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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판에 빛바랜 ‘공정경제 3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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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개혁 분야에서 문재인 정부 첫 입법 성과지만 핵심 내용 후퇴

국회는 지난 9일 본회의를 열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공수처법) 개정안을 비롯한 110여건의 법률안 및 결의안을 가결 처리했다. 그 안에는 ‘공정경제 3법’도 포함됐다.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 개정안,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 전부 개정안, 금융복합기업집단의 감독에 관한 법률안(금융그룹감독법) 제정안이다.

문재인 정부의 개혁과제 중 가장 지지부진했던 재벌개혁 분야에서의 첫 입법 성과이다. 하지만 법안의 핵심 내용이 막판에 후퇴하면서 한계를 남겼다.

12월 9일 국회 본회의에서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있다. / 연합뉴스

12월 9일 국회 본회의에서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있다. / 연합뉴스

‘3%룰’ 완화, 다중대표소송 요건 강화

당초 정부가 제안한 상법 개정안은 감사위원 최소 1명을 다른 이사와 분리해 선임하도록 하면서, 최대주주의 경우 특수관계인이 보유한 주식과 합산해 3% 이내로 의결권을 제한했다. 기업 이사회가 불법행위와 일감 몰아주기 등 대주주의 전횡을 감시·견제하지 못하고 ‘거수기’ 역할에 그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최소한 1명이라도 독립적인 감사위원 선임이 가능하게 하자는 취지였다. ‘오너 리스크’로 기업이 손해를 입고, 해외투자 시장에서 저평가받는 요인을 없애는 장점도 기대됐다.

재계는 공정경제 3법 중에서도 이 조항에 특히 거세게 반발했다. 최대주주의 의결권을 제약하고, 외국 투기자본이 추천한 감사위원 후보가 이사회를 장악해 경영권을 탈취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감사에 의한 핵심기술 유출 우려도 제기했다. 하지만 이 조항은 1962년 상법부터 존재하던 감사 선임 시 대주주 3% 의결권 제한을 이명박 정부가 사문화시키기 전으로 일부 복원한 것에 불과하다. 재계가 1주1표 원칙을 들지만 1%도 안 되는 지분으로 자산이 수백조에 달하는 그룹을 지배하는 것은 정당하냐는 반론도 제기된다.

감사위원 분리선출제의 원안 통과는 그만큼 재벌개혁의 진정성을 가늠할 시금석이었다. 그러나 국회를 통과한 안은 재계의 요구를 반영해 사외이사인 감사위원을 선출할 때 지분 합산 요건을 적용하지 않고 ‘개별 3%룰’을 적용하기로 했다. 최대주주는 특수관계인인 계열사 지분을 활용해 자신들이 원하는 감사위원을 앉힐 수 있게 됐다. 이창민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경제개혁연구소 부소장)는 “개정안의 기본 취지는 지배주주가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을 뽑아서 그 사람이 지배주주를 감시하게 하는 ‘자기감독’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었다면서 “합산해서 3%가 아니라 개별 3%로 하면 대주주의 의결권 제한 효과가 상당 부분 사라져 한계가 명확하다”고 말했다. 김남근 변호사(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실행위원)는 “앞으로 감사위원이 될 이사를 모두 사외이사로 선출할 텐데 대부분의 사외이사가 대주주를 도와주는 자문 변호사나 회계사라는 점에서 결국 우회적인 탈출로를 마련한 셈”이라고 말했다.

다중대표소송의 제기 요건도 상장회사 지분율 0.01%에서 0.5%로 정부안보다 대폭 강화됐다. 삼성전자 자회사 이사를 상대로 다중대표소송을 제기하려면 2조원 이상 주식을 6개월 이상 보유해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자회사가 대주주를 부당하게 지원해도 대부분의 자회사는 비상장사로 소수 주주가 없다. 이 경우 모회사의 주주가 자회사에 손해를 끼친 자회사 이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게 한 게 다중대표소송제이다. 이창민 교수는 “상장회사의 지분은 0.01%로도 어마어마하게 큰데 그걸 50배 이상 늘린 것이라 소 제기 자체가 힘들어 결국 제도가 유명무실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개혁 속에 숨겨진 개악

집중투표제 의무화가 빠진 것도 한계로 지적된다. 집중투표제는 기업이 이사를 선출할 때 1주당 1의결권이 아니라 선출하는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주는 제도다. 소수 주주가 특정 후보에게 의결권을 몰아줄 수 있어 이사회 구성에서 지배주주의 영향력을 줄일 수 있다. 현재 상법에도 있지만, 정관으로 배제할 수 있어 실효성이 없다. 김진방 인하대 교수는 “집중투표제 누락과 3%룰 후퇴로 일반 주주가 신임하는 이사의 선임이 불가능하게 됐다”면서 “경제개혁이 완전히 빛이 바랬다”고 평가했다.

공정거래법 개정으로 사익편취 규제 대상 기업의 범위를 확대하고, 법원에 자료제출명령권을 부여한 것은 진전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기업 지주회사가 기업형 벤처캐피탈(CVC)을 보유하도록 허용한 것은 개악이라는 우려가 있다. 지주회사 제도를 무력화하고, 총수 일가의 새로운 사익편취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경실련 정책위원장)는 “CVC가 펀드를 조성할 때 손자회사의 출자를 받으면 순환출자를 허용하는 것과 같아 지주사를 만든 기본 취지를 어기게 된다”면서 “계열사와 외부 자금으로 투자를 하면 위험은 이들이 지고, 성과가 날 경우 총수 일가가 ‘채리피킹’하는 사익편취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투자금을 회수하면서 총수 일가에는 지분을 팔지 못하도록 규정했지만, 중간에 페이퍼컴퍼니를 거치면 가능해 재벌의 부의 세습이 벤처를 통해서 이뤄지는 신종 사익 편취가 일어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민사회는 향후 경제개혁 운동의 초점을 지배구조 개혁에 두고 있다. 순환출자 상태일 때 재벌의 평균 계열사가 15개였다면 지주회사 체제로 바뀐 지금은 30개가 넘는다. 김남근 변호사는 “경제력 집중을 막기 위해 손자회사를 금지하고 자회사로 보유하게 하고, 자회사 지분의 의무보유 비율도 더 높일 필요가 있다”면서 “집중투표제와 노동이사제를 도입해 대주주 견제·감시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창민 교수는 “공정경제 3법 논의 과정에서 총수 일가가 제일 껄끄러워하는 게 이사회에 독립적인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이라는 점이 드러났다”면서 “향후 사외이사의 독립성을 높이는 추가 제도를 고안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대한항공과 삼성물산, 효성 등 지배구조 문제를 지적받는 기업에 대해선 2·3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더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 변호사는 “상법 개정보다 오히려 국민연금이 공익이사를 한두명 배치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며 “지배구조에 문제가 있는 회사에 한해 비공개 중점 관리하도록 하고 그래도 개선이 없을 경우 올해 말 명단을 공개하도록 했는데 여전히 소식이 없다”고 말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 등 집단적인 소비자 피해가 발생했을 경우 구제와 재발 방지를 위해 집단소송제 도입도 필요하다. 김진방 교수는 “이번에 논의조차 되지 않았지만 증권 관련 집단소송에 한정된 집단소송제를 전면 내지 대폭 확대하면서 소송 절차에서도 증거개시제도(기업 내부 증거를 재판에 제출하는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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