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싱크탱크 침체 벗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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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보다 눈앞 성과 노린 정치에 좌우… 젊은 연구자들이 목소리 낼 수 있어야

한국토지주택공사(LH) 임직원들이 3기 신도시 사업 예정지역의 토지를 투기성 매입했다는 의혹이 정치인, 공무원의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확대되고 있다. 처음 의혹을 제기했던 곳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참여연대라는 점에서 LH 사태는 시민사회 싱크탱크의 공익적 가치를 입증한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야를 확대해 보면 한국의 민간싱크탱크는 2010년대 이후 긴 침체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국책연구기관을 제외하고는 진보나 보수 진영을 막론하고 민간의 싱크탱크는 재원과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영향력도 예전같지 않다.

지난 3월 26일 서울 마포구 희망제작소 사옥에서 ‘민간싱크탱크의 역할과 미래’를 주제로 집담회가 열리고 있다. 오른쪽부터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집행위원장, 김병권 정의정책연구소 소장, 송창석 희망제작소 이사, 임주환 희망제작소 소장, 정창기 희망제작소 부소장 / 희망제작소 제공

지난 3월 26일 서울 마포구 희망제작소 사옥에서 ‘민간싱크탱크의 역할과 미래’를 주제로 집담회가 열리고 있다. 오른쪽부터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집행위원장, 김병권 정의정책연구소 소장, 송창석 희망제작소 이사, 임주환 희망제작소 소장, 정창기 희망제작소 부소장 / 희망제작소 제공

부의 불평등과 고용 불안정, 기후위기와 지역소멸, 코로나19 확산 위기 앞에서 한국사회는 대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기본소득을 비롯한 보편적 복지와 증세 방안, 탄소중립, 지역의 활력 제고를 위한 여러 제안이 백가쟁명식으로 논의되고 있다. 분출하는 시민의 요구를 정책으로 다듬어 내고, 이를 실천으로 구체화하는 민간싱크탱크의 역할이 필요한 때다. 민간싱크탱크가 침체를 벗어나 사회 대전환을 위한 ‘싱크 앤 두’(정책과 실천) 조직이 될 수 있을까. 지난 3월 26일 서울 마포구 희망제작소 사옥에서 열린 집담회 ‘민간싱크탱크의 역할과 미래’에서 해답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참여사회연구소·희망제작소가 대표적

집담회에 참석한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의 설명에 따르면 싱크탱크는 “특정 집단이나 세력의 사회적 이익 실현에 도움이 되는 정책형성에 필요한 정교한 정책지식을 가공하고 생산해 내는 조직체”이다. 싱크탱크는 설립과 운영 주체에 따라 국가싱크탱크와 민간싱크탱크로 나눌 수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같은 국가싱크탱크는 1970~1980년대 경제발전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민간싱크탱크는 1980년대 중반 이후 기업 출연연구소가 등장하면서 시작됐다. 2003년 출범한 노무현 정부의 국정 방향에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정도로 2000년대 초반 기업 주도 싱크탱크의 영향력은 컸다. 비슷한 시기 자본과 기업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기업 싱크탱크에 대항한 시민주도 싱크탱크도 생겼다. 1996년 설립된 참여연대의 참여사회연구소, 2006년 설립된 희망제작소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사회에서 싱크탱크는 너나 할 것 없이 침체기에 접어든다. 몇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정책 대결보다 진영논리가 좌우하는 정치의 양극화는 외부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장기적인 의제 설정에 실패하고, 재정과 인력에서 지속가능한 구조를 갖추지 못한 것은 내부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송창석 희망제작소 이사는 이명박 정부가 민간싱크탱크와 ‘소통’하는 대신 ‘소탕’에 나섰다는 말로 정치지형 변화를 침체의 한 원인으로 언급했다. 송 이사는 “희망제작소로 좁혀서 보면 이명박 정부가 국정원 사찰 등으로 기업의 후원 중단을 압박하면서 재정위기로 구조조정을 겪게 됐다”면서 “출범 당시 80여명의 연구진과 80억원을 상회하는 예산 규모였는데 지금은 그에 비하면 어려운 상황에 있다”고 말했다.

김병권 정의정책연구소 소장은 민간싱크탱크가 2010년대 이후 여론을 선도할 만한 의제를 제시하지 못한 것이 영향력 하락의 한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N포세대, 흙수저 등 청년문제가 10년 사이 꾸준히 커졌지만 제대로 된 정책을 내놓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 정치가 진영구도로 흘러가고, 제3지대에서 독자적 영역을 갖춰야 할 싱크탱크가 그 안에 흡수되면서 과감한 개혁 정책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해석과 이어진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집행위원장은 “싱크탱크의 브레인 역할을 하는 인력들이 정치진영에 들어가면서 명맥이 끊기고, 정당의 제도적 형태로 질문을 던지면서 진영화·온건화되면서 자연스레 역량이 낮아졌다”고 말했다. 오 위원장은 진보진영 싱크탱크가 보편증세나 연금개혁·통합 같은 근본적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것도 이런 진영화·온건화의 결과라고 봤다.

반면 송창석 이사는 정치와 정책의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정책 보고서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고, 정치권과 협업해 정치라는 합법적 권위를 부여하는 데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헤리티지재단이나 브루킹스연구소처럼 싱크탱크 구성원이 정권에 참여하고 돌아와 실무적인 경험을 축적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봤다.

2010년대 이후 과감한 의제 제시 못 해

최근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 위원에 내정된 리나 칸 컬럼비아대학 법학 교수는 2016년 27살 때 작성한 ‘아마존의 반독점 역설’이라는 논문으로 미국 반독점 규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소비자에게 불리한 가격 부담을 주지 않으면 특별히 규제할 필요가 없다는 주류 해석을 배척하고, 약탈적 가격으로 지배적 위치를 점한 후에는 그간의 손실을 가격에 반영하거나 다른 기업에 떠넘기는 식으로 독점의 횡포가 일어날 수 있다면서 규제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논문 하나로 정부 정책 방향을 뒤바꾼 이런 청년 연구자를 한국 싱크탱크에선 보기가 어렵다. 김병권 소장은 “삶의 전망이 굉장히 불안정해서 민간싱크탱크에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 소득 안정을 줄 수 없다면 열정이나 내적 동력을 줘야 하지만 둘 다 못 주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싱크탱크가 진화하려면 시대 변화를 민감하게 포착하는 청년 연구자들이 자리 잡고,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뜻이다.

국가의 공적 지원과 참여소득 같은 새로운 제도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박명준 위원은 “(재원의) 파이프라인이 정부에서 나오게 하되 정치적 독립성의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독일처럼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메커니즘을 제도와 문화로 공고히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병권 소장은 “시민단체 활동을 포함한 긍정적인 사회 참여 활동을 사회가 인정해주고 그에 상응해 공공이 일정한 방식으로 보상한다는 합의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임주환 희망제작소 소장은 정책 전문가 집단과의 협력을 강조했다. 희망제작소는 현재 국책연구기관 은퇴자 등 20여명이 참여하는 ‘지역혁신 정책포럼’ 구성을 마쳤다. 독립연구자들이 싱크탱크를 플랫폼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제안했다. 그는 “독립연구자들이 민간싱크탱크에 상주해 일하지 않아도 이를 플랫폼처럼 활용하면서 정책을 생산하는 경험을 만들면 좋겠다. 한국연구재단이 공식적으로 민간싱크탱크의 연구를 지원하는 체계를 제도화하는 것도 좋다고 본다”고 말했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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