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도 전시 성폭행 당하는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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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베레트(34)는 ‘그날의 일’이 떠올라 불면에 시달리고 있다. 3월 8일, 그는 피란길에 나섰다. 반군 티그라이인민해방전선(TPLF)과 내전을 벌이고 있는 에티오피아군과 연합군이 악베레트가 살던 티그라이의 한 마을을 침공하면서다. 피란 중 악베레트에는 또 다른 재앙이 불어닥쳤다. 연합군인 암하라군은 악베레트를 외딴 폐가옥 안으로 끌고가 집단 강간을 저질렀다. 군인들은 “티그라이의 자손이 태어나선 안 된다”며 뜨거운 금속 막대를 악베레트의 몸 안에 집어넣었다.

지난 3월 1일(현지시간) 한 에티오피아 여성이 내전 중 포격당한 흔적이 남아 있는 자신의 집 앞에 서 있다. / 우크로|AFP연합뉴스

지난 3월 1일(현지시간) 한 에티오피아 여성이 내전 중 포격당한 흔적이 남아 있는 자신의 집 앞에 서 있다. / 우크로|AFP연합뉴스

사라진 피해여성

피해를 당한 건 그만이 아니었다. 유엔은 4월 14일 티그라이 분쟁 지역에서 100건이 넘는 끔찍한 강간 사례가 보고됐다고 밝혔다. 에티오피아 메켈레 지역의 한 병원은 지난해 11월 내전이 일어난 이후 4월 말까지 티그라이 지역에서 병원을 찾은 성폭행 피해자가 800명이 넘는다고 알자지라에 밝혔다. 의료진은 피해 환자들의 몸 안에서 못, 돌, 플라스틱 조각 등을 꺼냈다.

전쟁은 자궁을 학살해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은 아시아 등지에서 성착취를 당했다. 연합군은 독일 점령지의 여성을 전리품으로 여기며 성폭행을 저질렀다. 독일 역사학자 미리암 게바르트는 2015년 펴낸 저서 <군인들이 왔을 때>를 통해 당시 86만명이 피해를 당했을 것으로 추산했다. 한국군도 베트남전쟁 당시 일부 병사들이 현지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주장이 있다. 어느 나라에서, 무슨 이유로 전쟁이 일어났든 여성은 국가 혹은 조직이 일으킨 폭력의 희생양이 됐다.

전쟁 후 수많은 강간 피해자들은 사라졌다. 이들은 생존해 있음에도 전쟁이 자신에게 저지른 폭력의 역사를 숨겨야 했다. ‘여성의 정조’라는 가부장적 도그마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피해 사실을 말해봤자 손해를 입는 쪽은 피해 생존자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몸을 판 여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손가락질을 받고, 피해 사실을 알게 된 가족이나 이웃으로부터 내쫓겼다.

피해 생존자를 위한 국가의 역할은

국내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 역시 피해를 당했던 시점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지만, 고 김학순 할머니가 피해 사실을 최초 공개증언한 1991년에 이르러서야 진실을 말할 수 있었다. 고 김경순 할머니는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1993)에서 “자식이 있고 남편이 있어 내 원통한 세월을 마음껏 통곡도 못 한다. 내가 위안부로 갔다 온 사실을 사돈댁에서라도 알게 된다면 자식들 인생이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고 김경순 할머니가 1992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에 위안부 피해 사실을 등록한 뒤에야 그의 딸은 엄마의 피해 사실을 알게 됐다.

강간당했다는 사실을 숨겨야 하는 현실은 옛이야기가 아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전시 성폭행 생존자들은 정조를 잃었다는 자책감과 수치심에 시달리고 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는 2019년 발표한 성명문에서 “신고되지 않은 전시 성폭행 사례가 많아 어떠한 통계나 수치도 실제 일어난 피해 사례 수를 정확히 나타낼 수 없다”며 “강간 사례 1건이 접수되면 실제로는 10~20건이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이 지난해 5월 공개한 남수단 내전 성폭력 생존자 보고서에 따르면 한 생존자의 남편은 아내의 피해 사실을 알게 된 후 가정폭력을 행사했다. 다른 생존자는 “피해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특히 남편에게는”이라고 진술했다. 강간을 당했다는 소문이 퍼진 후 지인 모두가 자신을 피해 자살 충동이 들었다는 여성의 사연도 담겼다.

지난 4월 21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국내 법원에 제기한 두 번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판이 기각된 뒤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에서 나온 원고 이용수 할머니가 입장을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4월 21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국내 법원에 제기한 두 번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판이 기각된 뒤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에서 나온 원고 이용수 할머니가 입장을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

피해 생존자들을 침묵시키는 사회는 가해자 처벌도 어렵게 만들었다. 현실적으로 가해자를 법정에 세우고, 처벌받게 하기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하다. 하지만 전쟁이 터져 대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피해 사실을 증명하고, 가해자의 신원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증언이 증거로 인정되기도 하지만, 피해자들은 증언마저 꺼리고 있다. 법정 증언 시 자신의 피해 사실을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인권단체 국제 앰네스티는 2017년 발간한 남수단 내전 관련 보고서에서 “피해자와 그의 가족이 강간을 수치로 받아들여 여성과 소녀에 대한 강력 범죄는 종종 법원 밖에서 해결된다”며 “가해자에 대한 기소도 드물다”고 했다. 국제 앰네스티는 1998년부터 1년 넘게 일어난 코소보전쟁과 관련해 기소된 전시 강간사건은 3건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하기도 했다. 당시 강간 피해자는 집계기관에 따라 1만~2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4월 21일 서울중앙지법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국내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두 번째 손해배상 소송을 각하하기로 결정했다. 재판부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에 대한 한일 합의가 유효한 상황에서 주권면제 원칙(한 국가의 법원이 다른 국가를 소송 당사자로 재판할 수 없다는 국제관습법)을 인정해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한일청구권협정과 한일 위안부합의는 이번에도 또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발목을 잡았다. 일본도 피해자 배상은 한일청구권협정과 한일 위안부합의로 끝난 일이라며, 위안부 피해 생존자에 대한 더 이상의 배상과 공식 사과를 회피하고 있다.

시민단체를 넘어 국가가 진상조사 나서야

문제는 피해 생존자와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양국이 일방적으로 두 협상 내용을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한일청구권협정이 맺어진 1965년 당시 위안부 피해 생존자의 존재는 사회 전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으며, 당시 일본으로부터 받은 배상금은 이들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이는 국가가 전시 강간 피해에 대한 정확한 조사를 벌이지 않고, 피해자들과의 소통 없이 배상문제를 처리했을 때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밖에 없는 피해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피해 사례를 모으고 기록하는 일도 중요하다. 리비아 심리학자 세함 세르기와는 리비아 내전 중 난민캠프에 찾아가 손수 설문지 5만장을 돌려 강간 피해자 수를 집계했다. 세르기와가 모은 기록은 국제형사재판소에 리비아군의 전쟁범죄 혐의 증거로 제출됐다. 하지만 개인이나 시민단체가 조사를 벌일 수 있는 규모와 기간에는 한계가 있다. 전쟁을 일으킨 주체인 국가도 적극적인 진상조사에 나서야 한다.

<윤기은 국제부 기자 energyeun@kyungy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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