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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만 흐르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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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정기국회 처리 공언 못 지켜… 논의도 없이 임시회기로 넘겨

영하 11도의 한파를 기록한 지난 12월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관 앞에는 천막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은 이곳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요구하며 노숙 농성 중이다. 지난 11일부터는 무기한 단식에도 들어갔다. 김 이사장은 추운 날씨 속 노숙 단식으로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든 버티겠다”며 “연내 법안 통과가 꼭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 16일 단식 6일째를 맞은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 / 김찬호 기자

지난 16일 단식 6일째를 맞은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 / 김찬호 기자

김 이사장이 바라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산업재해로 인한 노동자의 죽음을 막기 위한 것이다. 국회 176석을 확보한 더불어민주당은 이 법의 정기국회 내 통과를 공언했다. 하지만 법안은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임시회기 내 처리로 목표가 변경됐다. 법 제정의 필요성에는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시간만 흐르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비슷한 듯 다른 법안들

중대재해를 일으킨 기업을 처벌하는 내용의 법안은 12월 기준 총 5개가 발의됐다. 공통점은 사업주 및 경영책임자가 유해·위험방지의무를 위반해 사람이 사망하거나 다치면 형사처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청’을 준 경우에도 원청 사업주 및 경영책임자 등은 공동 책임을 진다.

법안들은 각각 세부적인 특징이 있다. 정의당 강은미 의원 안은 중대재해가 발생한 경우 사업주가 손해액의 3배 이상 10배 이하의 범위에서 배상 책임을 진다. 이와 관련해 분쟁이 발생하면 입증책임은 사업주 등이 부담한다. ‘징벌적 손해배상책임’이다. 또 사업장의 유해·위험방지 조치가 제대로 이뤄졌는지를 감독하는 공무원도 사고 발생 시 징역 또는 벌금에 처할 수 있다. 국민의힘 임이자 의원 안은 3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 기업에는 100억원 이하의 과징금이 부과된다.

민주당 법안은 총 3건이다. 기본이 되는 박주민 의원안은 일정 요건을 갖추면 사고는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가 위험방지의무를 위반해 발생한 것으로 인과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 이탄희 의원안은 박주민 의원안을 기반으로 양형이 공정하게 이뤄질 수 있게 절차를 정비했다.

반면 지난 12월 14일 발의된 박범계 의원 안은 앞선 법안들을 보완하는 성격이다. 가장 큰 쟁점인 사고 발생에 대한 인과관계 추정은 ‘무죄 추정의 원칙’과 충돌한다는 이유로 삭제했다. 인과관계 추정은 사고에 대한 ‘입증책임’을 원청이나 경영책임자에 부과하고 있는데 이 역시 함께 삭제했다. 또 사업주의 안전 또는 보건 관련 의무의 구체적인 종류와 범위는 대통령령이 정하게 했다.

“과잉·졸속 입법” vs “10년 넘게 준비”

경영계와 노동계 모두 법안의 취지에는 찬성한다. 다만 법안 내용을 두고는 의견이 다르다. 경영계는 법안들이 ‘예방’이 아닌 ‘처벌’만 규정하고 있어 ‘실효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또 민주당 법안의 경우 발의된 지 이제 한달 정도가 지난 만큼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정진우 서울과기대 교수는 “2년 전에도 산업안전보건법을 졸속으로 개정해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을 만들더니 중대재해기업처벌법도 똑같이 처리하고 있다”며 “국회는 반성부터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설치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촉구 농성 천막 / 김찬호 기자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설치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촉구 농성 천막 / 김찬호 기자

정 교수는 발의된 법안들의 문제를 ‘비현실성’, ‘예측의 어려움’, ‘과잉처벌’ 세가지로 지적한다. 그는 “어떤 기업도 준수하기 어려운 수준의 의무를 주면 지키지 말라는 것과 같다”며 “법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예측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치권이 엄벌만이 정의인 것처럼 과잉입법을 하고 사고예방이라는 본질은 잊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업들의 입장도 비슷하다. 양옥석 중소기업중앙회 인력정책실장은 “발의된 법안들에 따르면 사업주에게 부과되는 의무는 1222개 정도고, 이중 처벌과 관련된 것만 673개다”며 “기업이 이 모든 의무를 완벽히 파악하고 지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또 “산재사고 원인은 복합적인데 그 책임은 사업주에게만 돌아간다”며 “결국 사고는 예방하지 못하고 사업주는 형사처벌을 운에 맡기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노동계는 ‘처벌’이 곧 ‘예방’이라는 입장이다. 정우준 노동건강연대 사무국장은 “경영계가 사전 예방조치를 강조하려면 구체적인 개선책부터 말하라”며 “그동안 처벌을 제대로 안 했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시민사회단체는 2000년대 초반부터 중대재해기업처벌법과 유사한 형태의 법안들을 준비해왔다”며 “강은미·박주민 의원 등이 발의한 법안에도 일부 반영된 만큼 졸속 입법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동계 역시 법안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민주당 법안에는 ‘개인사업자 또는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해서는 4년의 유예기간’이 포함돼 있다.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실장은 “유예 대상이 되는 적용 범위가 너무 넓고 기간도 길어 문제가 있다”며 “유예를 하더라도 소규모 사업장이 속해 있는 원청에 대한 처벌은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범계 의원 안에서 삭제된 ‘인과관계 추정’ 규정도 문제다. 최 실장은 “그동안 경영책임자가 처벌되지 못한 것은 인과관계를 추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며 “이 조항을 삭제하면 법을 만들어 놓고 처벌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법안이 빨리 통과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때문에 법안을 누더기로 만들면 안 된다”고 덧붙였다.

결국 문제는 본회의에 올라갈 최종 법안의 내용이다. 어떤 내용이 들어가고 빠지느냐에 따라 노동계와 경영계 양측 모두의 반발할 수 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두고 이견도 많고 처리도 쉽지 않은 이유다. 실제로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13일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임시국회 회기 안에 통과시키겠다”면서도 각종 쟁점에 대해서는 “상임위에서 잘 조정되기를 바란다”고 신중한 입장을 밝혔다. 의원들의 고민이 깊어지는 사이 국회 앞 단식농성은 길어지고 있다. 그리고 결정이 하루씩 늦춰질 때마다 매일 7명의 노동자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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