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비시 강제노동 ‘실마리’가 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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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압류 매각도 ‘진정한 사과’ 거리 멀어… 국가의 정치적 역할이 필요한 때

지연된 정의가 이번에는 실현될 수 있을까.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의 국내 자산 강제매각이 오는 30일 0시를 기준으로 가능해진다. 법원은 압류한 미쓰비시중공업의 국내 상표권 2건, 특허권 6건을 매각할 수 있다. 약 8억400만원 상당이다. 일제에 의한 강제노동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 외 4인이 제기한 소송이 8년 만에 그 끝을 향해 가는 것이다.

2020년 1월 17일, 도쿄 미쓰비시중공업 본사를 찾은 양금덕 할머니 / 이국언 대표 제공

2020년 1월 17일, 도쿄 미쓰비시중공업 본사를 찾은 양금덕 할머니 / 이국언 대표 제공

하지만 상황은 말처럼 단순하지 않다. 매각명령이 가능한 것과 실현되는 것은 다르다. 실제 매각을 위해서는 법적으로 거쳐야 할 절차적 단계가 더 남아 있다. 본질적인 문제도 있다. 미쓰비시 재산을 강제매각하는 것이 피해자들에 대한 ‘진정한 사과’인가 하는 점이다.

시민단체의 고민도 같다. 피해자들의 소송을 지원하고 있는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이국언 대표는 “감정적으로는 강제매각을 하면 좋겠지만 쉽지 않은 문제”라며 “답답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끝날 듯 끝나지 않는 강제동원문제는 75년째 피해자들을 괴롭히고 있다. 피해자들이 원하는 일본의 ‘진정한 사과’는 오히려 멀어지는 모양새다. 대체 상황은 왜 이렇게 악화되고 있을까.

할 수 있는 건 다한 피해자

일본은 1944년 제정한 ‘국민징용령’을 통해 한국인 노동자를 일본으로 끌고 가 강제노동을 시켰다. 양금덕 할머니 외 4명은 나고야에 있는 구 미쓰비시중공업 항공기 제작소에서 강제노동을 했다. 이들은 2012년 10월 24일, 미쓰비시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을 광주지방법원에 제기했다. 양금덕 할머니는 “첫째도 사죄, 둘째도 사죄”라고 소송 이유를 밝혔다. 대법원까지 간 소송은 2018년 11월 29일 “피해자들에게 1인당 1억~1억50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확정했다.

1944년 6월, 일본 나고야에 있는 미쓰비시중공업 항공기제작소로 강제동원된 피해자들 / 이국언 대표 제공

1944년 6월, 일본 나고야에 있는 미쓰비시중공업 항공기제작소로 강제동원된 피해자들 / 이국언 대표 제공

그로부터 2년이 흘렀지만 미쓰비시 측은 위자료를 지급하지 않았다. 피해자 측의 협상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동안 소송에 참여했던 피해자 이동련 할머니, 끌려간 여동생을 대신해 소송에 참여했던 김중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남은 피해자 양금덕·박해옥·김성주 할머니는 모두 90세를 넘긴 고령이다. 결국 지난해 3월 피해자 측은 미쓰비시 국내 재산에 대한 압류를 신청하며 강제집행 절차에 착수했다. 이 대표는 “판결이 이행되도록 압박하기 위해 강제집행 신청이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강제집행은 피해자 측의 압류명령신청으로부터 시작된다.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면 피해자 측은 매각명령신청을 할 수 있다. 실제 매각명령은 법원이 심문을 통해 결정한다. 미쓰비시 측은 이 모든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법원은 압류명령문, 매각명령 관련 심문서를 공시송달했다. 이는 소송 상대방이 재판에 불응하면 법원 게시판이나 관보 등에 내용을 게재해 전달된 것으로 간주하는 방법이다. 오는 30일 0시면 이 과정이 완료된다.

하지만 시간은 더 걸릴 수 있다. 법무법인 정의 정지웅 변호사는 “매각명령을 언제 할 것인가는 법원의 재량이다”며 “매각명령을 해도 미쓰비시 측은 즉시 항고해 법적으로 다툴 수 있다. 항고가 각하 또는 기각돼도 재항고할 수 있다”고 말했다. 피해자 측을 대리하는 법무법인 지음 김정희 변호사도 “매각명령에 불복하면 얼마든지 시간을 끌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미쓰비시 측 입장을 듣기 위해 회사를 대리하는 법무법인에 연락했으나 응답은 없었다.

고령의 피해자들이 법적 해결만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결국 국가의 정치적 역할이 필요한 상황이 됐다.

2018년 11월 29일, 대법원 선고를 앞두고 기자회견 중인 김성주 할머니 / 이국언 대표 제공

2018년 11월 29일, 대법원 선고를 앞두고 기자회견 중인 김성주 할머니 / 이국언 대표 제공

일본과 한국법으로 싸우는 정부

강제동원문제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접한 문재인 대통령은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하며, 피해자 중심의 해결방안을 찾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사법부 판결 존중’ 의사는 국가 간 청구권 문제를 외교가 아닌 ‘한국’ 사법부 결정에 구속되게 했다. 주진열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3권분립을 이유로 행정부도 대법원 판결에 따라 청구권협정을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은 국제법에 대한 무지나 무시”라고 말했다. 3권분립 원칙이 국내적 판결을 국제적으로 정당화시킬 수 있는 근거는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사법부 판결을 전제로 하다 보니 ‘피해자 중심의 해결방안’이 온통 ‘돈’ 문제가 됐다는 점이다. 신임 주일본대사로 내정된 강창일 전 의원은 ‘한국 정부가 피해자로부터 채권을 인수해 현금화를 피하는 방안’이나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혜택을 본 한국 기업을 중심으로 배상하고 이후 구상권을 취득하는 ‘대위변제’를 언급했다. 해법에 ‘사과’는 없고 ‘돈’ 문제만 남았다.

박정진 일본 쓰다주쿠대 교수는 “법 집행 대상이 외국 민간기업이라는 점에서 이는 본질적으로 외교문제”라며 “사법부가 외교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정부는 국가 간 분쟁 해결을 위한 현실적인 대응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한국 정부의 ‘피해자 중심주의’는 국내적으로 보면 감동적이지만 외교적으로는 공허한 말일 수 있다”며 “일본의 역사인식을 바꾸려면 사법적 원칙보다 장기적이고 복합적인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결국 정부의 행보에 상처받는 것은 피해자다. 이 대표는 “소송 때도 정부 도움을 받은 것은 없고, 그 이후로도 말만 했지 실질적 대안을 제시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빨리 돈을 받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식의 동정적인 태도를 보여 자존심도 상한다”며 “배상만 하고 사죄가 없는 방식은 우리 정부가 일본의 억지를 인정해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상황은 어렵지만 해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피해자와 기업 간의 자율적 협상이 가능한 환경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실제로 미쓰비시 측이 처음부터 문제 해결에 소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미쓰비시는 한국에서 소송이 제기되기 전인 2010~2012년 16차례나 피해자 측과 협상을 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일본에 아베 총리를 필두로 한 보수 정권이 들어서며 변했다.

대한변호사협회 일제피해자 인권특별위원장 최봉태 변호사는 “정부는 돈만 주면 된다는 식의 해법보다 기업과 피해자가 문제를 자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며 “무엇보다 일본 정부가 협상을 방해하지 않도록 정치적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표 역시 “피해자와 가해 기업이 마주 앉을 수 있게 정부가 방패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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