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신년사 화두는 ‘디지털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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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하면 금융상품 제조하는 단순 공급자로 전락할지 모른다고 우려

올해 주요 시중 은행장의 신년사 화두는 단연 ‘디지털 혁신’이었다. 진옥동 신한은행장은 “지금 당장 서둘러야 하는 것은 디지털 전환이며 성공 여부에 조직의 명운이 달렸다”고 말했다. 허인 KB국민은행장은 “전통은행의 틀을 과감히 깨고, 디지털 금융플랫폼 기업으로 환골탈태하는 길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 행장들의 신년사에서는 금융과 비금융의 경계가 사라지고 빅테크 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 디지털 혁신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는 비장함이 읽힌다.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 설치된 현금자동입출금기(ATM). / 연합뉴스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 설치된 현금자동입출금기(ATM). / 연합뉴스

서병호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올해 은행산업을 전망하면서 “2021년 국내 은행의 경영 환경도 우호적이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면서 “대소비용 및 규제비용의 증가와 초저금리 지속으로 당장의 경영실적 관리가 어려운 가운데 디지털 채널 경쟁의 본격화로 고객 이탈도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은행들은 디지털 혁신에 실패할 경우 빅테크의 플랫폼에 금융상품을 제조하는 단순 공급자로 전락할지도 모른다고 경계하고 있다.

비용 절감 위해 점포 축소 가속화

은행들은 자체적인 디지털 경쟁력 강화에 나서는 한편 비용 절감을 위해 점포 축소에 속도를 내고 있다. 비대면 거래가 증가하면서 높은 비용이 드는 점포를 계속 유지할 유인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인터넷 뱅킹 확대 등에 맞춰 몇년 전부터 꾸준히 점포 수를 꾸준히 줄여왔으나 지난해 코로나19로 대면 거래가 어려워지면서 축소 규모가 커졌다. 지난해 말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은행 점포는 4423개로 2019년 말(4660개)보다 237개가 줄었다. 이는 2019년에 줄어든 점포 규모(38개)보다 6배 더 많은 것이다.

올해도 점포 폐쇄가 이어질 예정이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 등 4대 시중은행은 1~2월에 영업점 26곳을 축소할 예정이다. NH농협은행의 올해 점포 수 관련 계획은 3월쯤 나온다. 한국씨티은행은 2017년 대대적인 영업점 통폐합 이후 4년 만에 점포 수를 줄이기로 했다. 1월 중으로 출장소 4곳이 통폐합되면서 영업점 수가 43개에서 39개로 줄어들 예정이다.

은행 입장에서 점포 폐쇄는 비용 절감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문제는 직원과 얼굴을 마주볼 수 있는 점포가 줄어들면 고령층 등 디지털 취약계층과 농어촌 등 취약 지역 고객의 금융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지난 12일 조선비즈가 17개 시중은행 지점의 지역별 구조조정 실태를 분석해 보도한 내용을 보면, 주민 평균 소득이 낮은 지역과 대도시의 구도심에서 지점들이 집중적으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도봉구와 강북구는 2015년과 비교해 2020년 은행 점포 수가 각각 32.4%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동작구는 -28.1%, 성북구는 -27.6%, 동대문구는 -25.6%를 기록했다. 반면 강서구(0.0%), 용산구(-3.6%), 마포구·성동구(각 -10.0%), 송파구(-10.6%)는 상대적으로 감소폭이 작은 것으로 나타났다. 광역시의 경우 대전 중구(-34.4%), 부산 중구(-28.2%), 인천 미추홀구(-21.4%), 대구 남구(-20.8%), 대구 동구(-17.0%), 대전 서구(-16.9%) 등 고령층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구도심 지역의 감소폭이 큰 것으로 분석됐다.

은행 신년사 화두는 ‘디지털 혁신’

고령층·농어촌 고객 접근성 떨어져

전문가들은 은행권의 개별적 대응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은행권 협의를 통한 공동대응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일부 국가에서 실험 중인 공동점포는 고객 편의성을 높이면서 비용을 줄이는 대안 중 하나로 거론된다. 영국에서는 스코틀랜드왕립은행(RBS), 바클레이스, 로이드 등 대형 은행 3사가 2019년 3월 합의를 체결하고 버밍엄, 맨체스터, 런던 등을 포함한 6개 지역에서 ‘비즈니스 뱅킹 허브’라는 이름의 공동점포 운영을 시작했다. 공동점포는 특정 은행 브랜드를 내걸지 않고 현금 교환 및 관리 등 기본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 운영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로 일반 은행 점포보다 영업시간이 길다. 영국에서는 2007년 1만1365개이던 은행 점포가 2017년 7207개로 10년새 37%나 사라졌다. 그 결과 중소기업과 인터넷 뱅킹 취약층이 피해를 본다는 여론이 비등하자 영국 금융당국이 이들 은행에 협업을 촉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에서는 2019년 9월 프랑크푸르터폴크스방크와 타우누스슈파르카세가 공동점포 시범운영에 들어갔다. 두 은행 직원이 일주일에 이틀씩 번갈아 근무한다. 금융감독원 자료를 보면, 독일도 이자 마진 축소와 디지털 뱅킹 확산 등의 여파로 은행 점포 수가 2017년 -5.9%, 2018년 -7.4%로 줄어드는 추세다. 일본에서는 지방은행인 치바은행, 무사시노은행, 다이시은행 등이 영업점 공동 운영을 실시하고 있다. 일본 5대 메가뱅크에 속하는 미쓰비시UFJ은행과 미쓰이 스미토모은행은 2019년 9월부터 현금자동입출금기(ATM)를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다.

점포 폐쇄 시 프로스포츠의 드래프트 방식을 적용하자는 제안도 있다. 이대기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은행 점포 수요 감소에 대한 대응 방안’ 보고서에서 “디지털 취약계층 밀집지역과 금융서비스 과소 제공 지역에서 점포를 폐쇄할 경우 프로스포츠 팀처럼 각 은행이 점포를 폐쇄할 지역을 순차적으로 정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수익성이 떨어지는 지역에서 여러 은행이 한꺼번에 점포를 폐쇄해 큰 피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은행들이 순번을 정하자는 것이다.

전국은행연합회는 2019년 6월 은행권 자율규제안인 ‘은행권 점포 폐쇄 공동절차’를 마련했다. 점포 폐쇄 전 사전 영향평가, 점포 폐쇄 후 이동점포 등 대체 수단 운영, 폐쇄 1개월 전 사전통지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은행연합회는 ‘공동절차’를 더욱 강화해 점포 폐쇄 전 사전통지를 현행 1개월 이전에서 3개월 이전으로 앞당기는 등 보완 작업을 하고 있다. 은행연합회 관계자는 “이르면 2월 중에 마무리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논의 중인 방안에 공동점포 운영 방안은 포함돼 있지 않다. 공동점포 운영에는 시스템 통합이나 영업 정보 공유 등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금융당국 차원의 결정이 없는 한 실행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공동절차’가 기본적으로 강제성 없는 자율규제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실효성을 담보할지도 미지수다.

<정원식 경제부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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