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나라’ 미얀마의 잠 못 이루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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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한복판에 장갑차가 포진했다. 군경은 평화시위를 벌이는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눴다. 한밤중 도시의 인터넷은 차단되고 사람들은 기습 체포됐다. 서로를 지키기 위해 잠 못 이루는 밤이 이어지고 있는 곳. 세계 여행자들에게 ‘황금의 나라’로 불리던 미얀마가 쿠데타로 빛을 잃어가고 있다.

미얀마 양곤 도심에서 2월 17일 군부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의 사진과 ‘우리의 지도자를 석방하라’라는 손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양곤|EPA연합뉴스

미얀마 양곤 도심에서 2월 17일 군부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의 사진과 ‘우리의 지도자를 석방하라’라는 손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양곤|EPA연합뉴스

미얀마가 민주화 시대 이전으로 회귀했다. 1962년부터 억압적인 군사정권의 지배를 받은 미얀마는 2015년 자유 선거가 실시됐고, 이듬해에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이 이끄는 민주정부가 들어섰다. 하지만 지난 2월 1일 군부쿠데타로 전복됐다. 수지 고문과 윈 민 대통령은 구금됐고, 쿠데타에 불복종하는 시민들은 한밤중에 기습 체포되고 있다. 군부는 민주정권 이후 법원 허가 없이 시민을 체포하거나 압수수색할 수 없도록 한 법령의 효력을 중단했다.

미얀마에서 벌어지는 일

군부의 대응수위는 점차 높아지고 있다. 지난 2월 15일엔 미얀마 최대 도시이자 시위 중심지인 양곤에 장갑차들이 밀고 들어왔다. 쿠데타 이후 수도 네피도 도심에는 장갑차와 군병력이 포진해 있었지만, 양곤 시내에 장갑차가 등장한 것은 처음이다. 시민들은 시내 중심가를 가로지르는 장갑차를 향해 쿠데타 불복종 운동으로 상징되는 ‘냄비 두드리기’를 하며 소리를 지르고 항의했다. 유혈사태 우려가 커지자 미얀마 주재 미국대사관은 자국민에 자택 대기를 촉구했다.

한밤중엔 인터넷이 차단되고, 시민들이 기습 체포됐다. AFP통신은 군부가 심야에 쿠데타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기습 체포하면서 이를 숨기기 위해 인터넷을 차단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시민들의 의견을 전했다. 양곤 시민 윈 툰은 AFP에 “군부가 한밤중에 나쁜 짓을 하려고 인터넷을 끊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잠을 자지 않고 군경이 하는 짓을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미얀마 만달레이에서 2월 15일 트레이닝복을 입은 ‘사복 군인’이 고무탄 총으로 추정되는 장총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 만달레이|AFP연합뉴스

미얀마 만달레이에서 2월 15일 트레이닝복을 입은 ‘사복 군인’이 고무탄 총으로 추정되는 장총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 만달레이|AFP연합뉴스

미얀마 제2도시 만달레이에서는 군경이 시민을 향해 새총·고무총을 발포하고 곤봉 구타를 자행했다. 이 모습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미얀마에서 벌어지는 일(#WhatIsHappeningInMyanmar)’라는 해시태그(#)를 통해 세계에 퍼지고 있다. SNS에는 지난 2월 15일 만달레이에서 1000여명의 시위대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군경이 폭력을 행사하는 사진과 동영상이 다수 올라왔다. 시위대를 향해 새총을 쏘는 군인부터 트레이닝복을 걸쳐 입은 ‘사복 군인’이 고무탄 총으로 추정되는 장총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도 보인다. “시위와 무관한 민가에도 고무총을 발포했다”, “군인들이 비무장 평화 시위대를 노예처럼 대했다”, “사복 차림의 군인이 궁지에 몰린 시위대와 여성을 향해 발포했다” 등의 글도 올라왔다. 군이 실탄을 사용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SNS에는 시민들이 다리와 이마 등에 고무탄이나 새총을 맞고 피 흘리는 사진들도 게재됐다.

군경의 강경대응에도 시위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미얀마 제2도시 만달레이에서 군경이 고무총과 새총을 발포해 부상자가 속출했지만, 16일 날이 밝자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수도 네피도에서는 시민들이 수지 국가고문의 사진을 들고 나와 그의 석방을 요구했다.

아웅산 수지 딜레마

하지만 수지 국가고문이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켜낼 중심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의문이 제기된다. 가디언은 지난 1일 “민주주의 아이콘에서 군부와 거래를 하는 정치인으로 변신을 꾀한 수지 고문의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고 평했다. 2017년 벌어진 미얀마 군경의 로힝야족 대량학살을 옹호하고 군 장성들의 편에 섰던 수지 고문이 결국 민주주의를 지키지도, 무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미얀마 양곤 도심에서 2월 16일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민이 ‘우리는 절대 잠들지 않는다. 잠은 약자를 위한 것이다’라는 팻말을 목에 걸고 바닥에 누워 있다. 군부가 시민들을 야간에 기습 체포하자 시민들은 야간 순찰대를 조직해 이를 감시하고 있다. / 양곤|로이터연합뉴스

미얀마 양곤 도심에서 2월 16일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민이 ‘우리는 절대 잠들지 않는다. 잠은 약자를 위한 것이다’라는 팻말을 목에 걸고 바닥에 누워 있다. 군부가 시민들을 야간에 기습 체포하자 시민들은 야간 순찰대를 조직해 이를 감시하고 있다. / 양곤|로이터연합뉴스

수지 고문은 미얀마 독립영웅인 아웅산 장군의 딸로, 2015년 문민정부 탄생의 주역이기도 하다. 두 살 때 아버지가 암살된 뒤 인도와 영국에서 성장했지만 1988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귀국한 뒤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군사정부는 수지 고문이 정권의 위협으로 떠오르자 1989년부터 15년간 가택에 연금했고, 이후에도 구금과 석방을 반복하며 수지 고문을 압박했다. 하지만 그는 1991년 민주화 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2015년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수지 고문은 외국 국적의 배우자를 가진 사람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헌법 조항 때문에 대통령에 오르지 못하고 ‘국가고문(국가 자문역)’이라는 자리를 만들어 미얀마 최고 지도자가 됐다.

이후 수지 고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53년간 이어진 군사정권을 끝냈지만, 군부의 그림자는 거두지 못했다. 국가고문에 오른 뒤에는 군 수뇌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수지 고문이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 또한 고위 군 장교들과 종종 손을 잡았다. 수지 고문은 자신을 가뒀던 고위급 군 인사와 자주 식사를 하며 친분을 유지했다. 수지 고문의 이런 행보는 군부와 국민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의도로 해석되기도 했다. 하지만 쿠데타를 일으킨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과는 최근 1년간 긴장 관계에 있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국제사회 호소하는 미얀마 국민

국제사회는 점차 수지 고문에 대해 신뢰를 잃어갔다. 2017년 미얀마군이 이슬람계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을 대량학살하자 수지 고문이 이를 옹호하면서다. 노벨평화상 철회 요구가 빗발쳤고, 미얀마 정부는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ICJ)에 피소됐다. 2019년 재판 당시 수지 고문은 “인종청소 보도는 가짜뉴스”라며 “극단주의 세력의 위협을 막기 위한 정당한 조처였다”면서 군경을 변호했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의 필 로버트슨 국장은 “수지 고문은 국제사회 비판에 ‘자신은 인권운동가가 아니라 정치인’이라고 주장했지만 슬프게도 두 역할 모두 해내지 못했다”라고 지적했다. 미얀마인들은 국제사회에 도움을 호소하고 있지만, 미국 등 세계 각국이 제재를 가해도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중국, 필리핀, 캄보디아 등 주변국들은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미국이 미얀마 경제 제재에 나서도 인도, 중국, 태국 등 주변국과의 무역에 의존하는 미얀마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가디언은 지적했다.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의 바수키 샤수트리 연구원은 “국제사회가 나서서 미얀마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도덕적 검증에 실패한 수지 고문은 계속 한계에 봉착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윤정 국제부 기자 y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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