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동-북한산 아래 재개발 아파트·달동네 공존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북악 능선의 북쪽 사면을 따라 흘러내린 곳에 정릉이 있다. 정릉은 조선을 연 태조 이성계의 둘째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본디 지금의 덕수궁 주변에 있었다고 하는데 태조가 죽자 태종은 능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정릉 울타리를 둘러싸고 오래된 집들이 골목을 이룬다.

조선 태조의 둘째 왕비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을 중심으로 골목이 이어진다.

조선 태조의 둘째 왕비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을 중심으로 골목이 이어진다.

정릉은 북악산길을 따라가다가 교수단지 마을을 지나는 샛길로 내려오던가, 아리랑고갯길에서 갈라져 들어갈 수 있다. 정릉으로 가는 골목은 아리랑시장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과거의 영화는 어떠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동네 식당들이 이어진 흔한 식당 골목이다. 골목은 꽤 넓고 인근 아파트 주민들의 통로가 되고 있으나 팬더믹 사태로 풀 죽은 모습이 역력했다.

북악의 완만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비탈길을 거슬러 오르면 정릉 출입문이 보인다. 정릉을 둘러보려면 입장료 1000원을 내야 한다. 그래도 제법 많은 이들이 느린 걸음으로 능 유람을 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직후 피란민들 몰려들어

정릉은 동네 가운데 있어 평일에도 유람객들이 많이 찾는다.

정릉은 동네 가운데 있어 평일에도 유람객들이 많이 찾는다.

정릉과 잇대어 교수단지라는 이름의 주택가 골목이 이어진다. 정릉의 묘역이던 곳이 1965년부터 민간에 매각되기 시작했고, 이곳을 서울대학교 교직원들이 주택단지를 만들어 교수단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예나 지금이나 땅과 집을 둘러싼 다툼은 여전해 몰래 땅을 팔아넘겼다는 송사가 붙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지금처럼 주택가의 꼴을 갖추었다. 골목 안 집들은 잘 지은 양옥들이나 벌써 반세기 정도 세월이 지나 낡은 모습으로 쇠락은 피할 수 없었다. 골목은 좁고 오가는 이들의 걸음은 느리다.

정릉을 에워싸고 있는 서울 정릉동은 넓은 지역이다. 북악 능선과 북한산 능선이 만나는 정릉천을 건너서도 골목길이 펼쳐져 있다. 일제강점기 돈암동의 근대한옥단지 개발로 주택가가 정릉 부근까지 밀려왔지만, 산자락 대부분은 남아 있다. 정릉 골짜기 일대가 지금처럼 주택가로 들어선 것은 한국전쟁 직후. 정릉 토박이 노인은 “자고 나면 피란민들, 특히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 골짜기 골짜기에 판잣집을 지었다. 아주 새까맣게 몰려들었다”고 말한다.

비탈 사이로 질서 없이 골목길이 생기고 집들이 들어섰다. 비교적 최근에는 산을 끼고 있는 입지와 상대적으로 저렴한 땅값에 힘입어 정릉동 일대 곳곳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자고 나면 재개발이 시작됐고, 해가 지나면 높게 아파트가 올라갔다. 그래도 능선 자락 곳곳에는 여전히 낡은 블록집들이 버티고 있다. 비탈 계단을 오르던 노인은 “잊을 만하면 재개발하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조합도 만들고 서명도 받고 다닌다. 그런데 사정이 좀 복잡하다. 국유지에 무허가로 앉아 있는 집들도 많고 건축 규제로 걸린 땅도 많아 더 이상 재개발은 힘들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도 큰돈의 유혹에 사람들은 무모함을 멈추지 않는다.

정릉 능역 일부를 불하받아 만든 교수단지가 있다.

정릉 능역 일부를 불하받아 만든 교수단지가 있다.

정릉에서 내부순환로가 지나는 정릉로를 건너면 북한산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 정릉동의 오래된 골목이 있다. 산으로 뻗은 외길이라 길 끝에 시내버스 종점이 2곳이나 있는 외진 곳이었지만 삼양동으로 가는 터널이 뚫리면서 길음동과 미아동 일대의 아파트단지로 길이 이어지자 늘 차가 밀리는 번잡한 곳이 됐다.

마을이 자리 잡고 앉은 곳이 온통 능선과 구릉으로 주름진 곳이라 대부분의 골목은 가파르고 길들은 구부러졌다. 정릉우체국 근처가 시장통이라 붐볐으나 지금은 청수장으로 이어지는 큰길가에 간간이 마트들이 있어 장터거리의 분위기는 벗어났다. 우체국 뒤편 골목길은 한낮에도 한가한 모습이다. 80년대 이후 들어선 연립주택과 다세대주택들이 대부분이고, 최근 지은 공동주택들도 눈에 띈다. 골목은 멈춘 듯 보이지만 끊임없이 변해간다. 시장에서 장을 보고 무겁게 오르던 길은 택배 차량과 대형마트 배달 트럭이 오가며 찬거리를 내려놓고 있었다. 편해진 만큼 골목 안 사람들의 왕래도 줄어들었다.

골목엔 청년을 위한 공동주택도 있다.

골목엔 청년을 위한 공동주택도 있다.

청년 창업자를 위한 공동주택

골목 안에 꽤 독특한 이름의 공동주택이 보였다. ‘지금 도전숙(宿) 하하하’ 거창하게 ‘생각하다 도전하다 시작하다’라 쓰여 있는 공동주택은 청년 창업자를 위한 임대주택이라고 한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주거공간을 제공해 젊은이들이 창업과 생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데, 도전숙이란 이름은 어떤 연유로 지은 것일지 궁금했다. 그래도 이 오래된 마을의 골목 안에 현실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이 오가는 모습은 좋은 풍경을 만들 것이다. 하지만 한낮의 골목은 적막했다.

골목을 거슬러 올라간 능선에서 북한산 전체와 남으로 북악 능선 그리고 그 비탈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의 집과 길이 한눈에 보였다. 오래된 집들과 새로 세운 아파트.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은 아름답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나 힘겨운 지옥을 만들고 있는지 지켜볼 수 있다.

박경리 가옥 가는 골목

박경리 가옥 가는 골목

골목 안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어김없이 주차된 차들이 버티고 있다. 비번인 듯 개인택시도 몇대 보였다. 오래된 골목의 불편함이 드러나 보인다. 새로 지은 공동주택은 1층 주차공간에 일터로 나간 이들의 빈자리가 보였다. 오래된 연립주택 앞에서 지적도를 펼치고 대화를 하는 이들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헐고 새로 지으라는 업자와 집주인 같았는데 표정은 진지하고 심각했다.

청수장을 향해 가다가 봉국사를 지나 정릉천을 건너면 안내판 하나가 눈에 띈다. 간판은 서쪽 능선 골목길을 향해 있고 ‘박경리 가옥’이란 이름이 영어로, 한자로, 일본어로 적혔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원주로 가기 전까지 살던 집이 이곳에 있단다. 1965년부터 1980년까지 살았다고 하니 그의 작품 중 굵직한 것들을 엮어낸 산실이다. 골목 안 어느 집이 그의 집인지 도저히 알 수 없어 행인에게 묻자 손가락으로 알려준다. 박경리 선생을 골목에서 자주 만났다는 그는 “다 고치고 지금 그때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터만 남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라고 아쉬워했다. 불탄 채 방치된 양옥집과 경로당 사이에 대가의 집은 알맹이가 빠져나간 이름만으로 남아 있다.

완만한 비탈을 오르니 담벼락에 정릉 생명평화마을이라 쓰여 있다. 벽화의 흔적도 있는데 페인트칠은 벗겨졌고, 더러는 흉한 얼룩만을 남기고 있었다. 군데군데 남은 벽 그림들은 이곳을 스쳐 간 젊은 예술가들의 자취이다. 이곳에 사는 예술가들의 모습은 신문과 방송에도 여러 차례 소개된 바 있다. 가난이 별로 불편하지 않은 이들에게 이곳은 도시의 숨통이 됐다.

아직 달동네로 남아 있는 정릉 생명평화마을

아직 달동네로 남아 있는 정릉 생명평화마을

골목 안 전봇대엔 간간이 월세며 전세 안내문이 붙어 있다. 서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싼 가격이다. 자본주의 세상이라 가격만으로도 시설이며 모습 따위를 짐작할 수 있다. 긴 가스통을 짊어진 배달부가 숨을 허덕거리며 비탈을 오르고 있었다. 구경꾼에게 뭘 살펴보냐고 묻던 노인은 “저 위로는 아직도 연탄 때는 집들이 있고, 아래로는 기름보일러로 고친 집도 있다. 방 두세칸짜리 마당 있는 집도 월세 20만~30만원이면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조금의 불편함을 감수하면 이 도시 어디서도 보기 힘든 싼값의 방이 그곳에 있다. 이제는 몇 남지 않은 서울의 달동네 중 가장 날 것의 모습이 이곳에 남아 있다.

옛 청수장 터는 국립공원 관리소로

북한산 아래 정릉 일대의 길과 골목은 모두 정릉천과 닿아 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모여 흐르는 곳을 따라 물길이 생기는 법이다. 예전 정릉천은 생활하수가 뒤섞여 차마 보지 못할 험한 꼴이었으나 지금은 하수관이 따로 정비돼 늘 맑은 물이 흘러내린다. 사람들은 정릉천을 따라 북한산으로 오르거나 아니면 반대쪽 행로로 즐겨 걷는다. 천변에는 잘 정비된 길이 있고, 개천을 건너는 다리도 여럿 보인다.

정릉천을 따라가던 길이 끝나는 곳부터 북한산국립공원이 시작되는데, 그곳이 정릉 마을의 또 다른 상징인 청수장이 있던 곳이다. 정릉을 기억하는 이들은 대부분 청수장이란 명칭 또한 기억할 것이다. 말 그대로 물 맑은 곳에 있던 유원지 요정이었다. 청수장이 없어진 후에도 북한산으로 가는 길 입구에는 닭백숙집이며 고깃집들이 즐비했다. 청수장이 있던 터는 국립공원 안내소가 됐다. 지금 그 이름을 가진 고깃집이 길 아래 끝자락에 있다.

이 일대 골목 곳곳에서 종교시설을 자주 만나게 된다. 크고 작은 교회들은 여느 마을과 마찬가지로 흩어져 있다. 가끔 가톨릭 수도사들의 수도원이나 수녀원이 골목에 숨어 있는 모습도 본다. 산 넘어 성북동 일대부터 정릉 골목 안까지 유난히 수도원이 많았다.

신덕왕후의 천도재를 지냈고 정릉을 지키는 사찰로 흥천사가 정릉 위 북악 능선에 있고, 정릉천 위 극락교 건너 경국사가 있다. 그런 큰절 외에도 골목의 끝자락 산과 붙은 곳에는 어김없이 작은 절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아마도 서울에서도 외진 곳에 산과 붙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을 주민 말로는 지금은 대부분 문을 닫거나 줄었다는데, 무당의 신당도 골목골목 많았다고 한다. 특히 국민대학교로 넘어가는 쪽으로 기가 세서 굿당이 많았다고 들려주었다. 그 흔적이 몇 군데 남아 북한산 자락을 끼고 골목 끝자락에서 인간 세상과 신들의 세상을 이어주는 굿당이 있었다.

정릉을 걷다 보면 도심과 떨어진 고요함과 산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세상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워도 거대한 산은 움직이지 않고 자리를 지킨다. 그 자락에 이리저리 얽힌 골목길은 세상사에 무심한 듯 조용하다. 정릉으로 향하는 골목 길가에는 고목이 된 버드나무 한그루가 버티고 섰다. 나무는 주변 건물에도 기죽지 않고 높이 가지를 뻗어 올려 당당한 기세를 펼치고 있었다. 버드나무는 그 특성이 입춘 지나면 곧바로 싹을 틔워 가장 먼저 봄을 알린다고 했다. 나무 아래서는 볼 수 없었지만 아마도 가장 높은 가지 끝에는 햇살이 내려앉아 쉬며 싹을 재촉하고 있을 것이다. 가지 끝 새로 뻗은 하얀 새 가지를 보니 곧 봄이 오겠거니 기대할 수 있다. 이제 곧 봄이 오면 조금 더 나은 날이 올 것이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kyunghyang.com>

골목 내시경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