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0 과학오디세이

이주한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대형연구시설기획연구단장 “과학시설은 국산화만 고집하면 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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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과학이 한 단계 도약한 순간은 언제일까. 이주한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대형연구시설기획연구단장은 포항 방사광 가속기가 준공된 1995년을 꼽는다. 포항 방사광 가속기가 만든 ‘빛’이 과학 인재를 길러냈다고 본다. 한해 3000명이 포항 방사광 가속기를 찾는다. 지금도 35개 빔 라인(빛을 내는 장치)은 쉴새 없이 돌아간다.

이주한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대형연구시설기획연구단장

이주한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대형연구시설기획연구단장

1995년 준공 이후 25년간 포항 방사광 가속기는 제 역할을 다했다. 그사이 설비는 구식이 됐다. 이 단장은 10년 전부터 차세대 방사광 가속기 도입을 주장했다. 하지만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해 충북 청주 오창에 4세대 방사광 가속기 건립이 결정됐다. 오창 프로젝트를 총괄기획하고 이끌었던 이 단장에게 “어떻게 정부의 마음을 움직였느냐” 물었더니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덕분”이라고 답했다. 무슨 말일까. 지난겨울 갑작스러운 중증질환 진단을 받고 치료를 위해 병가를 낸 그를 4월 13일 대전 자택 인근 한 카페에서 만났다.

-큰 수술을 받았다고 들었다. 몸은 좀 어떤가.
“죽다 살아났다. 다행히 수술 경과가 좋다. 후유증으로 몸이 부자연스러운데 지금 거의 회복됐다. 오창 방사광 가속기 건으로 신경을 너무 많이 썼다. 몸이 못 버틴 것 같다.”

-왜 그렇게 방사광 가속기에 매달렸나.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포항 방사광 가속기 이용 경쟁률이 2.5 대 1이 넘는다. 가속기에서 실험 한번 하려고 기다리는 분들이 많다. 지금 가속기만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 앞으로 방사광 가속기의 쓰임이 더 다양해질 텐데 대기줄은 지금보다 늘어날 것이다. 과학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차세대 방사광 가속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10년 전부터 ‘새로 지어야 한다’고 얘기했고, 이번에 만들게 된 것이다.”

-방사광 가속기가 무엇인가.
“쉽게 말해 빛을 만드는 빛 공장이라고 보면 된다. 전자를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시키면 접선 방향으로 다양한 빛(방사광)이 나온다. 과거 인류에게 빛은 태양이나 조명에서 나오는 빛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방사광 가속기를 이용해 다양한 파장의 빛을 만든다. 이렇게 만든 빛으로 물질의 구조를 분석할 수 있고, 세포 분열 과정과 같은 찰나의 변화까지 모두 포착할 수 있다. 기초과학부터 응용과학, 신약 개발, 반도체 제조 분야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쓰인다.”

-정부가 차세대 방사광 가속기 건립에 반대했던 것으로 안다.
“방사광 가속기 추가 건립은 말도 꺼내지 말라는 게 정부 입장이었다. 이미 한국은 가속기 사업을 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 추진한 한국형 중이온 가속기 구축 사업이다. 2017년 완공을 목표로 2011년부터 짓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완공 못 했다. 이렇게 되니까 중이온 가속기가 완공되기 전에는 다른 가속기는 아예 말을 꺼내지 않는다는 분위기였다. 과기부도 그렇게 방향을 정했다. 박근혜 정부를 거쳐 문재인 정부로 넘어오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중이온 가속기부터 마무리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다가 2019년 일본 수출규제로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사태가 터졌다. 우리는 탄탄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지 않나. 그때 방사광 가속기 건립에 대한 여론이 180도 바뀌었다. 반도체 소재의 해외 의존도를 줄이려면 방사광 가속기 구축이 필수다. 그때부터 정부 차원에서도 본격적으로 필요성을 느꼈고, 그래서 추진이 됐다. 오창 방사광 가속기 건립의 수훈 갑은 역설적이지만 일본의 소재·부품·장비 도발이었다.”

-중이온 가속기 사업은 왜 지연되고 있나.
“지금 표류 중인 중이온 가속기 사업은 ‘한국형’ 중이온 가속기를 만드는 게 목표다. 한국형, 국산화를 고집하는 게 문제다. 국산화? 당연히 필요하다. 그런데 과학시설은 국산화를 목표로 하면 안 된다. 일단 최고 성능의 시설을 갖춘 후 활용을 잘해서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국산화는 그다음이다. 한국은 가속기와 같은 거대한 첨단 연구시설을 우리만의 힘으로 구축할 수 있는 기술이 부족하다. 핵심기술은 여전히 외국에서 들여와야 한다. 해외기술을 들여오면 1년이면 만들 설비인데 우리 힘으로 하겠다고 고집하다가 시간을 소모하고 재정이 늘어나면서 어려워지게 된다. 우리는 아직 가속기 설비 관련 노하우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일단 필요한 핵심기술이 있는 나라에서 가져와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매국노라고 비판하는데 답답하다. 특히 정치인들이 국산화를 참 좋아한다. 실적으로 남으니까. 그래서 누가 국산화 얘기하면 거기에 매몰된다. 부실한 기획에 무리하게 국산화까지 넣었으니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방사광 가속기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유감스럽지만 한국은 방사광 가속기 건설 분야 초일류 국가는 아니다. 미국, 독일, 영국, 일본이 초일류 그룹이고, 그 뒤를 다른 유럽 국가와 중국 그리고 한국이 추격하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낙오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만해도 선방한 편이다. 일본에서 가속기를 처음 만든 시기가 1920년이다. 1920년에 세계에서 2번째로 큰 가속기를 지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역사가 짧다. 본격적으로 과학연구를 시작한 게 1960년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은 시간 동안 많이 따라왔다. 늦었지만 출발한 게 다행이다.”

[2050 과학오디세이]이주한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대형연구시설기획연구단장 “과학시설은 국산화만 고집하면 망해”

-오창 방사광 가속기는 포항 방사광 가속기와 무엇이 다른가.
“포항 3세대 방사광 가속기에서는 태양광의 100억 배에 이르는 빛을 만든다. 오창 방사광 가속기는 포항 가속기의 100배 이상 성능이다. 빔 사이즈는 오창은 포항의 10분 1 이하 수준으로 작다. 빔이 작고 강할수록 더 작은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포항 가속기로 할 수 없었던 미세분석이 가능하다. 더 중요한 것은, 오창 방사광 가속기는 과학계뿐 아니라 산업체 활용도가 높을 것이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산업 지원을 주요 포인트로 잡았다. 최소 30% 이상을 산업체 지원에 할당했다. 가동 이후에는 반도체 분야를 비롯한 산업체 활용 비율이 더 높아질 것이다.”

-이러면 기초과학 지원에 소홀해지는 것 아닌가.
“일본 도호쿠대학 내에 방사광 가속기를 짓고 있다. 여기는 산업체가 7을 쓰고 대학과 연구소가 나머지 3을 쓴다. 지금은 그런 시대다. 일부 과학계에선 ‘과학과 기술을 분리해야 한다’, ‘기초과학과 순수과학에 집중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데 그런 시대는 끝났다. 돈은 안 되지만, 과학 발전을 위해 연구할 테니 국가가 돈을 대라? 전 세계 어디에도 그런 방식으로 지원하는 나라는 없다. 우리는 국민 세금으로 연구하기 때문에 국가와 사회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과학은 산업에 도움이 돼야 한다. 예산을 받아 연구했으면 실적을 내야만 하는데, 그 실적은 논문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가로 따져야 한다. 과학과 산업은 분명히 다르지만, 산업에 문제가 생겼을 때, 문제의 솔루션은 과학이 제공해야 한다. 산업뿐만 아니라 국가적 위기에서도 과학은 해답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조금 더 설명해달라.
“단적인 예가 코로나19 팬데믹이다. 이 사태에서 드러난 사실은 과학의 저력이 있는 나라는 버텨낸다는 것이다. 미국과 영국은 코로나19로 큰 타격을 입은 나라지만 결국 그 나라가 백신을 만들어내지 않았나. 지금 백신 접종 추이를 보면 두 나라는 곧 집단 면역에 들어설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백신을 만들지 못하는 나라는 그저 백신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한국도 과학 베이스가 있기 때문에 치료제든 진단키트든 그나마 대응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과학을 못 하는 나라는 아무것도 못 한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시스템 반도체 품귀 사태도 기술이 있으면 살아남는다. 지금은 코로나19, 시스템 반도체지만 앞으로 이런 일들은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여기에 대한 솔루션은 과학이 쥐고 있다.”

-한국 과학계는 솔루션을 낼 역량이 있나.
“우리나라 과학정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평가시스템의 문제다. 근본적으로 평가시스템을 개혁하지 않으면 그 장래가 밝지 않다. 사스와 메르스 사태 후에 정부의 R&D 예산이 그쪽에 많이 배정됐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에서 우리 과학계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그 예산으로 무엇을 했나 봤더니 논문이 많이 나왔더라. 왜? 논문 편수로 결과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논문을 위한 논문을 쓴다. 전에 삼성 갤럭시 배터리 폭발 사고 때도 고질적인 문제점이 드러났다. 당시 배터리 관련 논문을 발표하고 혁신 기술인 양 언론에 나오던 교수들과 논문은 현실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 논문에 게재한 기술 중 실용화가 된 기술은 거의 없다. 논문 편수로 과학 실적으로 평가하고 과제를 주는 시스템부터 손봐야 한다.”

-과학 인재양성 정책은 어떻게 보고 있나.
“과학문화 활성화를 위한 이른바 과학 대중화 사업 예산은 다시 점검해야만 한다. 일련의 과학문화 활동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다. 다만 과학문화가 과학 인재양성 정책의 주류가 되기 어렵다는 얘기다. 과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지속성이 없다. 대중은 재미있는 부분까지만 관심을 갖는다. 예컨대 뉴턴의 만유인력 하면 딱 사과까지다. 그다음 만유인력 공식으로 넘어가면 포기한다. 과학의 대중화는 만유인력의 사과와 같다. 과학 문화활동으로 과학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고 동기 부여를 한다고 하는데 그 끝을 생각하면 회의적이다. 그나마 이런 과학문화 프로그램은 모두 서울 수도권 위주다. 과학은 대도시에서만 하나. 그러니 주니어 닥터 이런 프로그램에 죄다 서울에 있는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온다. 대학 입학 포트폴리오에 쓰려고. 이런 것이 과학문화 대중화인가 생각하면 답답하다. 우리나라 어딘가에는 과학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런 아이들을 발굴해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은 과학 대중화 프로그램 일색이다. 특히 과학 저술이라고 해서 과학 교양서적이 많이 나오는데, 정작 대학에 가면 한글로 된 과학 교재가 없어 다들 원서를 본다. 재미있는 과학 교양서적 대신에 실제 공부에 도움이 되는 전공 교재를 써줬으면 한다.”

-과학을 꿈꾸는 이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과학은 어려운 것이다. 복잡한 절차와 입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결코 쉽지 않다. 모진 마음을 먹지 않으면 과학자가 되기 어렵다. 다만 그만큼 보람이 있는 학문이다. 과학은 진실을 밝혀나가는 과정이고 시작과 끝만 보는 게 아니라 중간 과정에서 실험하고 반복성과 재현성을 검증해야만 정립이 된다. 그러나 유사과학과 미래학은 그 중간이 없고 단지 문제 제기와 그리고 장밋빛 환상만 보여준다. 그래서 유사과학을 조심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과학은 어렵다. 하지만 충분히 할 만한 가치가 있다.”

<글·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사진·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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