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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미얀마는 1980년 광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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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픈 ‘민주화의 기억’ 간직한 한국사회 지지와 연대 확산

한밍툰(24), 민칸소(19), 아응맛링(27)….

광주 시민들이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다 사망한 미얀마인들의 영정을 품에 안았다. 팔목에는 붉은 끈을 둘렀다. 군부 규탄 시위에 나갔다가 숨진 치알신(19)에게 아버지가 주었다는 그 ‘붉은 끈’이다. 종이 울리고 위령제가 시작됐다.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는 갈수록 거세졌다.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 모인 70여명의 시민은 흠뻑 젖고 말았다. 급히 우비를 입었지만 신발에는 계속 빗물이 차올랐다. 미얀마인들이 ‘저항의 날’, ‘반 군부독재의 날’이라 부른 3월 27일, ‘오월의 아픔’을 지닌 광주시민은 그렇게 3400㎞ 거리에 있는 미얀마 시민과 함께했다.

광주 시민들이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열린 ‘3·27 미얀마의 봄 혁명 희생자 추모제’에 참석해 헌화하고 있다. / 송윤경 기자

광주 시민들이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열린 ‘3·27 미얀마의 봄 혁명 희생자 추모제’에 참석해 헌화하고 있다. / 송윤경 기자

‘5월 광주’ 아픔을 알기에

군부의 유혈진압에 목숨을 잃는 미얀마인들을 지켜보면서 한국사회의 많은 시민이 41년 전 ‘5월 광주’를 떠올렸다. 광주시민은 더욱 그랬다. 5·18기념재단을 비롯해 광주의 시민단체들은 지역 내 미얀마인들과 ‘미얀마 광주연대’를 결성했다. 이날 오전의 추모제 ‘주최자’ 역시 미얀마 광주연대다. 2009년 광주인권상의 수상자인 민 꼬 나잉(Min Ko Naing)은 이날 추모제에 앞서 광주에 서신을 보냈다. 그는 1988년 군부 쿠데타에 저항한 ‘8888항쟁’을 이끈 인물이다.

“미얀마 국민은 민주화를 위해 기꺼이 목숨 바칠 준비가 돼 있다. (중략) 힘들 때 손 내밀어 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인 것처럼 한국 국민의 지지가 커다란 힘이 되고 있다.”

미얀마 광주연대의 묘네자 대표가 편지를 읽어내려가는 동안 광장엔 ‘Kabar Makyay Bu(우리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 만족하지 않을 것)’ 노래가 울려퍼졌다. 이 노래는 ‘8888항쟁’ 당시 미얀마 작곡가가 팝송 ‘바람 속의 티끌’을 개사한 것이다. 5·18 광주민주항쟁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있다면 미얀마 시민의 저항엔 늘 이 노래가 함께해 왔다.

빗속 추모제가 끝나자, 옛 전남도청 앞 광장 한켠에선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광주 신광중·각화중 학생들이 미얀마를 돕기 위한 바자회를 하고 있었다.

미얀마 민주화를 위한 모금활동을 위해 광주 신광중학교 학생들이 바자회를 열고 있다. / 송윤경 기자

미얀마 민주화를 위한 모금활동을 위해 광주 신광중학교 학생들이 바자회를 열고 있다. / 송윤경 기자

“100원만 내도 돼. 마음이 중요하니까.” 한 소년이 바자회장 앞을 서성이자, 신광중의 한 학생이 웃으며 말했다. 이들은 미얀마 시민 지지 피켓을 걸어두고, 간식과 직접 만든 수제 비누를 팔았다. 각화중 학생들은 학교에서 모은 가방, 텀블러, 책 등의 기부품을 내놓았다. 비 탓에 오가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모금함엔 금세 현금이 찼다. 정은선양(15)은 “비누를 만드는 데 5시간이 꼬박 걸렸다”면서 “부모님으로부터 5·18에 대해 많이 들었다. 오늘 행사를 한다고 하니 부모님도 의미가 있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직접 피켓을 들고 시장을 돌기도 했다.

이날 바자회엔 ‘오월어머니집’의 회원들이 함께했다. 5·18 광주민주항쟁에서 남편과 형제, 자매를 잃은 이들이다. “어린것이 우리나라 살려주세요, 라고 할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5·18로 오빠를 잃은 김형미씨(57)는 지난달 광주의 미얀마인들과 만났을 때 “남의 일 같지 않았다”고 했다.

“5·18 같은 일이 또 일어나면 난 그냥 죽어버리겠다고 했지. 너무 힘들었으니까….” 남편이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매일 가택수색을 당하던 시절을 얘기하던 오월어머니집의 이명자 관장(70)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고 말해왔는데 미얀마 사태가 터지니까, 그곳에 가서 돕고 싶다는 생각부터 들었다”고 했다. 이들은 5년 전 미얀마로 건너가 ‘88어머니회’ 여성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나보다 어려 보여 안쓰러웠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오후 3시, 빗줄기는 더 굵어졌지만 옛 전남도청 앞에선 또 다른 집회가 열렸다. “팔뚝에 혈액형과 연락처를 적고 시위에 나간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저희도 과거에 버스 안에서 속옷에 사인펜으로 이름, 주소를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실과 바늘로 꿰매 표시해 놓기도 했고요. 우리가 죽으면 그것으로 확인이 될 테니까요.”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 미얀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미술인들이 만든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 미얀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미술인들이 만든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지지와 연대의 물결

41년 전 차명숙씨(60)는 5월 19일부터 사흘간 차를 타고 돌며 거리방송을 했다. 군인들의 만행을 알리고, 도청에 모여달라고 호소했다. 당시 그는 열아홉 살이었다. “그때 저를 저격하려 했던 군인 얘기를 지인이 전해주었어요. 총을 쏘려다가 제가 너무 어려 그러지 못했다고 하더래요.” 40여년간 지독한 트라우마에 시달렸던 그는 지금 미얀마인들의 항쟁이 ‘역사’로 기록되지 못할까봐 애가 탄다. 최근까지도 ‘간첩이었느냐’는 질문 따위에 시달렸던 그는 “시민들이 겪은 이야기 하나하나를 무조건 다 기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없었던 일로 치부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한국사회 시민들에게 새겨진 ‘민주화의 기억’은 미얀마인의 아픔을 받아들이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1960년의 4·19,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 1980년의 5·18, 1987년의 6월항쟁을 기억하는 시민들은 서울·대전·전북·경북 각지에서 미얀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모임을 만들고 있다. 옛 전남도청에서 집회가 계속됐던 27일 저녁 서울에선 ‘미얀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한국 시민사회단체 모임’이 분향소를 설치했다.

주한 미얀마대사관 인근에서도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군부 쿠데타 직후인 2월 5일 청년단체 ‘세계시민선언’이 침묵행진을 하는가 하면 최근엔 민교협(민주평등사회를 위한 전국 교수연구자 협의회)이 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미얀마의 민주화를 지지합니다’라는 컵홀더를 제작해 나눠준 카페(부산 홍지컴퍼니)도 있고, 미얀마 군부를 규탄하기 위해 그림을 그려 연대한 미술인들(생명평화 미술행동)도 있다.

인증샷 참여와 모금 열기도 뜨겁다. 사회적협동조합 ‘빠띠’의 미얀마 민주화 캠페인엔 1000여명의 시민이 참여해 인증샷을 남겼다. 해외주민운동연대엔 약 한달간 1500명의 시민으로부터 1억2000만원의 기부금이 모였다. 미얀마 광주연대 역시 2주간 1000명의 시민이 모금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의구현사제단도 최근 모금을 시작했다. 기부금은 부상자 치료, 시위물품 구입 등에 쓰인다.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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