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형 정신’ 본질 놓쳐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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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환 교수, 자신을 바쳐 이웃에 베푼 선생의 뜻 강조

지난 1월 광복회가 ‘독립운동가 최재형상’을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에 수여하자 ‘최재형 기념사업회’가 반발하는 소동이 있었다. 광복회가 내세운 선정 사유는 추 전 장관이 친일재산(3000억원 상당의 땅)의 국가귀속을 이뤄냈다는 점이었다. 별도로 ‘최재형상’을 운영 중인 기념사업회는 “자의로 상을 제정해 남발하는 것은 선생의 정신을 모독하는 것”이라며 기자회견을 했다. 기념사업회는 재발방지를 요구했지만, 광복회는 최재형상 사업을 계속한다는 방침이다.

1990년대에 최초로 최재형 선생 기록 등을 발굴해 세상에 알린 박환 수원대 교수(62)가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1990년대에 최초로 최재형 선생 기록 등을 발굴해 세상에 알린 박환 수원대 교수(62)가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약 한달간 이어진 ‘최재형상’ 갈등을 한없이 씁쓸한 마음으로 지켜본 역사학자가 있다.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62)다. 박 교수는 역사학자들조차 최재형 선생이 누구인지도 몰랐던 1990년대에 구소련을 누비며 선생의 흔적과 기록을 발굴했다. 각지에 흩어진 후손도 찾아다녔다. 어떻게 하면 최재형 선생을 대중에게 알릴 수 있을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난해 최재형 선생 100주기 추모식에 대통령 조화가 올 정도로 선생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노학자가 된 박 교수의 마음은 편치 않다. 때때로 선생에 대한 과장된 서사가 공유되고 있는데다 최근엔 ‘최재형상’ 남발 논란까지 불거졌다. 지난 2월 22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난 박 교수는 “최재형 선생의 이름을 딴 상이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가슴이 답답했다”면서도 “(두 단체 중) 누가 옳은지 그른지를 논하기보다는 기본으로 돌아가 선생을 제대로 기억하려는 노력부터 기울이자는 말을 하고 싶다”고 했다.

-최재형 선생을 처음 연구한 것으로 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리는 최재형 선생에 대해 전혀 몰랐다. 1990년 한러수교로 러시아 방문이 가능해졌을 때, 고합그룹 장치혁 회장이 ‘최재형 선생 기록을 발굴해 역사에 남겨달라’는 부탁을 했다. 장 회장의 아버지는 장도빈이라는 독립운동가였는데, 평소 최재형 선생 말씀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또 독립운동가 정재면의 아들 정대위 신학 박사(전 건국대 총장) 역시 최재형 선생 연구의 필요성을 자주 얘기해 왔다고 했다. 당시 나는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상태였는데, 그렇지 않아도 러시아 연구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992년부터 러시아 극동문서보관소를 뒤지고 그의 후손들을 찾아다녔다.”

-최재형 선생의 일대기는 여느 독립운동가와 다른 면이 있다. 자수성가한 ‘고려인’이다.

“선생의 신분과 출신 지역은 상징적 의미가 있다. 기층민인 노비의 자식이었고, 조선의 변방인 함경북도 출신이다. 그의 가족은 구한말에 혹사를 당하다 연해주로 건너갔다. 조선인 최초로 러시아 학교에 다닌 선생은 7~8년간 러시아 상선을 타면서 러시아어에 능통하게 됐다. 상인이 된 후엔 ‘의화단 사건(청나라 말기의 외세배척운동)’과 러일전쟁으로 전쟁특수를 누렸다. 러시아 군영에 피복과 먹거리 같은 것을 납품하며 큰돈을 벌었다. 러시아로부터 얀치헤(연추) 한인마을의 도헌(행정책임자)으로도 임명됐고, 니콜라이 2세 즉위식에도 참석했다.”

-지금으로 치면 러시아로 귀화해 성공한 인물이다. 그런데 왜 조국의 독립에 투신했을까.

“그는 한마디로 조선이 버린 사람이었다. 조국은 그에게 준 것이 없었는데 그는 왜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는가. 나도 풀지 못한 궁금증이다. 다만 러일전쟁을 계기로 전쟁터로 변해버린 한반도를 보면서 자신의 뿌리를 자각하게 되지 않았나 추측한다. 특히 러시아군과 함께 싸운 이범윤 선생(대한제국이 파견한 간도관리사)과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두 사람은 나중에 ‘동의회’라는 의병조직을 결성한다. 최 선생의 ‘각성’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는 또 다른 인물은 박영효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은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박영효의 요청을 받고 일본에 갔다가 반년간 머물렀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만남의 성격을 밝힐 만한 기록은 아직 찾지 못했다. 본격적인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1910년대에 찍은 최재형 선생의 사진. 최재형 선생이 세운 정시아정교 학교. 맨 뒷줄 왼쪽에서 여섯 번째가 최재형 선생이다. 최재형 선생이 활동했던 연추의 거리. 1918년에 찍은 사진이다. (사진 위부터)

1910년대에 찍은 최재형 선생의 사진. 최재형 선생이 세운 정시아정교 학교. 맨 뒷줄 왼쪽에서 여섯 번째가 최재형 선생이다. 최재형 선생이 활동했던 연추의 거리. 1918년에 찍은 사진이다. (사진 위부터)

-최재형 선생은 안중근을 지원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후원자 중 한명이었다. 동의회 구성원이었던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 방문을 ‘기회’로 생각했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 계획과 실행 과정 곳곳에 최재형 선생과 연관된 조직이 확인된다. 암살 모의 장소인 대동공보사의 사장이 최재형 선생이었다. ‘단지동맹’을 결성한 곳이 ‘최재형 선생의 창고’였다는 회고담이 있다. 선생 큰딸의 회고록을 보면 어린 시절 자신의 집에서 사격연습을 하는 안중근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선생은 안중근뿐 아니라 연해주 독립운동가를 두루 후원한 ‘대부’였다. 동의회뿐 아니라 권업회라는 항일조직을 만들어 재정을 지원했다. 선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된 것은 이러한 업적 때문이다.”

-최재형 선생이 직접 안중근 의사에게 총을 건넸다는 얘기도 들었다.

“사실이 아니다. 내가 과거에 최재형 선생과 안중근 의사의 인연을 부각시켰다. 20여년 전에는 사람들이 그를 모르는 것이 애가 탔다. 지금은 널리 알려져 기쁘지만 때때로 과장된 얘기도 돌아 마음이 무겁다. 그래서 기록에 기반을 둔 연구서 <페치카 최재형>(2018년, 선인)을 다시 냈다.”

-최근 ‘최재형상’을 놓고 광복회와 기념사업회 간 갈등이 있었다. 어떻게 지켜봤나.

“‘최재형상’ 수여는 선생의 정신을 올바로 기억하고 계승하는 과정이어야 의미가 있다. 선생의 이름을 딴 상이 웃음거리나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가슴이 답답했다. ‘최재형 정신’의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된다.”

-‘최재형 정신’의 본질은 무엇인가.

“최재형 선생은 연해주 항일운동의 대부이기도 하지만 한없이 베푸는 삶을 산 재외동포다. ‘페치카(난로)’라는 별칭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자신을 바쳐 이웃을 위한 ‘난로’로 살다 떠났다. 특히 후세대가 열심히 배워 일본을 극복하기를 바란 교육자이기도 했다. 누구보다 많은 학교를 세운 이유다. 이번 논란을 계기로 최재형 선생이 남긴 뜻을 제대로 기억하려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 아울러 선생을 기리고자 한다면, 고려인과 조선족에 대한 시선도 더 따뜻해져야 한다. ‘상’으로 누구 한 사람에게 영광을 선사하기보다는 최재형 선생을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는 거울로 삼는 노력이 있었으면 좋겠다.”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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