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이야기

20·30대 파고드는 다단계의 검은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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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지인 확장에 더해 SNS 적극 활용… 자기계발과의 결합은 여전

텅 빈 카페에 손님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요즘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주문을 마치고 카페 2층에 자리 잡았다. 테이블 4개를 붙이자 카페가 강연장으로 변했다. 다닥다닥 붙어앉은 수강생들은 하나둘씩 노트를 꺼냈다.

1993년 2월 서울 한양대 캠퍼스에 다단계 판매의 대학가 확산을 비판하는 대자보가 붙었다. / 박민규 기자

1993년 2월 서울 한양대 캠퍼스에 다단계 판매의 대학가 확산을 비판하는 대자보가 붙었다. / 박민규 기자

“노동소득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을 보고, 저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생각하실 줄 알아야 해요.” 강사처럼 보이는 A씨가 말했다. 발성이 좋아 목소리가 1층까지 퍼졌다. “영업사원이라고 생각할 거면, 그럴 바에는 안 하는 게 나아요.”

“우리 다단계잖아.” 누군가 다단계 판매에 발 들인 사실을 거리낌 없이 말했다. 주위 시선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지난 10월 중순, 서울 강남구 선릉역 인근 카페에는 20대 17명이 모였다. 선릉역에는 손에 꼽히는 다단계 업체들이 모여 있다. 테헤란로 일대 카페는 ‘다단계 영업 금지’를 써놓기도 한다. 결혼식에 다녀온 듯한 정장을 입은 사람도 몇몇 보였다. 마스크를 썼다 벗었다를 반복하는 이들이 눈에 띄었다.

강의의 요지는 간단명료했다. “7년차에 월 1000만원 대박을 할 수 있어요.” 노력하며 포기하지 않고 네트워크를 쌓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설파했다. 강사는 “우리 20대잖아요?”라며 젊음을 치켜세웠다. 그는 “열정과 패기가 있고 진짜 얼굴도 예뻐, 뭐가 문제야”, “100% 믿으셔야 해요. 나의 네트워크가 언젠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이라며 동기부여를 해줬다. ‘사업’ 초기 고생을 합리화하기 위한 “기초공사를 하는 굴착기 단계”, “파이프라인 완공했을 때, 내가 원하는 소득이 수도꼭지에서 콸콸콸 나오는 거죠”라는 비유도 등장했다.

[표지 이야기]20·30대 파고드는 다단계의 검은 손

코로나19도 ‘다단계’ 열정을 꺾지 못했다. 이날 강의는 2시간가량 진행됐다. 보이지 않는 곳에선 비대면 강의도 진행 중이다. B씨는 A씨가 활동하는 다단계 업체에 3개월 몸담았다 나왔다. B씨는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성공할 수 있다고 세뇌하는 강의를 10번 넘게 들어야 한다. 코로나19 확산 이후에는 ‘줌’으로 듣기도 했다”라고 했다.

20·30대를 노리는 다단계는 오랜 사회문제다. 1990년대 대학 캠퍼스에는 다단계 판매의 위험성을 알리는 대자보가 붙었다. 2011년 거마(서울 거여·마천) 지역에서 합숙하며 운영하던 대학생 다단계가 대규모 적발됐다. 서울시는 2018년에도 좋은 취직자리로 유혹해 불법 다단계 판매를 한 업체를 적발했다.


2020년, 20·30대를 타깃으로 한 다단계는 어떤 모습일까.

대규모 대학생 다단계 업체는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 공정거래위원회 등에 따르면 합숙 형태의 대학생 다단계 업체는 명맥만 유지한다. 2016년에는 연매출 수십억원에 달하는 대학생 다단계 업체 6곳이 존재했다. 서울시나 경찰은 현재 연매출 50억원 규모의 대학생 다단계 업체 2곳만 부산 일대에 남은 것으로 추정한다. 사라진 조직의 일부는 보험이나 금융업으로 업종 변경을 했다. 다단계 판매원 대신 보험설계회사를 양성하고 있다고 한다.

업계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피해신고는 감소했다. 한국소비자원에 접수된 20대 다단계 소비상담은 2018년 101건에서 2019년 79건, 올해(11월 기준) 42건으로 줄어드는 추세다. 30대 상담 건수도 같은 기간 215건→165건→113건으로 감소했다. 한국소비자원 관계자는 “다단계 판매 모임을 규제한 코로나19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국내 유력 다단계 업체 누리집 화면. 소수의 성공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 누리집 갈무리

국내 유력 다단계 업체 누리집 화면. 소수의 성공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 누리집 갈무리

SNS로 유혹

최근 20·30대 대상 다단계는 양상이 달라졌다. 다단계 확장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활발히 이뤄진다. 선릉역 카페에서 강의했던 A씨도 인스타그램에서 활동한다. A씨는 30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인스타그램 팔로워만 1만5000명이 넘는다. 게시물마다 ‘하트(게시물이 좋다는 의미의 표시)’가 500개 내외로 달린다. A씨는 스스로 크리에이터(1인 미디어 콘텐츠 제작자를 지칭)를 자처한다.

A씨의 게시물을 보면 드넓은 풀장과 맛집, 외제차, 명품이 자주 등장한다. 교외 운치 있는 곳에서 찍은 사진도 많다. 2019년 게시물에는 외국 관광지 사진도 눈에 띈다. 게시물 사이사이 다단계 제품이 보인다. 맛집과 여행지가 절반, 다단계 업체의 제품이 절반이다. 다단계 물건을 팔면 충분한 소득을 얻을 수 있고, 화려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SNS의 다단계 업계 종사자들은 주로 건강보조식품과 화장품을 판다. 해시태그에도 다단계 업체에서는 파는 제품명이 여러개 달렸다.

이들의 접근 방법은 두가지로 나뉜다. 전통적인 지인 확장에 더해 SNS를 활용한다.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유명인)를 포섭한다. 주로 인스타그램 다이렉트 메시지(DM)를 보내 “(다단계 업체) 제품 리뷰를 써주면 돈을 주겠다”고 접근한다. ‘다단계 사절’ 문구를 메인화면에 써놓은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들도 있다.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4만명이 넘는 C씨는 “한때는 하루에 3~4번씩 다단계 업체 제품 리뷰를 써달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처음에는 멋도 모르고 응하려 했더니, 다단계 가입을 권유했다. 이후 다단계 관련 메시지는 다 무시한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SNS에서 활동하는 다단계 판매자가 표시광고법이나 전자상거래법 위반으로 경쟁 다단계 판매자를 공정위에 신고하기도 한다. 공정위 관계자는 “제품 효과를 SNS에 허위·과장해 홍보했다며 경쟁 다단계 판매자를 신고하는 사례가 들어오고 있다. 판매자들 사이 경쟁이 붙어 견제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여전히 불안정 ‘노동’ 공략

다단계는 약한 고리를 공략한다. 다단계 업체는 예나 지금이나 ‘불안정한 노동’을 노린다.

2007년 8월 출간된 <88만원 세대>는 다단계 시장을 한국 경제조직의 위계에서 가장 낮은 곳이라고 비유했다. 저자들(박권일·우석훈)은 “아무런 진입 장벽 없이 20대를 환영하고 무료로 강의도 시켜주고, 집단 합숙도 시켜주는 경제조직은 불법 다단계밖에 없다”고도 했다. <88만원 세대>의 설명을 따라가면, 20·30대 취업시장이 좋지 않을수록 20·30대는 다단계 시장에 유입할 가능성이 크다.

경찰이 2011년 ‘거마대학생’ 다단계 업체를 대규모 적발했을 때,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 대학생이 대다수였다. 취업이 안 돼 수도권 외 지역에서 올라온 학생들도 많았다. 당시 경찰의 중간조사 결과, 피해자 115명 중 85%가량이 20대 초반 수도권 외 지역 대상 출신이었다. 당시 경찰 수사팀 관계자는 “서울 상위권 대학 학생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피해자 대부분 경제 여력이 좋지 않았다”며 “(수도권 밖) 지역 대학에서 올라와 부모에게 대학 등록금이나 생활비를 받는 학생들이 제법 보였다”고 말했다.

정부 용역 보고서에서도 다단계의 주요 타깃은 대학생과 사회 취약계층임이 드러난다. 공정거래위원회의 2016년 연구용역보고서 ‘다단계 판매 분야 실태조사를 통한 향후 법 집행 및 제도 개선 방향 연구’는 2014년 1월 1일에서 2016년 9월 23일 사이 보도된 1804건을 분석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다단계 피해·종사자 중에서는 ‘취약계층 및 대학생’ 키워드의 빈도수가 3425회로 가장 많았다.

최근 20·30대의 상당수도 불안정한 노동을 벗어나기 위해 다단계 업계에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A씨가 속한 다단계 업체 회원들의 개인 SNS에 올라온 소개글 37개를 보니, 소득이 높지 않고 고용이 불안정한 중소기업에 재직한 이들(17명)이 많았다. 사회복지사나 간호사 출신도 있었다. 불안정한 비정규직·계약직(7명)도 적지 않았다. 출산·육아에 따른 경력단절로 다단계 시장에 진입한 여성들(10명)도 있었다. 소개글에는 “비전이 없다”, “언제 돈을 모을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담겼다. 대기업을 다니다 관뒀다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은 1명에 불과했다.

지난 6월 21일 오후 대전시 중구 오류동 한 다단계 판매업체에서 중구청 관계자가 방역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6월 21일 오후 대전시 중구 오류동 한 다단계 판매업체에서 중구청 관계자가 방역하고 있다. / 연합뉴스

소개글은 모두 유사한 논리 구조를 취한다. ① 불안정한 소득으로 지금 같은 삶은 살 수 없다 → ② 매해 해외여행을 갈 정도의 소득은 벌고 싶다, 혹은 향후 부모님과 나의 노후까지 책임질 정도의 소득을 벌겠다 → ③ 네트워크를 확장해 ‘큰돈’을 ‘가만히 앉아서’ 벌겠다는 포부로 이어진다.

이들에겐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으다의 줄임말)’ 투자는 선택지가 되지 않는다. 소득이 넉넉지 않다 보니, 대출로 ‘영끌’을 해 부동산이나 주식을 사들이기도 쉽지 않다. 영끌도 저금리로 거액의 주택담보대출을 받을 수 있거나 마이너스 통장이라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기존 소득이 있어야 가능하다. 결국 적은 노동소득, 불안정한 노동 여건을 벗어나 소득을 늘리기 위해 다단계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현실은 녹록지 않다. 공정위가 지난 7월 발표한 ‘2019년 다단계 판매업체 주요 정보 공개’를 보면, 다단계 판매 후원 수당을 받은 상위 1% 판매원은 연평균 6410만원을 벌었다. 나머지 99%의 연평균 1인당 수익은 53만원이었다.

‘자기계발서’는 늘 인기

20·30대 다단계 업계 종사자들이 SNS에 올린 자기소개의 또 다른 공통점은 ‘자기계발’이다. 자기소개에는 자기계발 서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구가 담겼다. 이들의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에는 ‘내 인생의 주도권’, ‘1인 기업’, ‘젊음의 비밀’, ‘플랫폼 비즈니스’, ‘열정’, ‘디지털 노마드 라이프’, ‘자유롭고 주도적인 삶’ 같은 문장이 여럿 보인다.

자기계발서를 분석한 책 <거대한 사기극>(2013)은 “원래 자기계발 상품의 적극적인 소비자는 영업인”이라고 했다. 다단계 업계 종사자는 스스로 최고경영자(CEO)나 1인 사업가라 부르지만 현실은 영업사원에 가깝다. “이들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고도의 자극(동기부여)과 기술(관계형성), 그리고 확신(자기최면)”이라는 대목도 나온다. 고도의 자극, 기술, 확신은 다단계 판매원이 갖춰야 할 덕목이기도 하다.

다단계와 자기계발의 결합은 최근의 현상은 아니다. 한국 다단계 업체는 자기계발 시장의 확대와 궤를 같이 해왔다. 1990년 외국계 다단계 업체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자기계발서 시장도 커졌다. 다단계 업체 종사자들의 도서 구입이 자기계발서 매출의 상당수를 차지한다는 분석도 있다.

2010년 전후로 자기계발 비판 담론이 늘어났지만, 한때 자기계발 시장은 주춤했다. 교보문고 자기계발 서적 출간·판매 통계를 보면, 2014년과 2015년은 전년 대비 매출 신장률이 각각 -17.2%, -16%를 기록했다. 2014년과 2015년 출간 종수도 각각 1200권과 1220권으로 최근 10년 사이 가장 적었다.

자기계발은 20·30대 다단계 영역에선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다단계 업계 종사자 SNS 게시물에는 주기적으로 자기계발 서적을 읽는 모습이 올라온다. 형광펜으로 밑줄 쳐가며 책 읽는 사진도 보인다. <다시 리더를 생각한다>, <운, 준비하는 미래>, <더 해빙> 같은 책이 수시로 업데이트된다. “하루종일 뼈 빠지게 일하고, 입에 풀칠하는 고된 삶. 근근이 살다가 죽으면, 모든 것이 그림의 떡”이라며 자기계발서 내용을 게시물에서 소개하기도 한다. 자기계발 서적을 읽는 독서모임도 인기를 끈다. 코로나19 확산에도 비대면 독서토론을 하는 다단계 모임도 열린다. 20·30대가 독서모임의 주축이라고 한다.

“일종의 막장에 뛰어든 이들은 자기 최면을 위해 자기계발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다. (중략) 자기계발을 소비한다는 것은 이들이 난국에 처해 있다는 신호다. 결국 자기계발 시장은 사회적 약자를 찾아다니며 주요 고객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거대한 사기극>, 171쪽)

최근 자기계발서 판매는 다시 늘고 있다. 교보문고의 올해 12월 6일 기준 자기계발서 판매 신장률(전년 대비)은 16.2%다. 최근 10년 사이 가장 높은 수치다. 자기계발서의 부활은 어쩌면 20·30세대를 타깃으로 한 다단계 시장 확장의 징후일지도 모른다.

<김원진 기자 one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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