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과 표창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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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쯤이었나. 다니던 헬스장의 샤워실 이용이 중단됐다. 상향된 코로나19 방역지침에 따른 조치였다. 번거로웠지만 불편함을 감수할 만했다. 운동을 마치고 걸어서 10분 거리를 후딱 돌아왔다. 땀이 식어 샤워를 하며 몸을 지졌다. 수도꼭지를 왼쪽으로 1㎝만 더 돌리면 평소보다 뜨거운 물이 나왔다.

인터넷 커뮤니티 갈무리

인터넷 커뮤니티 갈무리

얼마 지나지 않아 방역지침이 또 한 번 상향됐다. 수도권 헬스장은 운영이 중단됐다. 목욕탕은 영업중지 대상에서 빠졌다. 갑론을박이 일었다. 영업을 멈춰도 일상에 지장이 없는 목욕탕은 왜 운영을 지속하냐는 취지였다. 목욕탕에서 종종 코로나19 집단감염도 발생했다. 정부가 사정을 설명했다. “현재 수도권에서 제한적이나마 목욕시설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쪽방촌 거주자 등 취약계층이나 현장 노동자에게는 목욕탕이 필수시설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한 선택임.”(2020년 12월 9일 정부 브리핑)

때마침 “복지 담당자가 알려준 (목욕탕 영업중지 안 하는) 이유를 듣고 나니까 머리가 띵했다”는 게시물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였다. 온수가 나오지 않는 가정, 현장 노동자들이 처한 열악한 위생 여건 때문이라는 설명이 붙었다. “저런 분들은 주민센터나 구청에서 목욕탕 쿠폰을 줍니다”, “아, 그들에겐 인권이었구나. 오늘 샤워는 가벼운 맘으로 못 할 듯” 같은 댓글도 달렸다.

취재 현장을 다니면서도 놓친 현실이었다. 뒤늦게 세부통계를 살펴봤다. 정부의 2019년도 주거실태조사를 보면, 조사대상 가구의 99%는 집에 있는 목욕시설에서 온수가 나온다. 0.1%는 온수시설이 없다. 0.9%는 아예 집에 목욕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다. 합치면 1%다. 기초생활수급가구의 온수시설 미비는 전국 평균보다 상황이 심각했다. 기초생활수급가구의 0.5%는 온수시설이 없고, 4.1%는 목욕시설이 없다.

비슷한 시기, 그간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세상을 접했다. 서울 강남에서는 표창장 위조가 흔하다는 사실에 의아했다. 허위 표창장을 돈 몇십만원으로 ‘다들’ 사고판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다. 명망가 집안 사이 자녀 추천서를 써주는 스펙 품앗이 또한 강남에서는 보편적이었다고도 한다. 처음 알게 됐다. 특목고 1세대라고 밝힌 한 금융권 인사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대학 입시에 가짜 자원봉사 확인서를 활용했다고 밝혔다. 특목고에서는 흔한 일이라는 뉘앙스였다. 일부의 일탈이 아니었다니, 그들만의 세상이 있구나 싶었다.

리처드 리브스는 저서 <20 vs 80의 사회>에서 “상위 20%가 중상류층에서 떨어지는 것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수록 중상류층은 기를 쓰고 자신과 자녀의 중상류층 지위를 지키려 할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최근 통계청 통계를 보면 시장소득 기준 상대적 빈곤율은 2018년 19.9%에서 2019년 20.8%로 올랐다. 5명 중 1명은 직접 번 소득만으론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의 중상류층은 집에 목욕시설조차 없는 가난에 발 들이는 게 두려워 표창장을 위조했던 걸까. 아니면 위선으로 포장한 탐욕의 대물림이었을까.

‘꼬다리’는 어떤 이야기나 사건의 실마리를 뜻하는 꼬투리의 방언이다. 10년차 이하 경향신문 기자들이 겪은 일상의 단상을 소개한다. ‘꼬’인 내 마음 ‘다’ 내보이‘리’라는 의미도 담았다.

<김원진 기자 one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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