을 말했다.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쥔 그는 “우리(연기상 후보 배우)는 각자의 영화에서 최고였다”며 자신의 수상이 경쟁에서 앞섰기 때문이 아니라 나름의 노력을 다한 결과일 뿐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국내 영화계의 시선으로 볼 때 그의 노력은 그동안 한국영화가 밟지 못한 새길을 개척하며 만들어낸 것이기에 더욱 뜻깊다. 지난해 <기생충>이 아카데미 4관왕을 석권하면서도 연기상 부문에서는 수상하지 못한 아쉬움을 뒤집은 새로운 기록이기 때문이다.

배우 윤여정씨가 4월 2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유니언 스테이션과 돌비극장에서 진행된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 수상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배우 윤여정씨가 4월 2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유니언 스테이션과 돌비극장에서 진행된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 수상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첫 출품 1962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지난 3월 15일 아카데미상 후보 작품과 배우들이 발표될 때부터 기대감은 높았다. 오스카를 노릴 위치까지 올라간 최초의 한국인 배우가 나왔기 때문이다. 한국계 미국인 감독 리 아이작 정(한국명 정이삭)이 연출한 영화 <미나리>에서 순자 역을 맡은 윤여정씨는 1980년대 미국으로 건너간 한국인 이민자 가족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그와 함께 스티븐 연이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작품 역시 작품상·감독상·각본상 후보에 올라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비록 <미나리>의 다른 후보들은 수상을 양보해야 했으나 윤여정씨의 수상만으로도 한국영화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부정할 수 없는 자리에 올랐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한국영화가 아카데미에 도전해온 이력은 꽤 먼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과거 외국어영화상이란 이름을 달고 있다가 지난해부터 국제장편영화상이란 새로운 명찰을 달게 된 이 부문에 첫 출품한 작품은 1962년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였다. 지난해

<기생충>이 최초로 이 부문에서 수상하기까지 57년 동안 한국은 영화 29편을 출품했으나 후보에도 오르지 못하고 고배를 마셨다. 2019년 이창동 감독의 <버닝>만이 예비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렸을 뿐이다.

좀더 범위를 넓혀 다큐멘터리와 애니메이션 부문까지 들여다보면 한국영화로는 2013년 이민규 감독의 <아담과 개> 한 작품만이 단편 애니메이션상 후보에 올랐고, <기생충>이 수상한 지난해 이승준 감독의 <부재의 기억>이 단편 다큐멘터리상 후보에 오른 바 있다. 한국계 미국인까지 포함해도 <기생충>과 <미나리> 이전 수상 단상에 오른 영화인은 없었다.

사실 유독 한국영화가 아카데미와 인연이 없었던 것은 아카데미 시상식이라는 행사의 성격 자체가 다른 영화제와 크게 다른 탓도 있다. 유럽의 3대 국제영화제로 꼽히는 칸영화제, 베니스영화제, 베를린영화제에서는 작품과 배우 모두 수상한 경력이 있다. 이들 3대 국제영화제는 수상자를 선정하기 전 개봉하지 않은 영화들이 후보에 오르는 영화제라는 성격에 충실한 반면, 아카데미는 이미 개봉한 영화들을 대상으로 아카데미 회원들의 투표를 거쳐 수상을 결정한다. 게다가 국제영화제가 말 그대로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의 다양한 작품을 초청하는 과정을 거치지만 아카데미는 봉준호 감독의 표현대로 미국의 ‘로컬상’이기 때문에 미국영화가 우선 후보가 된다. <미나리>나 <기생충>처럼 미국에서 개봉하지 않으면 국제장편영화상 등 일부 부문을 제외하고 후보에 오르기조차 어렵다. 그러니 작품이나 감독이 아닌 배우가 수상하기는 더욱 어려운 셈이다.

3대 영화제 여우주연상은 한 차례씩

아카데미보다 결코 권위가 낮다고 할 수 없는 3대 국제영화제에서 한국 배우들은 여러 차례 연기를 인정받아 왔다. 한국 배우가 이들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것은 1987년 <씨받이>로 제44회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탄 강수연씨가 최초였다. 베니스영화제에 한국영화가 본선에 오른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후 2002년 제59회 베니스영화제에서 <오아시스>로 문소리씨가 신인배우상을 수상했고, 이창동 감독도 감독상을 탔다. 그리고 2007년 제60회 칸영화제에서 전도연씨가 <밀양>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베를린영화제에서는 2017년 김민희씨가 <밤의 해변에서 혼자>로 여우주연상을 타면서 한국 배우가 3대 영화제에서 모두 여우주연상을 한 차례씩 타는 기록이 완성된 바 있다.

배우 개인의 연기 외에도 한국영화 작품은 그동안 3대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성과가 적지 않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가 2004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고, 김기덕 감독은 같은 해 <빈 집>으로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받고,

<사마리아>로 베를린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그 밖에도 1961년 베를린영화제에서 <마부>의 강대진 감독이 특별은곰상을, 2002년 칸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이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한국영화가 받은 트로피는 많았다.

아카데미는 미국에서 ‘개봉’만 한다고 대상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일주일 이상 상영돼야 하고, 장편일 경우 러닝타임이 40분 이상이어야 한다. 미국 대중을 오랫동안 직접 만나야 한다는 것인데, 다른 국제영화제에서는 보기 힘든 조건들이다. 이런 과정을 모두 거쳐 후보가 됐다고 하더라도 8000여명에 달하는 전문 영화인들로 구성된 아카데미 회원들이 분야별 투표를 해 수상자가 가려진다. 15편의 작품을 먼저 뽑는 예비후보 명단에도 이름을 올리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배우 윤여정씨의 이번 수상은 그런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미국 개봉작이어서 주요 부문에 후보에 오를 수 있는 허들은 비교적 넘기 쉬웠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미국 국적도 아니고 영어권 배우도 아닌 아시아 배우가 후보를 넘어 수상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연기력과 작품 해석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의 수상은 1957년 <사요나라>에 출연한 일본 배우 우메키 미요시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이후 아시아 배우로는 64년 만이다. 그는 미국 배우조합상과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등에서 영화 <미나리>로만 현재까지 38개의 트로피를 모았다. 비단 아카데미뿐 아니라 전 세계가 그의 연기에 주목했다는 얘기다. 그는 “(오스카상을 받았어도) 나는 달라질 것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궁금하다. 그를 보는 글로벌 영화인들의 눈은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배우 윤여정의 다음 ‘여정’은 어디일까.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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