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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의 ‘보호’ ‘치유’가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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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잇따른 학폭 폭로와 분노는 성인이 되어서도 회복 못 했기 때문

“가슴에 꽂혀 있던 칼을 뽑았고, 지금은 그 상처가 아물고 있는 것 같아요.”

중학생 시절 지속적인 따돌림을 당했던 라주연씨(22)는 학교폭력의 상처를 ‘칼’에 비유했다. 그가 고통받던 시기는 2011년 한 중학생의 극단적 선택으로 학교폭력 관련 제도가 강화된 시기였다.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현 심의위원회) 기능이 커지고, 상담지원이 활발해졌으며 학교전담경찰관이 배치됐다. 라씨에겐 이중 무엇 하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라씨가 회복 국면에 접어든 것은 역설적으로 졸업 이후부터였다. CBS <왕따였던 어른들> 출연을 계기로 다른 피해자들과 대화를 하며 ‘칼이 뽑히는’ 느낌이 들었다. 학창시절 라씨는 주동자를 신고하기는커녕 “선생님조차 내 편이 아니라고 생각해” 도움 요청도 하지 못했다. 상담은 많이 받았지만 “벽에 대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최근의 ‘학교폭력 연쇄 폭로’와 대중의 뜨거운 분노는 무엇을 뜻하는가. ‘학폭’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성인이 된 피해자가 그만큼 많다는 방증 아닐까. 학교폭력 정책은 ‘가해자 징계 처리’에만 초점이 맞춰져 진화해 왔을 뿐 피해자의 치유와 회복은 부차적으로 다뤄 왔다. 피해자의 ‘보호’, ‘치유’, ‘회복’ 측면에서 보면 현재의 학교폭력 제도는 겉돌고 있다.

말 못 하는 이유

‘구조 요청’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마련하는 것은 ‘피해자 보호’의 시작이다. 그러나 주간경향이 만난 피해자 상당수는 ‘도와달라’고 얘기할 수 없었다고 했다. 상담만 받아도 주변 친구들에게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였기 때문이다. 피해자 상당수가 전학을 선택하는데 주로 학교 친구들의 시선 때문이다. 상담 내용만큼 상담·조사에 이르는 과정의 비밀유지도 중요하지만, 현장의 세심함이 부족한 사례가 여럿 확인됐다.

현재 고3인 이현호군(가명·17)은 ‘상담실에 누군가 들어갔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을 수차례 경험했다. 상담실에 들어간 아이를 누가 괴롭히고 있는지, 아이들은 이미 안다. 피해자는 상담실에 갔다왔다는 것만으로도 곤경에 처할 수 있다. 이군은 ‘또래 상담자’로도 오랫동안 활동해 왔는데 상담자 모임에서도 ‘비밀 보장’문제가 자주 거론된다고 했다. 그는 “사소할 수 있지만, 학교 공간이 아니라 한적한 카페에서 보기로 하거나, 학교에 아무도 없을 때 상담을 받게만 해도 나아질 것 같다”고 했다. 이군은 학교폭력에 시달리는 친구들에게 ‘상담’을 많이 해주었음에도 정작 중학생 시절 자신이 괴롭힘을 당할 때는 상담실에 가지 못했다. 그는 “상담받은 사실이 결국 알려질 텐데 ‘너 피해망상 아니냐’고 말할까봐 두려웠다”고 했다.

‘선생님이 내 편이 아니라는’ 생각도 피해자를 주저앉힌다. 김하나씨(가명·21)는 학창시절 친구들이 욕설을 섞어가며 자신의 흉을 보고 있는데도 전혀 제지하지 않고 흥미롭다는 듯 듣는 선생님을 보면서 엉엉 울었다고 했다. 라주연씨도 “선생님은 모르지 않았다. 모를 리가 없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과거 라씨에겐 선생님에게 “큰 쇼크를 받은” 기억이 있다. ‘쪽팔려’ 게임(가위바위보에서 진 사람이 창피한 행동을 하는 게임)을 하던 한 남학생이 자신에게 다가와 책상을 엎어버리고는 “네가 약해서 그런 거니까 어쩔 수 없어”라고 말했다. 상황을 목격한 담임교사는 “너무 심하게 놀지 말라”고만 하고 넘어갔다. “선생님만은 내 편인 줄 알았던” 라씨에겐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자신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가해자 잘못을 지적하지 않는 선생님에게 ‘도와달라’는 요청을 하기란 쉽지 않다. 따돌림 피해 사실을 듣고 가해자를 불러 “사이좋게 잘 지내” 식으로 마무리하는 선생님도 여전히 있다. 피해자에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방식이다.

물론 모든 선생님이 피해자들을 ‘방관’하는 것은 아니고, 방관자가 돼 버린 선생님들조차 할 말은 있다. 최근의 학교폭력 제도는 학폭위의 처분 중심으로 꽉 짜인 측면이 있다. 2020년부터는 학폭위가 학교에서 교육청 소관(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으로 넘어갔다. 일선 교사들은 “제도 안에 교사들의 재량을 발휘해 개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서울 강남 등 일부 지역에선 변호사가 학교폭력에 개입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교사의 운신 폭이 더 좁아졌다고 한다.

가해자 ‘처벌’만으로 치유가 될까

학폭위의 처분을 이행했다는 이유로 당당한 가해자들의 모습도 피해자들의 입을 닫게 만든다. 학폭위 처분은 1~9호로 나뉘는데 그중 교내외 봉사활동(3·4호)은 ‘해치우면 그만’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다. 정승훈 푸른나무재단 상담사는 “학교폭력과는 전혀 동떨어진 쇼핑백 접기 같은 봉사활동이 대부분이다. 봉사활동을 통해 반성과 뉘우침을 이끌어내야 하는데 현재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정 상담사는 ‘학폭위 처분’으로 잘못을 깨닫게 해야 한다면서 1970년대 캐나다의 사례를 소개했다. 10대 아이들이 한 마을의 집과 울타리를 훼손하자 마을의 자치위원회에서 아이들에게 내린 처분은 집수리비를 본인 용돈에서 내 보상하기, 부서진 울타리 함께 고치기 등이었다. 처분을 이행하면서 학생들이 반성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정 상담사는 “가해학생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처분을 내려야지, 지금처럼 처벌을 위한 처벌에 그치면 피해자의 회복과 치유도 더뎌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 3월 2일 열린 한 초등학교의 입학식 / 연합뉴스

지난 3월 2일 열린 한 초등학교의 입학식 / 연합뉴스

가해자에 대한 학폭위 처분이 ‘반성’의 과정으로 이어지지 않기에 ‘회복적 생활교육’ 운동을 펼치는 교사들도 있다. 김윤희씨(가명·21)는 동급생에게 페이스북 메신저로 심한 욕설을 했다가 학폭위에서 ‘서면 사과’ 처분을 받았다. 그는 “저도 그 아이로부터 과거에 큰 상처를 입었었기 때문에 솔직히 사과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내가 오히려 피해자라는 생각에 사과문도 형식적으로 썼다”고 했다. 김씨는 선생님의 소개로 ‘회복적 생활교육’을 경험했다. 각자 선생님과 대화를 두차례 나누고, 마지막 두번은 선생님을 포함해 3자가 모였다. 상대와 1:1 대화는 하지 않았다. 번갈아가면서 선생님에게 얘기하고, 서로 듣는 방식이었다. 그는 “상대의 얘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누그러지고, 감정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미안하다는 생각도 커졌다”고 했다.

다만 ‘회복적 생활교육’ 운동이 모든 사례의 해답이 될 수는 없다. 학교폭력은 사건의 형태와 구도가 천차만별이라 치유방법 역시 사안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 또래 상담사로 활동하는 이군은 “회복적 교육 모임에선 피해자가 상대를 용서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치유기관 부실 논란

가해자의 뉘우침과 진심어린 사과가 치유와 회복의 ‘출발점’이지만, 이런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피해자는 어떻게 보호돼야 할까. 교육부는 현재 학교폭력 피해자 치유 전담기관을 139개소(2020년 기준)를 운영하지만 ‘학교폭력 피해’에 특화되지 않은 심리상담 기관이 대부분이다. 라씨는 “중·고교 때 (학교의 소개로) 정말 많은 상담을 받았는데, 결론은 늘 ‘무시하라’였다. 무시할 수 있었다면 상담받으러 가지도 않았을 텐데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면서 “대처방법 같은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했는데 그런 얘기도 별로 듣지 못했다”고 했다.

학교폭력 피해자 치유기관의 ‘부실’은 정부의 ‘숫자 늘리기’ 행정에서도 드러난다. 애초 2014년 30여곳에 불과했던 치유기관은 5년 만에 약 5배 뛰었다. 심리상담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학교폭력 피해 치유기관’으로 위탁·지정한 결과다.

오랜 시간 괴롭힘에 시달린 피해자들은 ‘안전한 교실’을 필요로 한다. ‘해맑음센터’는 기숙 대안학교 유형의 ‘학교폭력 피해 치유기관’이다. 아이들은 이곳에 장기간 머물며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다. 정규학교 출석으로 인정되는 ‘대안학교’ 유형의 치유기관은 현재 전국에서 해맑음센터 1곳뿐이다.

그나마 주간 보호형 치유기관이 최근 서울·광주·대구에 3곳 더 생겨났다. 그중 대구의 한 기관은 기존 중학교의 ‘별관’에 설치하기로 해 논란이 일었다. 대구 지역의 한 고등학교 교사는 “요즘은 SNS가 많이 발달했는데, 학교 별관에 드나드는 피해 아이들을 그 중학교 아이들이 사진을 찍어 공유할 수도 있다. 낙인찍기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대구교육청은 “마주치는 일이 없게끔 동선이 분리 돼 있다”고 설명했다.

성인 위한 치유과정 필요

최근 학폭 폭로가 잇따르면서 ‘과거 학폭’ 상담이 크게 늘고 있다. 푸른나무재단 측은 “개학 직전엔 대부분의 상담이 과거 학폭에 관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 사이에선 성인을 위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푸른나무재단은 지난 3일 낸 성명에서 “우리는 지금 ‘학폭 트라우마 어게인’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면서 학교폭력으로 멍든 피해자들이 치유받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을 견뎌왔음을 지적했다. 푸른나무재단은 그러면서 “기존 재학생 중심의 ‘화해클리닉’을 성인까지 확대해 학폭 재연 상황(트라우마로 인해 과거 학폭이 계속 연상되는 현상)에도 기능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김원진·송윤경 기자 one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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