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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의 새해 소망 “마스크를 벗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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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1일, 색동저고리를 입은 인기스타 펭수가 보신각 제야의 종을 울렸다. 영하 7도를 밑도는 날씨에도 종각역 일대는 10만명이 모여들었다. 시민들은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말했다. “가족들 하는 일 잘 되고 무엇보다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지난 9월 7일 서울 신도림역에서 이동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지난 9월 7일 서울 신도림역에서 이동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하지만 1월이 채 지나기 전 국내에서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나왔다. 1년간 마스크를 쓰고 살았다. 집 밖에 나섰을 때 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쾌하다면 마스크를 깜빡한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일상이 됐다. 어느 때보다 ‘건강 조심하세요’라는 인사를 많이 한 해였다. 나의 건강이 곧 당신의 건강이었다. 코로나19 속에서 수많은 인물이 언론에 오르내렸지만, 마스크를 쓰고 올 한 해를 버텨낸 우리 모두가 ‘올해의 인물’이다.

코로나19 확산 초반, 유일한 백신은 ‘마스크’였다. 마스크는 권력이었다. 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들었다. 서울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황해평씨(52)는 마스크 대란의 한가운데 있었다. 공적 마스크 제도를 시작한 초봄의 어느 일요일, 자신의 약국 앞에 시민 100여명이 줄지어 있던 장면을 잊지 못한다.

2015년 메르스 사태 때도 한달간 마스크를 쓰고 손님을 맞은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마스크를 쓰고도 비말을 차단하는 아크릴판까지 설치했다. 공적 마스크 도입 전 약국은 전쟁터였다. 마음이 급한 손님들은 “보이는 건 다 달라”며 마스크와 손소독제를 휩쓸어갔다. “왜 저 사람만 많이 주냐”며 욕도 많이 먹었다. 정작 마스크가 더 필요할 것 같은 노인과 장애인은 한발 늦게 약국을 찾았다.

교사 이유리씨(가명)의 결혼을 축하하며 제자들이 보낸 영상 캡처

교사 이유리씨(가명)의 결혼을 축하하며 제자들이 보낸 영상 캡처

늦게라도 공적 마스크 제도가 시작돼 질서를 잡았다. 지금은 공급이 원활해 약국 앞 대기줄은 사진으로만 남았다. 황씨는 “공적 마스크가 시민들에게도 약사들에게도 큰 경험이었다. 방역체계의 핵심을 연습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동네 곳곳의 약사를 포함한 보건의료인들이 방역의 최일선에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것 같아요.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말은 쉽지만 비상상황에서 이런 거구나, 실감을 한 거죠.”

그럼에도 ‘시작’이 있었다

일상은 더디게나마 돌아갔다. 의료진과 방역당국, 지자체 공무원들이 땀 흘린 덕분이다. 지난 3월, 신임 간호장교 75명이 4년의 교육을 마치고 소위 계급장을 달자마자 대구로 향하는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 간호장교는 40여일간의 파견 임무를 마친 뒤 인터뷰에서 “사태가 길어지는 만큼 의료진과 의료진보다 더 힘들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하는 분들의 희생도 점점 길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코로나19 속에서도 새 출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구보다 결혼식을 앞둔 예비부부들의 마음고생이 컸다. 고교 교사 이유리씨(가명·28)는 지난 9월 충북 청주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2차 유행이 한창일 때다. 지난해 10월 날을 잡을 때만 해도 상상 못 한 일이다. 이씨는 동료교사의 결혼식에서 제자들이 축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흐뭇해한 기억이 있다. 하지만 축가는커녕 자신이 담임을 맡은 학생들을 초대할 수도 없었다. 학생들은 대신 축하영상을 보내왔다. 축가만큼 멋진 선물이었다.

지난 12월 3일 서울 종로구 덕성여자고등학교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마친 수험생들이 나오고 있다./ 연수구청소년수련관 방과후아카데미 제공

지난 12월 3일 서울 종로구 덕성여자고등학교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마친 수험생들이 나오고 있다./ 연수구청소년수련관 방과후아카데미 제공

웨딩홀 안에는 손에 스티커를 붙인 50명만 들어갈 수 있었다. 뷔페로 제공되던 식사는 한상차림으로 바뀌었다. 나머지 하객은 기존의 식사 공간에서 영상으로 식을 봤다. 단체사진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은 주인공 둘뿐이었다. 스위스로 신혼여행을 떠날 계획은 일찌감치 접었다. 인적 드문 숙소에 머물며 조촐하게 국내여행을 했다. 이씨는 “나중에 해외여행이 가능해질 때, 회사에 ‘나는 코로나 시기에 결혼했다’고 양해를 구하면 다들 이해해주지 않을까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고 했다.

올해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에게 새내기의 삶은 없었다. 20학번 민해영씨는 재수를 한 만큼 대학에서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캠퍼스 잔디 위에 돗자리를 펴고 동기들과 도란도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현실은 1년 내내 온라인 강의였다. 민씨는 “학교에 자주 안 가니 지리를 모른다. 2학기 중간고사 대면시험을 보러갈 때는 길을 잘못 들어서 경비원에게 물어물어 찾아갈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20학번 정대겸씨의 과 동기는 60명이지만 얼굴과 이름을 아는 동기는 10명뿐이다. 학기 내내 기숙사에 살던 그는 기말고사 기간 본가에 내려왔다. 모든 시험이 일정 시간을 주고 논술 답안이나 리포트를 작성해 온라인으로 제출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수업 ‘땡땡이’를 치는 로망은 언제쯤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다. 축구동아리도 가입했지만 축구를 할 기회는 찔끔찔끔 주어졌다. “2020년을 훨씬 더 재밌게 보낼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워요. 그런데 이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요. 이런 경험을 하는 신입생이 또 어디 있겠어요.(웃음)”

인천 연수구청소년수련관 방과후아카데미 관계자들이 코로나19 긴급돌봄 물품을 준비한 뒤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인천 연수구청소년수련관 방과후아카데미 관계자들이 코로나19 긴급돌봄 물품을 준비한 뒤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시작이 있듯 끝도 있었다. 12월 17일 기준 코로나19 사망자는 634명이다. 사망자들은 정부 방침에 따라 ‘선 화장, 후 장례’를 거쳤다. 25년차 장례지도사이자 부산의 대학병원 장례식장에서 일하는 오승환씨(47)는 1년 내내 긴장 속에서 죽음과 마주했다. 유족과 조문객이 방역지침을 준수하도록 안내하는 일도 그의 몫이다. 현장에서 애도와 추모 방식의 변화를 느낀다. 그는 “우리는 조상들에게 제사음식을 올리는 문화이다 보니 조문 오는 손님들에게도 음식을 제공하는데, 앞으로는 일본처럼 다과를 내는 문화로 바뀌지 않을까 한다”며 “식사 대신 답례품을 주는 장례도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1년이 증발했다

하늘길이 잠기니 항공·여행업은 고사 직전이다. 거리 두기가 지속되면서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고통도 가중됐다. ‘고객님들의 안전을 위해 매일 소독하고 있습니다.’ 가게 입구에 붙었던 안내 문구는 ‘그동안 찾아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세요’로 바뀌고 있다. 한국신용데이터에 따르면 12월 둘째 주 전국 소상공인의 평균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의 71% 수준으로 떨어졌다. 음식점업과 스포츠·레저업, 여행업의 매출은 거의 반토막이 났다.

이맘때면 유럽의 관광지는 크리스마스 시즌을 알리는 장식물과 관광객들로 붐빈다. 김상철씨(가명)도 지난 7년간 그 현장에 있었다. 2013년 서유럽으로 건너가 한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한 여행사를 운영했다. 하지만 그는 코로나19로 사업을 접고 귀국했다. 지난 2월 말 가이드 일정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예약은 줄줄이 취소됐다. 3월 중순 유럽 전역에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락다운’ 조치가 내려졌다. 두달 가까이 집에만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장 보러 가는 게 외출의 전부였다.

12월 9일 서울 남대문시장 크리스마스용품 판매상점에서 상인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 연합뉴스

12월 9일 서울 남대문시장 크리스마스용품 판매상점에서 상인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 연합뉴스

6월에는 내년 초 다시 사람들이 올 수도 있겠다고 기대했다. 7월이 넘어가면서는 2년 이내엔 어렵겠다고 느꼈다. 8월 귀국을 결심했다. “꼼짝없이 집에만 갇힌 게 몇달이고, 사실상 사회적으로는 숨만 쉬고 산 게 1년이에요. 전시상황을 겪은 거나 마찬가지죠. 시간이 1년 증발한 것 같아요.”

재난은 약한 고리를 파고들었다. 요양병원이나 콜센터처럼 밀폐된 곳에서 확진자가 무더기로 나왔다. 아파도 쉴 수 없는 노동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각종 사회복지 서비스가 멈추면서 도움이 필요한 가정들도 돌봄 부담을 온전히 떠안았다. 기관이 문을 닫더라도 ‘긴급돌봄’을 지속한 이유다.

소서영씨(29)가 일하는 청소년 방과후아카데미에서도 긴급돌봄에 나섰다. 아이들이 혼자서도 밥을 챙겨먹을 수 있도록 간편식과 손수 만든 학습자료를 보냈다. 밥은 먹었는지, 숙제는 어디까지 했는지 전화로 안부를 물었다. 체험활동을 못해 지루해할 아이들에게 상추·콩나물 키우기 키트, 파스타·떡볶이 만들기 재료도 전달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기른 콩나물을 라면에 넣어먹었다며 사진을 보내왔다.

하지만 한 학생 어머니의 문자메시지는 다른 고민을 던졌다. “아이한테 이런저런 물품을 보내주셔서 감사한데 자신이 새벽 일찍 일하러 나가 아이가 학습지 푸는 것도, 요리하는 것도 봐주지 못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니 아이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고요. 저희가 보내는 물품들이 오히려 아이에게 소외감을 줄 수 있다는 말씀이셨죠.” 코로나19가 불러온 돌봄의 공백이 너무 컸다.

10XXX번. 김지호씨(28)는 코로나19 1만번대 확진자였다. 할머니 장례식을 찾아준 친구들에게 감사를 전하려 마련한 식사 자리에서 친구에게 감염됐다. 5월 10일부터 50일간 입원했다. 격리 해제된 뒤 회사는 “다들 코로나에 옮을까 두려워한다”며 3주간 재택근무를 해달라고 했다. 2주쯤 지나자 사측은 “프리랜서로 자유롭게 일해보는 게 어떠냐”며 사직을 권했다. 그렇게 김씨는 4년 다닌 회사를 그만뒀다. 헬스장에서도 에둘러 이용을 거절당했다. 사람들은 “너랑 있으면 코로나 걸리는 것 아니냐”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몸은 멀쩡했지만 정신적 후유증이 컸다. 김씨는 입원 기간 끄적인 글을 모아 <코로나에 걸려버렸다>라는 책을 냈다. 그는 “코로나19 완치자들을 배제하고 밀어내는 것이 보이지 않는 폭력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우리가 서로 마스크 잘 써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에 걸린 사람들이 사회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하지 않을까요.”

산타가 부러워

“그냥 바깥공기를 ‘하하’ 마시고 싶어요. 산책로같이 사람 많은 곳에서도 시원한 공기를 눈치 보지 않고 기분 좋게 들이마시고 싶어요.” 소서영씨의 바람은 소박했다. 코로나19가 공기처럼 당연한 일상을 앗아갔다. 비대면 사회니 뉴노멀이니 갖가지 전망이 나오지만 일반 시민들은 극장에서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보고, 공원을 마음껏 누비고, 카페에서도 마스크 벗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때가 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가장 큰 소망은 ‘여행’이다. 착륙하지 않고 상공을 즐기는 ‘무착륙 관광비행’에 승객이 몰리는가 하면, 베테랑 가이드가 실시간으로 현지에서 여행지를 소개하는 ‘랜선여행’ 상품이 나오는 것만 봐도 얼마나 여행에 목말라하는지 알 수 있다. 김지호씨는 “사람 많은 곳에 가지 못하다 보니 오히려 홍콩·도쿄같이 도시다운 곳에 가 사람에게 기운을 얻고 싶다”고 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산타는 내년에나 온다’는 말이 돌았다. 산타도 입국 후 2주간 자가격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최근 세계보건기구(WHO) 관계자는 “산타가 나이가 많아 고위험군이긴 하지만 코로나19 면역을 갖추고 있어 선물을 전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미 각국 정상들이 산타가 영공에 진입할 수 있도록 검역 조치를 완화했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산타는 물론 어린이들도 거리 두기를 엄격히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산타처럼 면역이 생겨 하루빨리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기를. 마스크를 쓴 우리 모두의 새해 소망이다.

<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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