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학에 오염된 한국의 과학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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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술수준의 척도라는 ‘2020년도 기술수준평가’가 발표됐다. 과학기술정통부(과기부)가 4월 11일 발표한 이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기술수준은 최고 기술보유국인 미국의 80% 수준이며, 기술격차는 3.3년이라고 한다. 120개 중점 과학기술 분야에 걸쳐 실시된 이번 조사에서 한국은 중국보다 조금 나은 수준으로 평가됐지만, 생명 및 보건의료 분야는 중국에 역전당했다. 우주·항공·해양 분야는 한국이 68.4%, 중국이 81.6%로 2년 전에 비해 격차가 계속해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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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파이기법과 미래학

이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다방면에서 미국을 추격 중이지만, 중국이 우리를 따라잡는 속도는 그보다 훨씬 빠르다고 한다. 김성수 과기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은 “2년 전과 비교할 때 한국의 기술 수준이 향상됐으나 최고 기술보유국 대비 기술격차가 여전히 존재하고 중국이 무섭게 추격해 오고 있다”는 하나 마나 한 말로 이 보고서를 요약했다. 과기부는 “치열해지는 국가 간 경쟁에서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총 연구개발(R&D) 투자는 주요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라며 돈 탓을 했다. 한국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비에서 세계 1위를 한 게 벌써 몇년째다. 한국엔 연구개발비가 없는 게 아니라 돈이 엉뚱한 곳에 사용될 뿐이라는 현장의 목소리는 과기부 관료들에게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사실 한국의 기술수준이 이 정도라는 건 대단한 일이다. 근대과학이 탄생한 유럽, 유럽의 과학을 실용주의 철학으로 재탄생시킨 미국, 메이지유신 때부터 과학기술에 투자해온 일본, 최근 들어 엄청난 국가적 투자로 과학기술에 올인하고 있는 중국에 비한다면 한국은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정말 잘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분명 한국사회에서 활동 중인 현장의 과학기술인들은 세계수준에 올랐고, 제대로 된 기회만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최고의 연구성과를 낼 준비가 돼 있다. 문제는 현장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컨트롤타워다. 한국 과학기술계의 컨트롤타워는 행정편의주의에 빠진 과학기술 관료들의 관료주의와 과학기술에 무지한 정치적 리더십 그리고 그 관료들과 정치인에 빌붙어 기생하는 정치과학자들의 무능으로 무너져가고 있다.

예를 들어, 이번에 과기부가 발표한 기술수준평가는 ‘델파이기법’이라는 연구조사방법론으로 분석된 것이다. 델파이는 미래를 예측했다는 고대 그리스 신의 이름이다. 델파이기법이란 주로 미래의 특점 시점을 예측하는 경우에 사용하는 분석방법인데, 다수의 전문가 직관을 계량화하는 예측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쉽게 말해 한 분야의 전문가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설문조사를 보내고, 그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분석을 수행한 뒤, 그 조사결과를 다시 한 번 전문가들에게 보내 극단적인 편향을 제거하는 분석법이다. 즉 이 기법은 예측이 어려운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전문가들의 부정확한 직관을 평균 내는 통계적 기예다.

이 기법은 1950년대 미국 랜드연구소에서 전통적인 회의식 기법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개발된 이후, 미래학이라는 분야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으나 항상 논란이 되고 있는 연구방법론이다. 예를 들어 질문서 자체가 잘못되면 편향으로 가득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또한 전문가 선정에서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그 결과를 신뢰할 수 없게 된다. 이번에 발표된 120개 중점 분야를 델파이기법으로 평가하기 위해 선정된 전문가풀은 분야당 많아야 10명, 대부분 4~5명이 전부였다.

즉 정부가 향후 과학기술정책을 세우기 위해 국민 세금을 들여 수행하는 기술수준평가가 이렇게 허술한 근거에 기대고 있다는 뜻이다. 보고서에도 쓰여 있듯이, 한국을 제외하면 미국 대비 몇%라는 지표로 기술수준을 발표하는 나라도 없고, 기술격차가 몇년이라는 사실을 전문가 몇명의 의견을 평균 내 발표하는 나라도 없다. 한국 과학기술정책이 만들어지는 방식이 대체로 이렇다. 과학기술현장은 이런 황당한 보고서로 과학기술자들을 조종하는 관료들의 헛소리로 신음하고 있다. 과학기술을 평가하는 방식은 더욱 과학적이어야 한다.

카이스트 총장과 점성술

미래학이 과학기술정책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관료들뿐만이 아니다. 한국처럼 미래학이 발달한 나라는 드물다 할 정도로, 한국의 과학기술 관료와 정치과학자들은 미래학에 목숨을 걸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 퍼진 미래학은 과학기술정책과 과학기술현장에도 파고들어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예를 들어 국회에 세워진 국회미래연구원은 미래학 세력이 국회를 설득해 만들어진 연구기관인데, 과거 제로존이라는 유사과학을 강력하게 지지하던 학자가 주요 보직을 맡고 있다. 미래학의 중심지는 카이스트인데, 카이스트 총장 이광형 교수는 2016년 출범한 미래학회의 초대 학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미래학을 진심으로 사랑하는데, 카이스트에 300억원을 기부한 정문술 미래산업 회장의 돈으로 문술미래전략대학원을 만들어 카이스트를 미래학의 메카로 만들었다.

이광형 총장은 2014년 미래학의 전문가들과 <전략적 미래예측 방법론>이라는 책을 집필하고, 이 책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이 책에서 그는 복잡해지는 현대사회에서 미래를 내다보고자 하는 인류의 욕망이 역술과 점성술이라는 역사로부터 시작되며, 미래학 방법론을 34가지로 집대성해 책을 출판하는 포부를 밝힌다. 그는 저자들에게 경의까지 표하며, 이 책에 기술된 미래학 방법론에 신뢰를 부여한다. 하지만 이 책의 목차는 충격적이다. 5장은 ‘천재적 예측방법’인데, 말 그대로 천재성을 지닌 천재가 직관과 비전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법이다. 19장은 거시 미래예측을 위한 ‘세차운동주기 기법’인데, 별자리로 미래를 예측하는 점성술이다. 32장은 동양미래예측 방법론 중의 하나인 직관에 의한 예측방법, 즉 점학인데, 쉽게 말해 역술원에서 말하는 점 보는 방법이라는 뜻이다. 이 책은 동양의 미래학인 사주명리학도 빼놓지 않는다.

한 나라의 연구개발정책을 책임지는 과기부는 엉성한 델파이기법으로 보고서를 내고, 국회는 유사과학자를 데려다 국회미래연구원을 만들고, 한국 과학의 성지이며 수많은 독지가가 기부하는 카이스트의 총장은 역술인들과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론에 대한 책을 출판한다. 한국 과학기술이 이나마 기능하고 있는 건 이런 쇼비즈니스에 빠진 정치인, 관료, 정치과학자와는 상관없이 오늘도 묵묵히 박봉으로 연구실에서 실험 중인 현장의 과학기술인들 덕분이다. 한국의 과학기술은 위태롭다. 그건 과학기술자들 때문이 아니라 과학기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컨트롤타워 때문이다.

김우재는 한때 초파리로, 지금은 꿀벌로 세계정복을 꿈꾸는 과학자다. 동물의 행동을 신경회로의 관점에서 연구하며, 사회성 행동을 유전학적으로 이해하고 싶어한다. 연구 외에도 과학의 사회적 사용에 관심이 많으며 <플라이룸> 등의 책을 저술했다. 현재 하얼빈공대 생명과학연구센터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우재 낯선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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