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꽃다운 여공 말고 불꽃처럼 싸운 김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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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8월이면 YH 노동조합 김경숙 열사 42주기다. 1979년 8월 9일 YH무역 노동조합원들은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하지만 농성 사흘 만인 8월 11일에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됐다. 그 와중에 22세 김경숙이 죽었지만, 신문에는 ‘여공 1명 사망’이라는 제목의 단신 기사로 실렸을 뿐이다.

1979년 8월 11일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인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끌어내는 경찰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9년 8월 11일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인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끌어내는 경찰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비록 힘은 약하나 똘똘 뭉쳐 투쟁’

YH무역은 가발 및 봉제품 수출업체로, 1966년 자본금 100만원에 10명 규모의 작은 회사로 출발했다. 1970년대 초, 직원 4000명, 13억원에 육박하는 순이익을 내며 수출 순위 15위에 도달할 만큼 급격하게 성장했다.

석유파동과 세계적인 경제공황의 여파로 무역량이 줄어든데다 회장 장용호가 외화를 빼돌리고, 무리하게 기업 확장을 도모하던 1977년 6월, 첫 휴업을 시도했다. 휴업에 이어 대대적인 인원 감축에 돌입했다. 77년 6월부터 9월까지 400명에 이르는 노동자를 내쫓았다. 가발 만들던 여공들을 봉제과로 보내기도 했는데 손에 익지 않은 작업을 시켜 자발적으로 퇴사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공장 이전 핑계로 가발 부서를 없애다시피 했다. 1978년 3월, 김경숙은 노동조합 대의원이 되고 1979년 3월 30일, 폐업한다는 공고가 붙었다.

노동조합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농성하면서 회사 정상화를 요구했지만, 누구도 응답하지 않았다. 노동조합이 감히 경영방침에 토를 달다니 좌경불순세력이라는 딱지를 붙인 것이다. 결국 79년 8월 6일 두 번째 폐업공고가 붙고, 회사는 기숙사와 식당까지 폐쇄하겠다고 공표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경숙은 고향의 어머니에게 가족의 안부를 묻고 말이 통하지 않는 회사와 맞선 자신의 상황을 알리는 편지를 보낸다.

“저희 근로자들은 비록 힘은 약하나 하나같이 똘똘 뭉쳐 투쟁하고 있습니다. … 우리를 버리고 도망간 사장이나 미국에 살고 있는 장용호처럼 모든 사장은 자기만 잘살면 돈 없는 우리쯤이야 자기들 맘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보지요? … 1979년 8월 7일 서울에서 경숙 올림.”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강제로 연행된 뒤에 농성현장에 남겨진 머리띠와 신발들 / 경향신문 자료사진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강제로 연행된 뒤에 농성현장에 남겨진 머리띠와 신발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노동조합도 물러설 수 없었다. 폐업 후 기숙사에서 농성을 이어가던 8월 8일, 회사는 단전·단수를 하겠다며 엄포를 놓았고, 경찰이 농성 해산을 시도할지 모른다는 얘기가 들렸다. 조합원들은 긴박한 상황을 돌파하면서도 자신들의 싸움을 알리기에 적합한 장소를 찾았다. 최순영 YH 노조 지부장은 ”당시 국가가 민주노조를 차례대로 깨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동일방직 다음은 YH’라는 소문이 들렸다”고 말한다. 노동조합에 대한 반감은 70년대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8월 9일 아침 신민당사 4층 강당에서 187명의 조합원이 농성을 시작했고, 10일 밤에 조합원들의 마음을 모으는 ‘종결대회’를 열었다. 아무 일 없을 거라는 신민당 당직자들의 말과 달리 경찰의 분위기는 험악했던 모양이다. 고향과 그곳의 가족에게 인사를 하자는 말과 동시에 조합원들은 울음바다를 만들었다. 집회 분위기는 무거웠지만, 김경숙은 종결대회의 결의문을 읽었다.

8월 11일 새벽 2시, 농성 시작한 지 만 이틀을 다 채우지 못했던 그때 자동차 경적이 세 번 울렸다. 경찰은 문을 부수며 신민당사에 들이닥쳤다. 사다리차와 소방차 물탱크 등을 대동한 진압대원들은 마구잡이로 때려부수며 조합원들을 끌어냈다. 23분 만에 ‘101호 작전’이라 이름 붙은 농성 해산명령은 종료됐다. 김경숙은 4층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경찰은 동맥을 끊은 김경숙이 스스로 투신했다고 했지만 29년이 지난 2008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김경숙의 사망이 경찰의 과잉 진압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김경숙의 죽음을 둘러싼 내막을 아무리 간추려도 ‘노동자’답게 성장하고자 했던 김경숙을 상상하게 된다. 그런데 <YH노동조합사>(형성사·1984)의 머리글을 쓴 고은 시인은 YH 여성 노동자들을 ‘민족의 해당화’, 김경숙을 ‘한 서린 처녀의 삶을 끝낸’, ‘민족의 꽃송이’라고 했다. 같은 책에 실린 양성우 시인의 ‘그대 못다 부른 슬픈 노래를: 김경숙 추도사’도 김경숙을 “열아홉 순정을 짓밟힌/ 배고프고 피 흘리는/ 예쁜 아가씨”로 부른다. 70년대 여성 노동자를 향한 편견 어린 시선은 이렇게 자기 자신을 찾아가던, 싸우는 여자를 수동적인 피해자의 자리에 가두고 말았다.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사망한 YH무역의 고 김경숙 열사 / 경향신문 자료사진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사망한 YH무역의 고 김경숙 열사 / 경향신문 자료사진

김경숙의 죽음이 일어났던 YH 노동조합의 신민당사 농성에 대해서도 박정희 정권은 ‘일부 종교를 빙자한 불순단체와 세력이 산업체와 노동조합에 침투해 노사분규를 선동하고 사회불안을 조성한 사건’이라고 규정했는데, 이는 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주류 노동운동에서의 평가와도 맞물리고 있다. YH 노동조합과 김경숙이 만들었던 활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 노동자의 조직적인 활동이었다. 배움도 짧고 나이 어린 여공들이 이런 일을 주도했을 리 없다며 남성지식인, 재야인사 등이 기획주도했다고 평가하는 연구들이 여전히 많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런 평가에 젠더적인 관점이 미흡하고, 여성 노동자의 주체적인 투쟁을 폄훼하고 있다는 반성과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여공, 여성 노동자에 대한 편견의 이름

김경숙도 가난한 가정형편 때문에 어린 나이부터 생계를 위한 노동을 시작했지만, 제조업 생산직 여성 노동자들은 스스로 생계를 꾸려갈 경제적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다. 70년대 여공을 “가난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노동에 예속된 이들로 보는 사회적 시선”은 2021년 현재의 한국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산업현장에서 죽거나 다치는 젊고 어린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태도는 과연 얼마나 달라졌다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빈곤과 노동에 대한 이야기에 안타까워하며 탄식하지만, ‘내 얘기는 아니네’ 하며 거리를 두고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적힌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문장처럼 어쩌면 역사는 돌림노래처럼 되풀이되는지도 모른다. 회사가 폐업하는 과정이나 노조에 대한 혐오나 여성 노동자에 대한 편견도 40여년 전과 여전히 닮았는데, 우리는 어떻게 지난 역사를 새롭게 다시 기억할 수 있을까.

※참고문헌 김경숙 열사 40주기 기념 심포지엄 <‘여공’ 기억에서 역사로> 자료집, 여공문학.

<림보 <회사가 사라졌다> 공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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