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공정한 절차가 재판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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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이따금 친구나 지인이 재판받고 있는데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묻는다. 절차가 어떻게 진행될지 알려주면 “그건 알겠는데 이기는지 지는지, 집행유예로 나올지 궁금하다”고 재촉한다. 어쩔 수 없는 경우 “당신 말이 옳다면 이럴 가능성이 많다”라고 말한 뒤 바로 단서를 붙인다. “재판은 양쪽 말을 다 들어야 하는데, 상대방 말은 듣지 못했다. 담당 판사가 보는 기록에는 당신에게 불리한 내용이 많을 것이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돈에 관한 민사재판이든 죄인을 처벌하는 형사재판이든 재판은 절차에서 시작해 절차로 끝난다. 아무것도 몰랐던 판사는 양쪽이 공방을 벌이는 과정에서 실체적 진실을 찾아내고 결론을 내린다. 재판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될까? 민사재판은 원고가 법원에 소장을 내면서 시작된다. 원고는 소장에 피고에게 무엇을 구하고(청구취지) 그 근거는 무엇인지(청구원인) 적어야 한다. 소장을 받은 피고는 원고의 주장을 받아들이거나 다투는 답변서를 법원에 제출한다. 그후 원고와 피고는 서로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는 준비서면을 제출한다. 계약서 등 관련 서류를 서증으로 제출하고 증인을 신청할 수 있다. 판사는 양쪽이 낸 문서와 말(구두변론)을 기초로 쟁점을 정리하며, 서증을 조사하고 증인을 신문한다. 심증을 굳힌 판사는 법정에서 양쪽의 권리와 의무를 정하는 판결을 선고한다.

절차에서 시작해서 절차로 끝나는 재판

형사재판 전 단계는 수사와 기소다. 수사는 대체로 경찰서나 검찰청에 피해자가 피의자를 고소하거나 제3자가 고발하면서 시작된다. 검사는 경찰의 수사와 자체 수사를 거쳐 범죄혐의가 있고 처벌할 가치가 있는 죄인을 형사재판에 넘긴다(공소제기 또는 기소). 본 단계인 공판절차에서 판사는 법정에서 검사와 변호인이 제출한 증거를 조사하고 증인과 피고인을 신문해서 심증을 얻은 후 유·무죄를 판단하고 형을 정한다. 공판절차는 구체적으로 진술거부권 고지, 피고인 인적사항 확인, 검사와 피고인 측 최초 진술, 증거조사와 피고인 신문, 검사의 논고(구형)와 피고인 측 최후 변론 순서로 진행된다.

법원은 소송절차가 공정하게 진행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민사소송법 제1조). 공정한 재판은 양쪽을 대등하게 취급하고 유리한 사정을 주장할 기회를 고르게 주는 것이다. 당사자는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충돌하므로 공격하고 방어할 기회를 공평하게 부여받을 권리가 있다. 형사재판에서는 검사가 피고인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으므로, 피고인의 방어권을 적절하고도 효과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피고인의 권리는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된다. 어떤 사람은 판사가 피고인만 편들고 감싸준다고 비난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죄인을 만들지 않기 위해 법이 정한 절차를 지키는 것이다. 재판절차가 공정해야 판사는 실체적 진실을 찾아내고, 당사자는 결과가 올바를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재판은 공정할 뿐만 아니라 공정하게 보여야 한다.

재판절차의 공정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몇가지로 정리된다. ①아무도 자기 자신의 사건에서 재판관이 될 수 없다. ②재판관은 결과에 대해 사적 이해관계가 없어야 한다. ③재판관은 한 당사자에게 유리하게든 불리하게든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 ④당사자에게 절차에 대해 지식이 공정하게 주어져야 한다. ⑤재판관은 양 당사자에게서 주장과 증거를 들어야 한다. ⑥재판관은 상대방이 보는 데서 일방 당사자의 진술을 들어야 한다. ⑦각 당사자는 상대방의 주장과 증거에 대해 대처할 공정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형사소송법에 규정된 ‘적법절차’

모든 국민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구속될 수 있고 처벌받을 수 있다(헌법 제12조). 시민에게 가장 두려운 국가의 권한은 구속과 처벌이다. 합리적이고 정당한 법률에 의해 적절한 절차를 거친 경우만 가능하도록 규율한다. 형사소송법은 이런 ‘적법절차’의 내용을 수사와 재판 단계별로 상세히 규정하고, 검사와 판사가 공권력을 행사하면서 지키지 않은 경우 효력을 부인한다. 수사기관이 피의자를 구속할 때 판사의 영장이 있어야 하는 ‘영장주의’가 제일 중요하다. 다른 예로 피고인의 자백이 고문·폭행·협박이나 기망에 의한 것이라면 유죄의 증거로 하지 못한다. 진술거부권을 알려주지 않고 구속해 얻은 자백도 효력이 없다. 수사기관이 적법한 절차에 따르지 않고 수집한 증거는 증거로 할 수 없다.

적법하고 공정한 절차는 행정기관이 시민에게 세금을 부과하거나 신청을 허가하지 않을 때도 지켜져야 한다. 법이 정한 절차를 지키지 않을 경우, 시민은 그 처분을 취소해달라고 행정소송을 낼 수 있다. 행정기관의 처분이 실질적으로 정당하더라도 절차적 하자가 무거우면, 법원은 행정처분을 취소해야 한다. 행정기관이 공무원을 징계할 때도 절차를 지켜야 한다. 2020년 12월 검찰총장에 대한 정직 2월의 징계가 정당한지 엄청나게 많은 논쟁이 있었다. 서울행정법원은 집행정지사건에서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이유 중 하나가 징계위원회가 의사결정과정에서 적법절차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의사 정족수와 의결 정족수에 대한 법규정이 명확하지 않고 회의진행 관행이 확립되지 않아 논란의 여지가 있다. 기본적인 사항까지 논란이 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집단적으로 토론하고 의결하는 절차의 방법과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데 있다. 민주주의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공적 논의와 결정 과정에 평등하게 참여하고 승복하는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 법치주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사람의 권리와 죄인의 형벌을 정하는 실체법은 나라에 따라 많이 다르지만, 재판절차를 정하는 절차법은 대체로 비슷하다. 다투는 사람에게 공정하게 기회를 주면서 진실을 찾아내는 방법은 공통되기 때문이다. 1789년 이전 프랑스에서 판사는 변호사가 제출한 문서만 보고 재판을 했다. 대혁명 이후 판사가 법정에서 직접 말을 듣도록 바뀌었다. 우리나라도 1997년 영장실질심사제도로 판사가 법정에서 피의자 말을 들으면서 구속 인원이 대폭 줄어들었다. 재판절차를 공정하고 엄격하게 지키려면 시간이 걸린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빨리빨리’ 정신이 우리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점이 많다는 평가는 인정하지만, 공정한 재판을 바란다면 법정에서는 기다려야 한다.

<박형남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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