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가장 다양한 만화를 내는 작가라는 게 내 자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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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을 정도로 ‘이현세’ 이름 석 자만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비록 이제 전성기는 지나 보냈다고 해도 그 이름값은 여전하다. 매번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새롭게 접근하는 태도는 물론, 최고의 자리에 오랜 기간 있어 봤기에 나올 수 있는 그만의 날카로운 시각도 바뀌지 않았다. 다만 바뀐 것이 있다면 만화계 최고 주당으로 불리다가 위암 투병을 마친 뒤로 절제하며 술로 목을 축이는 정도라는 이현세 작가(67)를 3월 3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 있는 그의 화실에서 만났다.

사진 / 이석우 기자

사진 / 이석우 기자

-작가로 데뷔한 지 43년째를 맞았던데 지금도 작품을 연재하고 있나.

“지난 1월 말에 <바스락>이란 작품을 완결했다. 성남문화재단에서 공익 차원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조명하는 웹툰을 요청하길래 그중에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김하락 장군의 이야기를 그렸다. (작품을 보여주며) 이전 작품들과는 그림체가 또 다르지 않나? 내용도 무거운 독립운동 이야기 대신 아버지와 딸 사이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

-공언한 대로 매번 그림에 변화를 준다는 원칙 때문에 이번에도 그림체를 바꾼 것인가.

“그렇다. 기본적인 드로잉 기법과 미적 기준을 바꾸진 않는다. <공포의 외인구단>의 ‘까치’ 캐릭터가 너무나 강하게 각인되다 보니 작품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하려 해도 그림체를 바꾸지 않으면 독자들이 변화를 실감할 수 없겠더라. 그래서 펜선을 바꾸든 눈빛을 바꾸든 명암 주는 법을 바꾸든 약간씩 변형시켜온 것이다. 문하생들에게도 바뀐 그림체에 맞춰 작업하라고 했고.”

-게다가 속편을 내지 않는다는 원칙도 지켜왔다. 그럼 신작 내기가 힘들지 않나.

“힘들지. 작가마다 자신이 어떤 작가가 돼야겠다고 생각하는 때가 온다. 어떤 작가는 데뷔 전부터, 또 어떤 작가는 대표작 히트친 다음에…. 나는 데뷔 3년 만에 <외인구단>으로 큰 성공을 해버려 생각지도 않게 이름을 얻다 보니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 또 그 시절이 만화가 음지에서 양지로 발돋움하던 때라 의도치 않게 내가 조명도 많이 받았거든. 내가 딱히 더 천재적이지도 않고 더 생각이 깊지도 않은데, 그럼에도 롱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을 많이 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이 작가는 다음 책을 보기 전까지는 예상을 못 할 정도로 다양한 이야기를 하는 작가구나’라고 생각할 만큼 다양한 소재와 영역을 건드리는 쪽으로 정했다.”

-그 말대로 참신한 소재나 스토리로 승부하는 작품들이 반향을 얻었지만, 또 유명세 때문인지 비판도 적지 않았는데.

“맞다. 이것저것 건드리고 내가 관심이 가면 충동적으로 곧바로 시작하다 보니 옥에 티가 가장 많은 작가가 됐다. <남벌> 같은 전쟁만화부터 사극에 멜로에 미래를 다룬 SF까지 하다 보니 한 장르를 쭉 해온 사람만큼 특화돼 있지 않았다. 의욕과 호기심은 넘쳐 자료도 모으고 했지만 고증이나 디자인 오류가 많았다.”

-보통은 누구든 잘못된 점을 거론하면 변명부터 하는데 쿨하게 오류를 인정하는 모습이 색다르다.

“대신에 나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초기에 작품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라인업을 잘 해놓은 덕분에 어떤 작품을 내놔도 독자들이 캐릭터를 쉽게 이해하게 된 것이다. 작품마다 새로운 소재를 써서 그려도 까치, 엄지, 마동탁, 백두산 같은 캐릭터 각자의 특성은 독자들이 아는 그대로 유지되니까. <외인구단>부터 초기 틀이 잡힌 캐릭터들이 <국경의 갈가마귀> 그릴 때 입체적으로 완성됐다. 전체 15명의 라인업을 갖춘 이들 ‘만화배우’들 덕분에 스토리를 협업해 구상하는 사람도 편해졌다. 오랜 시간 서로 의논하지 않아도 캐릭터들은 그대로 쓰면 되니까. 정형화된 캐릭터는 반대로 복선을 깔고 마지막에 반전을 주는 재미도 있고.”

-그래도 새로운 작품마다 부담은 컸을 것 같다.

“나도 캐릭터들을 유지하는 데서 탈출하고 싶어서 <며느리 밥풀꽃에 대한 보고서>는 전혀 다르게 그려봤는데 반응이 ‘이현세 아류’라며 안 좋게 나왔다. <천국의 신화>도 까치나 엄지 같은 기본 캐릭터 쓰기 싫어서 고대 조선으로 가본 시도였다. 아, 그래서 그렇게 애를 먹었나(웃음).”

-처음 만화를 시작한 계기는 그림에 관심이 많아서였나.

“회화에 대한 관심은 화가가 되고 싶어한 내 동생 이상세가 많았다. 냉정하게 얘기해 초기 작품의 그림체도 동생과 같이 만든 것이었다. 동생은 회화를 전공하고 싶어했는데 그러려면 생활비가 필요하니 돈을 벌려고 만화를 했다. 나는 아예 처음부터 만화로 진로를 굳혔었다. 남들 대학 갈 때 당시엔 보는 것조차 금기시하던 만화를 직업으로 삼는 게 멀쩡한 생각은 아니었다. 색약으로 미대에는 진학을 못 한다는 걸 알고 나선 ‘그럼 흑백 만화를 그리라는 운명인가 보다’ 하면서 만화를 시작한 거지.”

이현세 만화가가 ‘까치’ 캐릭터를 그리고 있다. / 이석우 기자

이현세 만화가가 ‘까치’ 캐릭터를 그리고 있다. / 이석우 기자

-대학에도 오랫동안 적을 두고 있는데 요즘 학생들과 당시의 만화가 지망생 사이에 차이가 보이나.

“요즘 대학에 들어오는 애들은 기본적으로 밝다. 반대로 옛날 문하생들은 어둡고 가난하고, 선택할 게 없어 만화를 그리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화실 밖에 나와서도 만화 그린다고 당당하지 밝히지 못하고 자부심은 없는 어두운 사람들이었다. 나도 그랬다. 지금 학생들은 수능 등급도 높고 부모들도 같이 밤새우면서 입시 준비할 정도로 지원을 많이 받는 환경에서 시작한다. 당돌하고 밝은 점이 많지.”

-좋은 환경에서 지원을 받으니 ‘온실 속 화초’ 같은 면은 없나.

“대학에 오면 벽을 만나게 된다. 자기가 동네나 고등학교에서는 만화 천재였는데 대학 만화학과 들어오면 감당불가에 도저히 경쟁조차 안 되는 천재가 한두명 있다. 그래서 이렇게 가르친다. 우사인 볼트랑 단거리 대결로 이길 수 없어도 작가 생활은 장거리 경주와 비슷하니까 긴긴 인생을 보고 포기하지 말고 한걸음씩 걸어가라고 한다. ‘그러려면 네가 누구인지부터 알라’고 강조하는 거다. 만화 기획·편집 등 여러가지 갈 길이 있으니 자신이 누구이고 어느 분야에 뛰어난지 알아내 졸업하라고 가르치지.”

-만화산업이 발전하고 시장이 커지다 보니 전문성을 살리기 좋은 시대가 됐다.

“지금은 명함에 출판사가 아니라 웹툰 제작사 이름을 넣는다. 이제 만화도 영화처럼 컬러나 콘티 등 각각의 분야에서 전문적인 스태프를 필요로 하니까. 반면에 천재가 혼자 서기는 더 어려워졌다. 웹툰이 글로벌 서비스를 하면서 ‘마블’처럼 각 분야 사람들의 협업체제로 바뀌고 있다. 이런 시대에 천재적인 만화가 혼자 다 하려고 하면 어디에서 벽을 만나냐, 당장 마감부터가 벽이다. 1주에 최소 한번은 70~80컷 정도 분량을 연재해줘야 하는데 혼자서는 밀도와 퀄리티를 맞출 수 없다.”

-그런 어려운 일을 예전 작가들은 해오지 않았나.

“나는 평생을 그렇게 콘티 짜고 데생 그리는 작업을 해왔고 더욱이 팀이 있으니 할 수 있었다. 그때는 만화가 밥벌이면서 놀이면서 삶이었는데 지금 환경에선 그렇게 할 수 없다. 삶을 오로지 책상 위에서만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작가들의 시대 아닌가. 오히려 그래서 코로나 시대가 와도 책상에 붙어서 일만 할 수 있는 나 같은 노인은 노인대로의 경쟁력이 있는 셈이다(웃음).”

-얼마 전 하던 연재도 끝났으니 신작을 구상 중인가.

“고민하고 있다. 시장이 원하는 만화와 내가 재미있는 만화 사이에서. 네이버는 10대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만화를, 다음카카오는 20~30대 독자들이 좋아하는 만화를 선호하는데 그게 시장이 원하는 이야기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60대 남자 이야기를 실컷 해줄 수는 있지만 무르팍 아픈 이야기를 누가 봐주나. 그래도 시장에 맞추려니까 고통스럽고 맞지 않다는 걸 깨달아 내 얘기를 정직하게 하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이야기인지 궁금하다.

“황혼을 걸어가는 늙은 무사 이야기다. <국경의 갈가마귀> 같은 대륙물이라고 할까. 1800년대 후반 북간도와 연해주 일대를 배경으로. 찾아보니까 만화는 물론 영화에서도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건 별로 없더라. 내 할아버지·할머니 고향이 중국 흑룡강성 그 인근이기도 해서 그런지 그 시대를 생각하면 이국적이기도 하면서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그리운 감정이 있다.”

-무사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무협만화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문정후 작가를 잠시 문하생으로 두지 않았나.

“정후를 선생과 제자로 만났지만, 무협만화를 정후보다 잘 표현할 수 있는 작가는 한국에 없다. 나는 무협보다는 좀더 사실적으로 가려는 거고. 원래 부산 박봉성 작가 화실에서 시작해서 우리 화실에서는 잠시 작업하고 <용비불패>로 일찍 독립했지. 이두호 선생이 바지저고리 만화만 그린 것처럼 정후는 무협만 그렸으니 누가 넘볼 수 있나.”

-만화계 원로가 된 입장에서 특별히 한마디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전까지 숙원이라 생각했던 게 이제는 이뤄져 특별히 더할 말은 없다. 내가 전에 줄곧 주장해온 건 한국 만화시장에는 자본이 들어와 보따리 장사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는 얘기였다. 마블처럼 세계시장을 개척하지 않으면 계속 구멍가게로 남으니까 자본을 끌어들여 다른 대중매체와도 경쟁하고 정부와도 대등하게 협상할 수 있는 힘을 갖추자는 거다. 물론 자본이 들어오면 작가는 더더욱 을이 되고 만다는 입장도 있지만 내가 ‘대본소’ 시대에서 서점 시대로 바뀔 당시 손해 보면서도 앞장서 보니까 개인이 끌고 가기엔 한계가 있다는 걸 절감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산업지상주의가 돼야 하나 하면 그건 또 문제가 있다. 지금 정부의 만화산업 진흥책이라고 나오는 내용을 봐도 ‘산업’만 있고 ‘예술’은 없지 않나. 시장이 커지면서 누구든 돈벌이 수단으로만 접근하고 있는데 하나의 예술로서 만화의 가치를 지원해야 하는 게 무엇보다 정부의 역할이다. 배고픈 예술가, 가난한 창작자들도 살아남을 수 있어야 산업 생태계가 더 오래 유지되는 법이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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