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에 만화 독자투고가 내 그림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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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꽁이 서당」 작가 윤승운 화백

만화가 윤승운 화백(77)은 아직 현역이다. 원고를 그릴 때마다 하얀 종이 위에 손수 연필을 들어 밑그림부터 그린다. 그 위로 펜이 오가며 낯익은 선들을 긋고 나면 말썽꾸러기 학동과 이야기꾼 훈장님이 나타난다. 어린이 잡지에 꾸준히 연재하고 있고, <맹꽁이 서당> 같은 작품의 단행본 인세 역시 중단 없이 들어온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그저 ‘추억의 만화가’가 아님은 분명하다.

만화가 윤승운 화백

만화가 윤승운 화백

그럼에도 그의 태도엔 겸손이 배어 있다. 자신의 작품을 가차 없이 “엉터리”라고 평가하는가 하면 “만화가는 만화가”라는 말로 자신이 고상한 예술가처럼 대접받는 데도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유년 시절부터 그의 팬이었던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가 인터뷰어로 나서 하나하나 함께 짚어낸 윤 화백의 만화인생은 실패와 좌절을 걱정하면서도 마침내 역경을 이겨낸 한 예술인의 표상과도 같았다. 습작처럼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10대 시절까지 포함하면 60년을 헤아리는 그의 발자취를 2020년 12월 30일 경기 남양주시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서 복기해 봤다.

정재승 교수(이하 정) “먼저 처음 만화를 그리려 마음먹은 계기가 궁금하다.”

윤승운 화백(이하 윤) “공부를 싫어했어. 요즘 수포자라고 있잖아. 내가 딱 그거였다. 연세대 농업개발원에서 낙농 배우는 1년 과정을 수료하긴 했는데 중학생 때는 그때 살던 서울 용산구 청파동 인근에서 말썽 많이 부렸다. 하도 말썽만 부리고 다니니 ‘사람 되긴 틀렸다’는 소리를 듣고. 그러다 동아일보에 만화를 독자투고하는 코너가 있었는데 거기다 투고를 했더니 고바우 김성환 선생이 힘내라고 ‘분발하세요’ 이런 평가를 했다고. 따지고 보면 그게 시작이지.”

“어떻게 말썽을 부렸길래….”

“한번은 동네의 한 여학교 앞을 지나가는데 수위가 나와서 나를 대뜸 잡아 던지는 거야. 난 영문도 모르고 당하기만 했는데, 알고 보니 나랑 같은 학교 친구가 그 수위실 옆을 지나가면서 수위를 놀리고 도망갔나봐. 난 억울하잖아. 그래서 풀려난 뒤 이번에는 친구들이 뒤따라오고 나는 앞장서서 그 수위실로 복수하러 갔지. 벽돌 들고. 그런데 또 잡혀서 파출소까지 끌려가 수갑 차고 묶여 있으니 동네 사람들이 지나가며 다 쳐다보는 거지(웃음).”

윤 화백은 만화에 입문하기까지 젊은 시절 좌절을 경험한 일들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납북된 아버지 대신 큰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말썽도 많이 부렸지만 어떤 일에도 호통 없이 묵묵히 자신이 사람 되기를 기다려준 큰아버지 덕분에 결국 ‘사람 구실’은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시각장애인이에요. 장애 때문에 군대도 안 갔어. 왼쪽 눈이 실명이라. 옛날 중학교도 시험 봐 들어갔을 때 내가 지망한 학교에서 내가 점수만 보면 합격인데 왜 그런지 날 불합격 시킨 거야. 그래서 그 학교에 가보니 면접에서 내 눈을 보고 떨어뜨린 거더라고. 그때부터 ‘아 난 시험은 다 떨어지는 팔자구나’ 하는 트라우마가 생겨버렸지.”

“지금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장애를 대하는 인식처럼 만화를 보는 인식도 옛날엔 더 경직돼 있었다.”

“예전에 한번은 문교부 공무원이 만화가들을 초대하길래 나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 앉혀놓고 ‘만화는 교육적이어야 한다’ 뭐 이런 소리를 하더라. 그때 난 속으로 ‘만화는 만화적이어야지’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만화가 너무 패륜적인 것도 나오고 그래서 꼭 이런 걸 그려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긴 했어.”

윤승운 화백이 독자를 위해 보낸 그림

윤승운 화백이 독자를 위해 보낸 그림

“<맹꽁이 서당>은 교육적인 만화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그리기 위해 역사 공부를 따로 했나.”

“에이 엉터리죠. 만화가가 되기 전 스무 살쯤인가 할아버지 머리맡에 ‘조선왕조 오백년 야사’ 뭐 그 비슷한 제목의 책이 있었길래 보니까 정리가 잘 돼 있더라. 학교 공부는 안 했으니 조선이라고 하면 이성계 정도나 배운 수준이었거든. 그런데 그 책을 재미있게 읽고 나중에 반드시 이 내용을 그려야겠다 마음먹었더니, 20년 뒤에 정말로 그리게 됐다. 처음 그릴 때만 해도 역사물을 그린다고 하니 한 출판사 사장은 ‘당신 끝났구먼’ 그럴 정도였는데. 이제 와서 보면 그때 명랑만화는 지금 더 이상 리바이벌이 안 되지만 역사물인 <맹꽁이 서당>은 지금도 찍어낸다.”

윤 화백은 코로나19로 집안에서 자녀에게 읽힐 교육적인 만화를 찾는 부모가 많아져서인지 <맹꽁이 서당>의 인세도 좀 더 늘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천진난만하고 글공부보다는 노는 것부터 찾는 어린이들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는 점이 재미와 함께 유익한 교육적 효과도 있는 역사만화의 인기를 부른 셈이다. 정 교수도 자신이 만화에 빠지게 된 이유 가운데 교육적인 효과가 컸다고 말했다.

“그런데 정 교수는 어떻게 이렇게 만화에 깊이 빠지게 된 거요?”

“내가 왼손잡이라 어렸을 때 난독증이 있어 글자를 빨리 못 읽었다. 왼손잡이들이 글씨의 좌우가 헷갈려 독해를 더디게 배우는 일이 흔하다. 게다가 부모님도 어려서부터 굳이 글을 배울 필요는 없다고 초등학교 가기 전까지는 글자도 안 가르쳐 대신 만화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림이 같이 있으면 빨리 못 읽는 약점도 덜하고 만화를 통한 상상력도 길러지니까.”

“자기가 자기를 교육한 셈이구려.”

“<요철 발명왕>이야말로 특허라는 개념도 희박하던 시대에 정말 참신하고 획기적인 발상이 돋보인 만화였다. 어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나.”

“아이디어 그런 거 없어. 그냥 전깃불 하나 켜놓고 죽어라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려진 거다. 제목도 난 그때 ‘요철’이 어떤 한자를 쓰는지도 몰랐는데 편집자가 <요철 발명왕>이라고 떡 붙여주니 잘 어울리더라.”

“<맹꽁이 서당>은 제목 정할 때 다른 일화가 없었나.”

“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아내가 <맹꽁이 서당> 제목은 자기 아이디어로 지었다는 거야. 조언 좀 해달라고 하니 그런 아이디어를 줬나 본데, 괜히 자존심 싸움이 돼서 그 때문에 부부싸움을 하기도 했어요. 나중에 나이 오십 넘어서 성균관에 한문 경전 배우러 가니 거기서 만난 한학에 조예가 깊은 분들이 옛날에도 ‘학동들이 글 읽는 소리가 맹꽁이 소리 같다’고 한 표현이 있었다고 알려주대.”

“신문수 화백과 같은 화실을 쓴 기간도 길고 인연도 유독 깊다고 들었다.”

“신 화백은 재주가 많고 똑똑해요. 난 내성적이고 소심해. <요철 발명왕>을 64쪽짜리 잡지 부록으로 그려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때도 처음엔 끝까지 안 한다고 그랬어. 그러다 40일 여유를 받아 일단 그리겠다고는 했는데 37일 동안 아무것도 못 하다 길창덕 선생을 찾아갔지. 왜 왔냐고 묻길래 이제 겨우 3일 남았는데 어떡하냐고 했거든. 그런데 그냥 ‘니가 알아서 해야지’ 그러더라고. 잡지사에서도 계속 나를 안 놔주고 계속 원고 달라고 조르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흘 반 만에 64쪽을 그리려고 하니 또 어떻게 신이 들어와 해줬는지 그걸 하게 됐어.”

윤승운 화백과 정재승 교수가 환담하고 있다.

윤승운 화백과 정재승 교수가 환담하고 있다.

“함께 작업하면 막힐 때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일도 있었나.”

“그런 건 잘 없어. 같이 노니까 좋지. 고스톱도 치고. 난 배울 게 많았지만 능력 있는 신 화백은 나한테 배울 게 뭐 있었겠나. 난 신 화백이 명랑만화 길을 닦아놓은 걸 편하게 갔을 뿐이다. 그래도 둘이 잘 맞았던 게, 난 내성적이라 그런지 밝고 따뜻한 걸 좋아해 화실에서도 창가 자리를 잡고 싶었는데 신 화백은 반대로 벽을 마주보고 어두운 자리를 좋아하는 거라.”

“지금까지 말씀 들으면 작품 속 어린이들이 말썽 피우고 소동을 일으키는 모습도 윤 화백의 삶이 묻어 있는 것 같다. 작품 구상할 때도 그런 게 작용했나.”

“내가 어릴 적 말썽부린 모습과 비슷하지. 작품 구상할 때 한 번은 막혀서 혼자 슬그머니 충북 단양까지 간 적이 있어. 한밤중에 그렇게 낯선 곳에 가니 누가 날 간첩인 줄 알고 경찰에 신고를 했더라고. 경찰서까지 한시간이나 걸리는 시골이었는데. 경찰이 내 주머니를 뒤지더니 종이에다 빨간 글씨로 백성 민(民)자를 쓴 걸 흔들며 이게 뭐냐 그러더라고. 그게 뭘까 하고 나도 바로 생각이 안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당시 바빠서 민방위 훈련을 빼먹었는데 그거 기억해야지 하면서 써놓은 거였어. 그 때문에 괜히 간첩으로 몰렸지(웃음).”

“윤 화백이 인정하는 최고의 만화가는 누구라고 생각하나.”

“<꺼벙이> 그린 길창덕 선생은 한국 명랑만화의 최초 세대는 아니고, 연배는 비슷하지만 약간 뒤에 나온 작가지. 그런데 길 선생이 나오니까 이제 그 만화를 보면 다른 이전 만화가들 만화는 못 볼 정도인 거야. (엄지를 들며) 웃기는 코미디 만화로는 이거였어. 옛날 연암 박지원이 문체를 확 뒤집어 엎어놓은 것처럼. 게다가 길 선생은 내가 열네 살 어린데도 존중해줄 정도로 아주 신사인데다 술도 안 마시고 노는 걸 몰랐지. 그렇게 작품에만 몰두하면서 만화계에 영향을 많이 끼친 분인데 시간이 많이 흘러 잊힌 인물이 돼버린 게 안타까워.”

“‘동심여선(童心如仙)’이란 글귀, 특히 윤 화백 고유의 그림체와 글씨가 잘 어울려 사람들의 기억에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 같다.”

“‘동심여선’은 소파 방정환 선생이 쓴 말이다. 나도 처음 듣고선 참 좋은 말이라고 생각해 건너건너 물어서 출처를 알게 됐는데 어느새 자주 쓰게 됐다. 글씨는 따로 모아 별도의 서체를 만들자는 제의도 받은 적 있다. 그런데 그게 다 처음부터 끝까지 손이 많이 가는 일이잖나. 낙농 배운 걸 바탕으로 예전에 소 두마리 키우다 말았는데 계속 목표로 남아 있으니 차라리 소나 키워야지. 허허.”

주간경향·한국만화가협회 공동기획

<정리·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진행·정재승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사진·권호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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