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세대 넘어 ‘80동맹’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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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분석서 <추월의 시대> 낸 80년대생 저자들을 주목하는 까닭

“나는 분명히 밑에서부터 시작했다. 월급 100만원짜리 직업이었다. ‘노력하면 클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공채를 거치지 않으면 위로 치고 올라가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재 기업홍보부서에 적을 두고 있다’고 저자소개에서 밝힌 백승호씨의 말이다. 백승호씨의 생각은 최근 한국사회에서 뜨거운 화두가 되고 있는 ‘공정’에 가닿는다. “중요한 것은 역동성이다. 정규직 대기업에 가지 않더라도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면서 학벌과 별개로 실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기회가 열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역동성이라고 생각한다. 청년들도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채 아니면 답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공채문화를 어떻게 하면 공정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추월의 시대> 저자들 왼쪽부터 김시우, 한윤형, 하헌기, 임경빈, 양승훈, 백승호 / 메디치 미디어 제공

<추월의 시대> 저자들 왼쪽부터 김시우, 한윤형, 하헌기, 임경빈, 양승훈, 백승호 / 메디치 미디어 제공

‘공정’에 대한 기존 해법에 의문

기존의 진보담론과는 다른 각도의 문제 제기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일단 해법이 아니다. “기업들도 앓는 소리를 한다. 해고도 힘들고 뭣도 힘들다고 한다. 일정 부분 타당성은 있다. 사기업에 대해서는 고용을 자유롭게 해줄 테니 해고에 대해서는 고용보험, 사회보험제가 강화돼야 한다. 공무원 사회는 오히려 정부가 결단하면 쉬울 것이다. 지금도 외부채용이 늘어나고 있는데, 공무원의 일정 부분은 정규직을 뽑되, 급수가 되는 직군은 전문가가 들어갈 수 있는 포지션을 늘여야 한다.” 사회적 고용안전망이 바탕이 되는 가운데 개방형 직군을 늘이는 것이 또 다른 해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세대론과 색깔론에 가려진 한국사회 성장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추월의 시대>에 ‘공채공화국을 타파하라’라는 챕터가 들어가게 된 문제의식이다. 공채, 그러니까 시험 선발이 실제 그 사람이 입사 후 보일 업무수행능력과 일치하지 않는 건 경험적으로 안다. 그러나 다른 공정한 선발기준이 없기 때문에 모두가 평등한 조건에서 치르는 것으로 가정하는 시험이 선호된다. 공채구조는 20대 후반의 높은 실업률을 만들어낸다. 공무원 선발에서는 공시를 줄이고 ‘어공(어쩌다 공무원·별정직)’을 늘리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 민간기업의 영역에서도 첫 직장이 낙인이 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사회의 이직 역동성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88만원 세대> 이후 나온 모든 세대론은 어떻게 보면 (기득권화한) 86세대를 몰아내자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지만, 우리의 문제의식을 요약한다면 ‘안 몰아내자’라고도 할 수 있다. 세대론적 갈등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들의 인식론적 특권 대신 기여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대긍정론이냐’는 질문에 대해 역시 저자로 참여하고 있는 한윤형씨의 말이다. 저자들이 보기에 세대론과 색깔론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규정한다. 남성의 관점에서 봤을 때 ‘스무 살 무렵 이미 가족 중에서 가장 많은 소득을 올리게 된 세대’가 산업화 세대라면 ‘스무 살 무렵 이미 가족 중에서 가장 학력이 높았던 세대’가 민주화 세대다. 이들 두 세대에 속하지 않았거나 이들 세대에 속했더라도 그들의 서사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은 때에 따라 한쪽의 손을 들어주면서 한국사회는 발전해 왔다.(책 159쪽)

다시 말해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각각의 공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들이 보기에 두 세대는 각자의 ‘폐쇄적 서사’에 갇혀 상대방의 공로를 인정하지 못했다. “산업화 세력에는 ‘북한과 그 추종자들’이라는 빌런(악당)이 있었다. 민주화 세력에는 ‘독재자와 그 부역자’라는 빌런이 있었다. 그들은 빌런이 존재하는 한 어떠한 고난을 겪더라도 굴하지 않고 영웅으로서의 책무를 짊어져야 했다. (…) 상대편이 퇴장하지 않는 한 퇴장할 수 없다.”(책 164~165쪽)

이들에 제안하는 전략적 방책은 ‘역사화해서 집에 잘 보내드리기’다. 히어로의 위선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히어로를 퇴장시킬 수 없다. 유일한 방책은 히어로가 이미 자신의 미션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음을 깨닫게 하는 것뿐이다. 일종의 해원(解怨) 내지는 씻김굿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이 시각의 연장선에서 평가해보자면 최근의 조국대전이나 검찰개혁을 둘러싼 갈등은 이미 역사적 소명을 다한 이들이 벌이는 유령싸움이다. 한윤형씨의 말이다. “조국 사태와 같은 것은 너무 민감해서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적어도 우리는 상대화하는 인식틀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본다. 가령 이런 이야기다. 제 또래의 입장에서는 조국 전 장관이 사노맹 활동을 했다는 것은 30년 전 이야기다. 86세대들의 경험으로 치환하자면 자신의 부모에게 한국전쟁 경험을 듣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다.”

조국대전과 검찰개혁 논란의 본질은

<추월의 시대> / 메디치미디어

<추월의 시대> / 메디치미디어

책 저자들의 공통점은 모두 80년대생이라는 점이다. 이들 스스로의 분류에 따르면 ‘중도파 2세대’다. 바로 윗세대인 70년대생들, 이른바 포스트 386세대는 ‘부모가 산업화 세대였지만 그에 반발해 민주화 세대의 인식에 합류했다’면 1980년대 생들은 산업화의 유산 속에서 자라난 부모들, 중도파의 자녀였기 때문에 민주화에 우호적이었지만, 대학 시절의 ‘세례’에도 불구하고 산업화에 완전히 부정적일 수는 없었다.(책 84쪽) 저자 임경빈씨의 말이다. “굳이 우리의 위치를 말하자면 연령으로 보나 사회적 위치로 보나 사회초심자 내지는 신입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산업화 세대나 86세대처럼 완전 기득권·권력층이거나 상위 플레이어 역할을 가진 실권자가 아닌 실무를 맡고 있는 중간관리자의 역할이라고 해야 할까. 실무에서 있어서는 어느 정도 실력은 갖췄고 돌아가는 공정도 알지만, 아직 권한을 갖지 않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아서 이들의 목소리를 내보는 것이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 그런 목소리가 사회의 다수를 차지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이 프로젝트의 가제는 ‘80동맹’이었다. 80년대생들의 목소리를 대변해보겠다는 취지도 있었지만, 흔히 이야기하는 ‘20 대 80 사회’에서 다수를 차지하지만 억눌려 있는 80%의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기자가 이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것은 대략 1년 전 즈음이다. 이들 저자를 묶는 또 하나의 테두리는 팩트체크 유튜브 채널 ‘헬마우스’였다. 헬마우스 채널에서 스피커를 맡고 있는 방송작가 임경빈씨는 “책을 통해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 원래 가지고 있던 미션이고, 유튜브 채널은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라고 말했다.

책 집필에 참여한 저자들을 외부적으로 대표하고 있는 이는 하헌기 새로운소통연구소 소장이다. 하 소장의 말이다. “새로운소통연구소는 실체가 없는 조직은 아니다. 이번처럼 단행본 책도 쓰고 보고서도 만들어 공개한다. 거기다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고 있다. 작은 정치스타트업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책 이전에 외부로 노출된 활동은 역시 헬마우스 유튜브 활동이었다. 헬마우스에서 하 소장이 맡은 직책은 CP, 대표콘텐츠 공급자 역할이었다. “사실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면서 계속 우리에게 제기된 질문은 보수냐 진보냐 진영을 명확히 하라는 것이었다. 사실 진영적으로 따지면 딱히 어디에 속한다고 보기는 힘들지 않겠나. 사실은 보수에 가깝지 않을까. 확실히 우리 스스로 평가하기에도 민중당이나 정의당과는 색깔이 다르다. 우리는 기존의 진보·보수 모두 시대적응을 못 하고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코로나 국면에서 초기방역대응에 성공했다고 평가되었던 한국의 의료제도도 독자적인 균형점을 찾아가고 있는데, 영리 의료체계를 주장하는 보수파나 유럽식 주치의 제도를 주장하는 진보파 모두 안 맞는다. 이 논의는 한국식으로 발전시켜야 하는데 모두가 이념논쟁으로 진행하니 답이 안 나오는 것이다.”

80년대생들은 어떻게 ‘의식화’되었을까

기자가 이들의 활동을 주목한 것은 햇수로 2년이 넘었다. 궁금한 것은 이들이 오늘의 문제의식까지 이르게 된 경로다. 86세대가 형성된 1980년대나 포스트 386세대의 1990년대까지 그 경로는 명확해 보였다. 언더서클과 과 학회를 통한 이론학습과 ‘데모참가’와 같은 현장실천이 결합한 공정이었다. 하 소장의 경우 대구에서 지역예술가들과 활동과정이 출발점이었다. “대구에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많았다. 창작하려면 서울에 올라갔다가 꿈도 못 이루고 다 잃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요새는 온라인으로도 얼마든지 활동이나 수익창출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지방에다 회사를 만들었다. 임대료도 싸고 큰돈을 들이지 않고 만들어 활동하는 것이 가능하니까. EBS 공감 같은 데도 나가고 나름 효과가 있었지만, 도저히 채산이 맞지 않은 것이다. 상업적으로 아무리 해보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런 고민을 하다 만난 것이 신대철 선배다. 음원시장 구조에 대한 고민이 서로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만든 것이 바른음원협동조합이라는 창작자 단체였다.

종편 방송작가였던 임경빈 작가는 JTBC의 뉴스룸 팩트체크 작가로 합류한 뒤 2016년 박근혜 탄핵이라는 ‘공화국의 가장 간절한 순간’을 경험했다. 유튜브 헬마우스의 메인간판이 되면서 그는 집중 공격 대상이 되었다. 헬마우스 채널은 ‘청와대와 JTBC가 우파 유튜버를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낸 음모’와 같은 마타도어가 끊임없이 돌았다. 임 작가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제는 90년대생과 86세대를 잇는 중간관리자, 허리세대가 되었지만 우리가 20대 때만 하더라도 청년논객 또는 그 자장 안에 있던 사람들이다. 진중권이나 김규항이 주장하던 B급 좌파의 탐독자이고, 그 ‘키즈(kids)’라고 할 수 있다. 그 키즈들이 20대 중반을 넘어 실무자로 각 현장에 진출했다. 정치현장이든 담론, 노동, 산업현장이든 부딪혀 체득한 것들과 선배들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틀린 경우가 없지 않았지만, 또 한편으로 어느 부분은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아랫세대들은 잘 모르는 이야기일 수는 있지만, 윗세대의 공과를 비교할 수 있었던 세대라는 점에서는 행운일 수도 있다. 이것 또한 우리 세대의 의무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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