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시리아로 돌아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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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인 1호 유학생 압둘와합, 내전으로 귀국 못 하고 한국으로 귀화

시리아 내전이 만 10년을 맞았다. ‘아랍의 봄’ 여파로 시리아 국민이 첫 전국 동시 시위를 벌인 2011년 3월 15일이 시작일이다. 그날 시리아 남부 도시 다라에선 담벼락에 정권 비판 낙서를 했다는 이유로 16명의 중학생이 붙잡혀 심한 고문을 당했다. 사흘 뒤 학생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열렸고,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4명이 죽었고, 이날부터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은 물러가라”라는 구호가 시작됐다. 비행기와 탱크를 동원한 정부의 무자비한 진압에 반발한 군인들이 ‘자유시리아군’을 조직하고 정부군과 전투를 시작한다. 반군은 부족한 자원에도 승리를 거듭하며 아사드 정권을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갔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반군을 지원했던 나라들이 지원을 끊고 수도 다마스쿠스 진입을 막았다.

사진/이석우 기자

사진/이석우 기자

시리아 내전 상황은 더 악화

2013년 8월 자유시리아군이 망설이던 사이 시리아 정부는 다마스쿠스 인근 민간인 지역인 구타를 화학무기로 공격했다. 1400여명의 희생자를 낳았지만 국제사회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정부군은 더 잔인한 방식으로 시민을 공격했다. 반군이 분열되고, 정부군을 지원한 러시아가 2015년 이후 직접 개입에 나서면서 전황은 정부군 우위로 바뀐다. 내전은 외세의 개입으로 국제 대리전 양상으로 바뀌었다. 희생은 컸다. 시리아인권관측소에 따르면 내전으로 인한 사망자는 최소 38만8652명에서 최대 59만4000명에 달한다. 약 560만명이 난민이 됐고, 670만명은 실향민이 돼 시리아 안을 떠돌고 있다.

언론의 관심은 줄었지만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크고 작은 충돌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3월 21일에도 러시아군은 전투기로 반군의 임시 정유시설을 공습했다. 같은 날 시리아 정부군은 알레포주 아타리브의 병원에 포격을 가했다. 와해된 듯싶던 무장 테러단체 ‘이슬람 국가(IS)’도 부활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국에서 이런 상황을 무섭고 힘들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시리아에서 변호사로 일하다 2009년 시리아인 1호 유학생으로 한국을 찾은 압둘와합(37)이다.

그는 시리아 내전이 터지자 시리아 난민을 돕기 위한 구호단체 ‘헬프시리아’를 한국 친구들과 함께 세웠다. 오랜 친구이자 헬프시리아 활동을 함께하는 김혜진씨가 최근 출간한 <내 친구 압둘와합을 소개합니다>는 그간의 구호 활동을 기록한 증언이자 고통받는 시리아를 도와 달라는 호소이다. 무슬림과 난민을 향한 한국사회의 편견과 차별의 시선도 돌아보게 만든다. 책의 출간을 계기로 지난 3월 24일 와합을 만나 시리아 내전과 난민 문제에 관한 생각을 들었다.

강대국이 철수해야 해법 찾을 수 있어

2021년 현재 시리아 정부군이 시리아 전역의 62%를 차지하고 있다. 터키의 지원을 받는 반군이 알레포와 이들립주를 포함한 북서부 지역, 미국의 지원을 받는 쿠르드 세력이 북동쪽을 차지하면서 시리아 내전은 교착상태에 있다. 와합은 “아직 국경선으로 인정되지 않았을 뿐 현실에선 여러 나라로 나뉜 것과 같다.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기가 위험하고, 국경을 넘어갈 때 요구하는 정도의 공문서와 허가 작업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언론에서 다루지 않아 잊어버렸을 뿐 지옥 같은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생필품 부족에 물가는 터무니없이 높아졌고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다.

주변국이 국경을 꽉 틀어막으면서 실향민들은 오가도 못 한 채 국경 근처 임시 캠프에서 열악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거의 900㎞에 이르는 시리아와 터키 국경선에는 최근 예전에 없던 드론과 카메라, 지뢰까지 설치됐다. 저격수도 배치해 국경을 넘으려는 이들을 노리고 있다. 요르단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국경을 통제해 시리아 사람이 떠날 수 있는 방향은 이라크나 혹은 레바논인데 레바논으로 가려면 정부군 통제지역을 지나가야 하고, 이라크는 시리아만큼 어려운 나라다. 와합의 가족은 다행히 2019년 가을 우여곡절 끝에 터키로 넘어와 이즈미르에 정착했다. 남동생 2명은 노르웨이에서 난민 신분으로 생활하고 있다. 고향인 락까는 IS에서 쿠르드 민병대로 손바뀜한 후 조금 안전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살기는 어렵다고 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사마에게>가 증언하듯 알아사드가 이끄는 시리아 정부는 유독 병원과 학교를 파괴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교육과 의료를 차단해 반군 지역을 도저히 살 수 없는 지역으로 만드는 것이다. 주민들은 그곳에서 죽음을 각오하거나 떠나야 한다. 정부군 입장에선 이들이 떠나는 게 좋다. 주변국을 압박하는 데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미 450만명에 이르는 시리아 난민을 받아준 터키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다. 와합은 “시리아 정부군은 난민 카드로 국제사회를 압박하고 있다”면서 “알아사드를 인정하면 전투를 멈추고 난민이 돌아올 수 있도록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시리아 사람을 너희 나라에 보내겠다는 태도”라고 말했다. 그는 “일부 유럽국가가 난민 부담을 덜려고 알아사드와의 관계를 살리려고 노력하는 걸 보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와합은 강대국이 시리아에서 철수해야만 시리아 내전을 해결할 수 있다고 봤다. 러시아가 직접 운영하는 다마스쿠스 인근 지역은 시리아 대통령도 허가를 받지 않으면 안에 들어갈 수 없다. 반군 지역이나 쿠르드 민병대 지역도 터키와 미국의 입김에 좌우되고 있다. 그는 외국 세력이 떠나야만 각 세력이 서로의 입장을 절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터키의 지원을 받는 시리아 반군이 3월 15일(현지시간) 시라아 북부 탈 아비야드(Tal Abyad)에서 시리아 내전 10주년을 맞아 혁명기를 들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AFP연합뉴스

터키의 지원을 받는 시리아 반군이 3월 15일(현지시간) 시라아 북부 탈 아비야드(Tal Abyad)에서 시리아 내전 10주년을 맞아 혁명기를 들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AFP연합뉴스

완벽한 해결책은 현재의 난맥상을 만든 국제사회가 결자해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오히려 각국이 자국 이해에 맞게 현 상황을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군을 지원하다 자신의 이해에 맞지 않자 손바닥 뒤집듯 반군을 ‘테러범’이라 칭하며 공격했던 미국을 지적했다. 그는 강대국들이 내심에서 ‘아랍의 봄’을 원치 않았다고 봤다. 민주화된 아랍보다 독재자가 지배하는 아랍이 통제하기 쉽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전화 한통화로 사우디에 무기 구매를 관철시켰는데 만약 민주화된 나라였다면 트럼프가 그렇게 함부로 했을까요. 한국 정부가 미국 요구를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국민이 들고일어나 난리가 났겠죠. 옛날처럼 국민의 눈치를 보지 않고 권력자끼리만 결정할 수 있도록, 겉으로 내세우진 않았지만 ‘아랍의 봄’이 실패하도록 모든 방법을 이용했습니다.”

민주화 운동이 내전으로 바뀔까봐 미얀마 사태도 걱정스럽게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얀마는 시리아처럼 되면 안 된다”면서 “국제 압박과 국민의 연대된 힘으로 쿠데타 세력을 물러나게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리아처럼 내전으로 변한다 해도 민주화 운동의 대의를 부정할 순 없다고 강조했다. “50년간 2~3세대가 독재를 이어가는데 혁명을 하지 않으면 스스로 물러날까요. 병이 있으면 그 병을 제거하기 위해 치료를 받아야지 치료가 잘못될까 두려워 병원을 안 가는 건 옳지 않습니다.”

유엔아동기금에 따르면 시리아 어린이 240만명이 전쟁으로 학교를 떠나야 했다. 학교의 3분의 1은 폐허가 되거나 군 기지로 이용됐다. 열 살이 넘어도 초등과정을 시작하지 못한 아이들이 많다. 헬프시리아는 그간 난민 캠프에 음식과 생필품을 보급하는 데 주력했는데 2019년부터는 학교 건립이라는 좀 더 큰 목표를 추가했다. “2019년 3월 터키에 가서 음식을 보내려고 어떤 음식을 원하는지 실향민 캠프에 물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음식보다 교육과 의료를 지원해주면 좋겠다는 것이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어렵겠다고 봤는데 터키 정부와 손이 닿는 분의 도움으로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후원금 모아 두 번째 학교 세우고 싶어”

시리아에 학교를 세우려면 국경을 오갈 수 있도록 터키 정부군의 허가가 필요하다. 터키 정부는 교육 프로그램 운영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교육과 의료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면 굳이 위험한 난민 신세를 택할 필요가 줄어든다. 시리아와 터키 정부 모두에게 득이 되는 학교 건립은 그렇게 시작됐다. 약 900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초등학교가 시리아 알레포주 소란지역에 2019년 8월 완공됐다. 학교 이름은 아랍어로 ‘읽으라’라는 뜻인 ‘이끄라’이다. 학교 건설 계약서상 6~9개월로 건축 기간을 정했는데 3개월 만에 완공됐다. 와합은 “학교를 완공해야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보다 시리아에 있는 분들이 몇배 마음이 급했다. 실향민들이 3팀으로 8시간씩 24시간 쉼없이 일했다”고 말했다. 낮에는 초등학교 입학 연령의 아이들을 위한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저녁에는 전쟁으로 공부할 때를 놓친 아이들을 위한 압축적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주말에는 장애인과 폭격 등으로 부상을 입어 매일 이동하기 어려운 학생들이 하루 동안 몰아서 수업을 받는다.

와합은 지난해 말 한국에 귀화했고, 지난달에는 주민등록증도 받았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귀화였다. 시리아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여권 갱신이 안 되면서 터키로 구호활동을 떠나기도, 한국에서 생활하기도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앞서 두차례의 여권 갱신도 쉽지 않았다. 두 삼촌이 여권 갱신을 하러 갔다가 구금돼 고문을 받은 후 풀려나기도 했다. 시리아 국적 때문에 터키공항을 오갈 땐 늘 붙들려 조사를 받아 비행기 탑승 시간이 임박해서야 풀려나기 일쑤였다. 그는 “한국 국적을 갖게 돼 그나마 다행이고 행복하지만 이런 상황 자체가 안타깝다”고 했다. 귀화가 쉽진 않았다. 한국인과의 결혼을 통한 간이귀화가 아닌 일반귀화라 절차가 더 엄격했다. 국적 취득 허가는 받았지만, 시리아 국적 포기 증명서를 받을 수 없어 막판까지 마음고생을 했다. 일본 주재 시리아대사관은 “시리아에 직접 와서 받아가라”고 했다. 결국 이런 사정을 입증할 증거와 시리아 국적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쓴 후에야 귀화 절차를 완료했다.

그는 한국사회에도 난민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존재하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무슬림과 시리아 사람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알게 되면 막연한 두려움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IS를 지칭할 때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라고 흔히 쓰지만 그들은 이슬람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무장테러단체일 뿐이고 그렇게 써야 한다고 했다. 극히 일부의 사례로 난민을 테러범이나 성범죄자로 일반화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헬프시리아 후원금은 코로나19 탓에 많이 줄었다. 예전처럼 야외에서 모금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일상을 회복하면 후원금을 모아 새 학교를 열고 싶다고 했다. 가장 바라는 것은 <내 친구 압둘와합을 소개합니다>에 나온 말처럼 다시 평화로운 시리아로 돌아가는 것이다. “집 앞 맑은 유프라테스강에 발을 담그고 꿀같이 단 수박을 먹으며 한국에서 시리아를 사랑해주는 이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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