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최초의 ‘여성 집행부’ 노조에 대한 탄압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1970년 봉제공장 재단사였던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산화한 후 노동운동이 전면 확산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엄혹했던 70년대 노동운동의 명맥을 이은 이들은 다름 아닌 ‘여공’들이었다. 이후로도 여성들의 노동운동은 면면히 이어져 왔지만 늘 주변부 취급을 받아왔다. 반노동 정서는 물론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도 싸워야 했던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언제쯤 현대사 속에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지난 반세기 동안 펼쳐진 한국 여성 노동운동의 ‘빛나는 장면’들을 연재한다.

1980년 5월 13일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와 노조원들이 노총회관 대강당에서 ‘노동기본권 확보 전국궐기대회’를 열고 복직을 요구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0년 5월 13일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와 노조원들이 노총회관 대강당에서 ‘노동기본권 확보 전국궐기대회’를 열고 복직을 요구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8년 3월 10일 오전 10시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노동절 행사가 열렸다. 수천명이 체육관을 가득 메웠다. 최규하 국무총리도 참석했다. 라디오와 TV로 전국에 생중계됐다. 30분이 지나고 정동호 한국노총 위원장이 기념사를 읽어갈 즈음 웬 구호가 울려퍼졌다. “동일방직 문제 해결하라”, “똥을 먹고 살 수 없다” 생중계가 잠시 중단됐다. 구호를 외친 여성들에게 경찰 등이 달려들어 발길질을 해댔다. 이 여성들은 누굴까. 이들이 해결하라고 외친 동일방직 문제는 무엇일까.

최후의 저항수단 ‘반나체 시위’

동일방직 주식회사는 70년대의 대표 섬유회사다. 섬유·봉제공장은 당시 여성들의 주된 일자리였다. 동일방직도 노동자 대다수가 여성이었지만 노조 위원장은 남성이 맡았다. ‘대이변’은 1972년 5월 10일 노조 정기 대의원 대회에서 벌어졌다. 사측의 남자 후보들을 큰 표차로 물리치고 주길자씨가 지부장으로 선출됐다. 여성이 노조지부장에 뽑힌 건 최초였다. 3년 뒤에도 이영숙씨가 지부장으로 뽑혔다.

연이어 탄생한 여성 집행부는 사측과 남자 조합원들에게 눈엣가시였다. 사측은 이영숙 집행부를 무력화하려 했다. 1976년 7월 23일 인천 동부경찰서가 이영숙씨를 연행했다. 사측의 남자 조합원들은 여성들을 기숙사에 가두고 대의원 대회를 열었다. 분노한 여성 노동자들은 기숙사를 빠져나와 농성에 나섰다.

농성 사흘째 여성 노동자들은 파업했다. 수백명의 무장경찰이 농성장에 들이닥쳤다. 그때 누군가 다급히 소리쳤다. “벗은 여자 몸엔 그 누구도 손을 못 댄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옷을 벗었다. 400여명이 상하의 속옷만 걸친 채 서로를 껴안았다. 벗어던진 작업복을 손에 쥐고 흔들며 노총가를 불렀다. 뜻밖의 행동에 경찰도 주춤했다. “주동자만 내놓으면 무사히 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회유했다. “주동자는 따로 없다. 우리 모두가 주동자다.” 여성들은 굴하지 않았다.

“얘가 대의원이다. 저 X도 대의원이니 잡아가라!” 회사 간부가 스크럼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경찰은 이들을 방망이로 내리치고 머리채를 잡아다 순찰차에 태웠다. 약 30분 만에 72명이 연행됐다. 40여명이 순간 졸도했다. 2명은 20여일 동안 병상에 누웠다. 강제로 해산된 자리엔 찢어진 작업복과 주인 모를 운동화, 작업모, 머리핀 등이 널브러졌다. 이날은 ‘반나체 시위’로 기록됐다.

여공에 똥물을 퍼부은 남성 노동자들

사측의 지독한 탄압에도 여공들은 1977년 또다시 여성 지부장을 선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총각 지부장이다. 노조파괴는 이듬해 대의원 선거를 기점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1978년 2월 21일 오전 6시 노조 사무실. 여성 노조 간부들은 대의원 선거를 치르기 위해 곧 퇴근할 야간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고함이 들렸다. “이 빨갱이 X들아!” 남자 조합원 5~6명이 방화수통을 들고 노조 사무실로 뛰어들었다. 방화수통에는 화장실에서 퍼온 똥이 가득 담겼다. 방화수통을 여성들의 머리에 들이부었다. 고무장갑과 걸레에 똥을 묻혀 닥치는 대로 문댔다. 입에도 쑤셔넣었다. 도망가면 쫓아가 탈의실과 기숙사에 똥을 뿌렸다.

노조가 경비를 요청했지만 경찰은 방관했다. 한 여성 노동자가 울먹이며 도와달라고 하자 경찰은 말했다. “야! 이 XX아! 가만있어, 이따가 말릴 거야.” ‘똥물 투척 사건’으로 여성 70명이 다쳤다.

1978년 2월 21일 똥물을 맞은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 이 사진은 이총각 지부장이 동일방직 인근에 있는 사진관 사진사에 요청해 증거물로 촬영한 것이다. / 동일방직복직투쟁위원회 제공

1978년 2월 21일 똥물을 맞은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 이 사진은 이총각 지부장이 동일방직 인근에 있는 사진관 사진사에 요청해 증거물로 촬영한 것이다. / 동일방직복직투쟁위원회 제공

이틀 뒤 섬유노조는 동일방직지부를 ‘사고지부’로 결정했다. 그해 3월 6일 이총각 등 노조 간부 4명을 ‘반노동조합적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제명했다. 동일방직은 그해 4월 1일 노동자 126명(2명은 자진퇴사)을 해고했다. 김영태 섬유노조 위원장은 이들의 명단을 부서, 생년월일, 본적까지 기재해 전국 노조와 사업장에 뿌렸다. ‘블랙리스트’였다. 블랙리스트 때문에 해고노동자들은 가는 곳마다 거부당했다. 이직해도 조사를 받은 뒤 잘렸다.

동일방직 여공들이 맞서야 했던 것은 독재정권과 사측만이 아니었다. 동일방직 사례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야만성을 드러내는 장면들이 잇달아 등장한다. 상당수 남성 노동자들이 사측에 서서 폭력을 휘둘렀다. 남성들이 ‘여성 집행부’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한 남성 노동자는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어떻게든 노조(여성 집행부 중심의 민주노조)를 도와줄 목적으로 몇몇 안면이 있는 남자 대의원을 만나 여성 집행부를 지지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여자 일색인 집행부는 자존심이 있으니 절대 지원할 수 없고 누구든 남자라야 한다는 묘한 고집이 머리 속에 박혀 있음을 확인하는 도리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나를 은근히 비웃는 눈치였습니다.”(<동일방직 노동운동 조합사> 동일방직복직투쟁위원회 지음·돌베개)

동일방직 여공들의 민주노조 운동을 뒷받침해준 이들은 동료 남성들이나 섬유노조가 아니라,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였다. 이곳의 조화순 목사는 동일방직에 6개월간 ‘위장취업’해 여공들의 가혹한 노동 현실을 목도한 후 함께 싸웠다.

23년의 세월이 흐른 2001년, 똥물 투척 사건 등 동일방직 여공들에게 가해진 야만적 폭력 뒤엔 중앙정보부가 있었음이 중정 직원의 양심 고백으로 드러났다. 동일방직 해고자들은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러나 동일방직 여성들의 싸움은 여전히 ‘역사 뒷이야기’ 정도의 취급을 받고 있다.

지난해 12월 14일 동일방직 해고자 중 한명인 정명자씨는 한진중공업 김진숙씨의 복직을 위해 연 기자회견에서 이런 말을 했다.

“민주화운동을 했던 대학생들은 명예회복되어 교수도 되고 국회의원도 되어 역량을 펼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해고는 부당하다’는 판정을 받고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을 받은 김진숙 동지와 저 같은 노동자들은 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동자에게 진정한 명예회복은 무엇일까요. 해고당한 사업장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일을 하다 우리 손으로 사직서를 쓰고 당당하게 정문을 내 발로 걸어나오는 것입니다.”

민주노조를 세우려 싸웠던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해고된 뒤 43년의 세월이 흘렀다.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은 ‘복직’되지 못한 채로 이 세월을 견뎠다. 멸시 속에서 민주노조를 위해 꿋꿋하게 싸웠던 동일방직 여공들의 이야기는 더 오래, 더 제대로 기억돼야 하지 않을까.

<탁지영·송윤경 기자 g0g0@kyunghyang.com>

여성 노동운동 ‘이 장면‘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