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가 모순, 더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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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문제 보도에 열내지만 정작 내부의 부조리에 대해서는 침묵

14년간 CJB청주방송(청주방송)에서 일하다 해고된 고 이재학 PD가 목숨을 내려놓은 그 계절이다. 이PD는 찬바람 불던 지난 2월 4일 세상을 떠났다. 7월에야 책임자 처벌, 고인 명예회복, 비정규직 처우·고용개선에 대한 합의를 이뤘다. 청주방송과 유가족, 언론노조, 시민사회가 오랜 진통을 앓은 끝에 맺은 결실이었다. 합의 후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달라진 건 많지 않다. 사측은 약속을 뒤집고 합의 이행에 미적거리고 있다.

/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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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방송가 곳곳에서 ‘쉬운 해고’가 되풀이되고 있다. 전태일 열사 50주기 방송을 내보낸 언론 비평 프로그램은 개편을 앞두고 부당해고 논란이 일었다. 10년을 꼬박 한 프로그램에서 일한 작가 2명이 전화 한통으로 일자리를 잃었다. 조직 밖 부정의를 보도하는 데는 열을 올리며 내부 일에는 입을 다무는 모순이다.

이재학 PD는 청주방송 14년차 프리랜서 PD였다. 2018년 4월 자신과 동료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가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당했다. 지난 1월 22일 근로자지위확인소송 1심에서 패소했다. 소송 과정에서 사측 지시를 받은 정규직 PD들이 이PD를 위해 진술서를 쓴 동료들을 회유·압박했고 일부는 진술을 번복했다. 이PD 사망 이후 4자가 참여한 진상조사위원회는 “청주방송에서 14년간 일한 고 이재학 PD의 죽음은 부당해고와 소송 방해의 결과”라는 것을 재확인했다. 진상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4자는 합의했다. 남은 건 청주방송의 성실한 이행이었다.

지어지지 않는 매듭

4자는 이PD가 제기한 항소심은 재판을 진행하지 않고 법원의 강제조정으로 끝내기로 했다. 강제조정은 사측의 제안으로, 미리 확약한 문구를 조정문에 담을 계획이었다. 돌연 사측은 9월 23일 법원 강제조정에 이의신청을 했다. 조정문 중 ‘사망 책임 통감’ 문구를 없애거나 수정하자고 했다. 최근엔 ‘부당해고’라는 표현을 지울 것을 요구했다. 진재연 대책위 집행위원장은 “4자가 논의해서 결정한 문구를 뒤집으려는 의중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PD 동료들을 회유·압박한 책임자 징계도 지지부진하다. 애초 징계 시한은 합의가 이뤄진 후 한달 이내였다. 12월 7일 기준 책임자 4명 가운데 2명만 징계가 내려졌다. 당시 이PD에게 직접 프로그램 하차를 요구하고 위증 등으로 소송을 방해한 전 기획제작국장 A씨는 해고됐다. 진상조사위가 애초 해고를 권고한 전 경영기획국장 B씨는 정직 3개월 처분을 받았다. 또 다른 2명의 징계는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

지난 7월 28일부터 2주간 청주방송 기획제작국에는 고 이재학 PD를 기리는 책상이 놓였다. / Cjb청주방송 고 이재학 PD 대책위

지난 7월 28일부터 2주간 청주방송 기획제작국에는 고 이재학 PD를 기리는 책상이 놓였다. / Cjb청주방송 고 이재학 PD 대책위

사측의 징계가 지지부진하자 한국PD연합회가 이PD 사망 사건 책임자로 지목된 회원 3명에 대한 징계 절차에 들어갔다. PD연합회는 지난 2월 이PD가 청주방송 노동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측에 대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억지”라고 비판하는 성명을 냈고 대책위원회에도 참여했다.

유족과 대책위는 사측의 조정결정 이의신청의 배경에 청주방송 대주주인 이두영 두진건설 회장(청주방송 이사회 의장)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이 회장은 지난 3월 이PD 사망사건에 책임을 진다며 물러나기까지 20년간 청주방송의 대표이사였다. 대책위는 12월 4일 청주 흥덕구 두진건설 앞에서 이 회장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이 회장 면담을 요청하는 등 합의 이행을 촉구하고 있다. 대책위는 비정규직 처우개선도 합의시한을 넘어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청주방송은 이두영 회장이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이며, 다른 합의사항 이행도 절차상 늦어지고 있다는 입장이다.

대책위는 합의한 내용을 신속하게 이행하지 않으면 민형사상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이용우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 부위원장은 사측이 현재의 조정문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정식 항소심 판결절차로 가서 정확한 법원의 판단을 받아볼 예정”이라고 했다. 이 부위원장은 “계약 위반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도 염두에 두고 있다. 불법 파견 등 노동문제와 관련해 형사고발도 가능하다”고 했다.

<저널리즘 토크쇼 J>는 방송에서 전태일 열사와 이재학 PD를 다뤘다. / 방송 화면 캡처

<저널리즘 토크쇼 J>는 방송에서 전태일 열사와 이재학 PD를 다뤘다. / 방송 화면 캡처

말 아닌 행동으로 보여줄 때

지난 11월 1일 KBS의 미디어비평 프로그램 <저널리즘 토크쇼 J>는 이PD 사건을 다뤘다. 방송 막바지에 5분가량 이PD의 죽음과 청주방송의 더딘 합의 이행 상황을 전했다. “고 이재학 PD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자막을 띄웠다. 11월 22일에는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아 언론이 노동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살폈다. 방송 제목은 ‘세상의 모든 나, 전태일에게’였다.

이튿날 <저널리즘 토크쇼 J> 공식 페이스북 계정에는 글 하나가 올라왔다. 2018년 11월 방송된 19회부터 합류한 프리랜서PD C씨가 쓴 글이었다.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KBS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부당한 계약 종료(사실상 해고 통보)에 대해 알리기 위함입니다. J는 곧 개편을 앞두고 있습니다. 프로그램 개편을 이유로 20명 남짓의 프리랜서 노동자들은 갑작스러운 계약 종료(사실상 해고 통보)를 일방적으로 통보받은 상태입니다. 한달 후면 모두 일자리를 잃게 됩니다.”

프리랜서 노동자들의 억울함을 알리고 싶어서가 아니라고 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비정규직 노동자의 부조리한 해고 사례가 비단 저희의 이야기이기만 할까요? 저희보다 더 억울하고 더 한 맺힌 노동자들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 부조리 앞에 딱히 더 억울해할 염치도 없습니다.” 계약 종료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대한민국 최고의 방송국 KBS였기 때문”이었다. “노동자 정신의 근간인 전태일 열사 이야기를 방송으로 만들며, 그 방송을 만드는 노동자들을 부당하게 해고하는 이 구조적 모순. 이런 모순이 아무렇지 않게 존재하는 곳이 지금의 KBS입니다.”

방송 화면 캡처

방송 화면 캡처

KBS는 도의적 책임은 느끼지만 법적 책임은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KBS는 정부가 마련한 ‘방송영상프로그램 제작스태프 표준업무위탁계약서’에 따라 프리랜서 제작스태프와 계약을 맺고 있다고 밝혔다. KBS는 “이 같은 계약에 위배되지는 않지만, 개편 논의 과정에서 스태프들이 의사 결정에 충분히 참여하지 못했다고 느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한국독립PD협회는 C씨가 <저널리즘 토크쇼 J> 관련 계약서 자체를 쓰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C씨는 <저널리즘 토크쇼 J>에서 일한 초반 2년간 프리랜서 형태로 제작에 참여했다. 2년 후 기간제법에 위반되지 않도록 개인사업자로 등록해 일을 계속했다. 이런 과정에서 토크쇼와 관련한 어떤 근로계약도 맺지 않았으며 토크쇼 제작 전 다른 일로 맺은 계약서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독립PD협회는 12월 1일 입장문에서 “KBS에 있어 전태일은 한마디로 생색내기용 방송 아이템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12월 13일 <저널리즘 토크쇼 J>의 두 번째 시즌 마지막 방송 아이템은 ‘방송사 비정규직’이다.

작가는 원래 프리랜서?

지난 6월에는 MBC 아침 프로그램 <뉴스투데이> 작가 2명이 전화 한통으로 일자리를 잃었다. 사유는 프로그램 개편과 인적 쇄신. 매일 새벽 방송국으로 출근해 원고를 쓰길 10년이었다. ‘아침 신문 보기’ 코너를 담당한 작가 김씨는 새벽 3시 30분 신문 12종을 훑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보도가치가 높은 기사를 차장기자와 논의하고 데스크에게 보고했다. 데스크는 기사를 빼라 넣어라 지시했다. 늦어도 5시 50분까지 기사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원고를 쓴다. 윗선의 판단에 따라 아이템은 수시로 바뀌었다. 최종 원고는 반드시 승인을 거쳤다. 7시 40분쯤 방송이 끝날 때까지 현장을 지켰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에도 일터로 나갔다. 국제뉴스를 전하는 ‘이 시각 세계’ 코너를 맡은 작가 이씨 역시 새벽 출근길 차가 폐차될 정도의 교통사고가 났지만 병원이 아닌 방송국으로 먼저 향했다. 보도국 작가의 삶 프리랜서와는 거리가 멀었다.

김작가와 이작가가 뉴스투데이에서 일할 당시 모습.

김작가와 이작가가 뉴스투데이에서 일할 당시 모습.

작가들은 1년마다 ‘프리랜서 업무위임계약서’를 썼다. 계약 해지 땐 계약기간이 6개월 남아 있었다. 계약서에는 “갑이나 을의 의사표시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개편 등 방송사 일방 사정으로 인한 해지 시 마지막 방송 2주 전 구두나 서면으로 통보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독소조항’으로 지적받는 대표 사례다. 상대의 귀책사유가 없으면 계약 내용을 임의로 바꾸지 못하도록 한 정부의 방송작가 표준계약서가 나온 지 3년이 다 됐는데도 MBC보도국의 계약서는 그대로였다.

담당 부장은 김씨에게 계약 해지를 알리며 “코너가 없어진다”고 했다. 하지만 코너는 이름만 바뀐 채 살아 있다. 작가 이씨는 “새로운 사람과 해보려고 한다”는 부장의 말에 그 이유를 물었다. 돌아온 건 미안하다는 말뿐이었다.

두 작가는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했다. 김씨는 “구제신청을 하면 내가 실익을 얻지 못하더라도 다음번에는 사측이 최소한 그렇게 쉽게 자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서울지노위는 지난 10월 21일과 11월 23일 두 작가의 구제신청을 나란히 각하했다. 구제신청 자격이 없다며 부당해고 여부는 따지지도 않은 것이다. 지노위는 작가들이 별도의 근태관리나 인사평가를 받지 않은 점, 업무 자율권이 어느 정도 보장된 점, 기본급이나 고정급 없이 방송프로그램 단가로 보수가 책정돼 지급된 점을 근거로 들었다. 이씨는 “모든 정황이 지시받아 일한 게 명확한데 노동위원들은 ‘작가는 원래 프리랜서’라는 사측 주장에만 초점을 맞추고 실질적인 이면을 살피지 않아 너무 답답했다”고 말했다.

기본급이나 고정급이 정해졌는지, 취업규칙의 적용을 받고 있는지 등은 사용자가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임의로 정할 여지가 크기 때문에 이 잣대만으로 노동자성을 쉽게 부정해선 안 된다는 게 대법원 판례다. 대법원은 계약의 형식보다 사측의 지휘·감독을 받으며 일했는지, 근무시간과 장소가 고정됐는지 등 실질적인 노동환경이 중요하다고 봤다.

김순미 방송작가 유니온 사무국장은 “다양한 미디어 콘텐츠 환경에서 작가들이 일하는 모습은 제각각”이라며 “드라마 작가처럼 원고만 써서 납품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보도나 구성, 라디오 작가들은 근로자처럼 출퇴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12월 2일 재심을 신청했다. 김씨도 재심에 나설 예정이다.

<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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