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계동 골목- 모과나무길부터 탱자나무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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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전철 1호선 광운대역을 나서면 월계동이 시작된다. 월계동은 이곳부터 북으로 이어져서 월계역과 녹천역 근처까지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중랑천과 우이천이 흘러내려 만나는 사이에 끼어 있는 지형이 반달을 닮았다 하여 월계동이란 이름을 지녔다고 한다. 서울 사대문 밖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곳도 큰 규모의 아파트단지로 빼곡하다. 중랑천을 끼고 있고, 그린벨트로 묶인 산들이 군데군데 자리를 지키고 있어 환경 좋은 주거지로 인기가 높다. 아파트가 밀고 들어오지 못한 산 주변 사이사이로 옛 동네의 골목길이 아직도 살아 있다. 골목은 대부분 옛 모습을 지니고 있어서 아련한 기억을 일깨운다.

월계동은 아파트단지 사이로 옛 골목이 섬처럼 남았다.

월계동은 아파트단지 사이로 옛 골목이 섬처럼 남았다.

광운대역으로 이름 바꾼 성북역

광운대역의 옛 이름은 성북역이다. 월계동 일대가 성북구였던 시절을 지나 행정구역이 노원구로 바뀌면서 성북역은 자연히 이름을 잃었다. 성북역은 지금의 50·60대에겐 특별한 장소이다. 최백호의 노래 <입영전야>나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가 떠오르는 곳이다. 70·80년대 젊은이들은 성북역에서 입영 열차를 타고 논산훈련소로 떠났다. 아침 일찍 광운대 운동장에 모여 열과 오를 맞춰 골목을 지나 성북역까지 걸어가면 가족과 친구들이 그 연변에 서서 배웅했다. 재촉하는 헌병의 호루라기 소리에서도, 그 많은 무리가 뒤섞인 얼굴 중에서도 보고 싶은 이의 모습만이 커다랗게 떠오르는 것은 신비한 일이다. “기다리겠다”는 연인의 허망한 약속도, “편지 쓸게”라는 친구들의 기약도 상심한 젊음 앞에선 부질없었다. 공연히 화난 얼굴로 하늘만 보던 빡빡머리 입영자들의 모습을 이제는 찾아볼 수 없다.

광운대역은 근처 아파트단지들의 중요한 거점이라 역광장으로 줄줄이 마을버스가 들어온다. 역사 안에 있는 제법 큰 규모의 마트에서 찬거리를 골라 귀가하는 이들의 모습도 흔하다.

역광장을 건너면 영축산이 버티고 섰다. 영축산은 부처가 모든 생명은 연꽃처럼 아름답고 귀하다는 가르침으로 ‘법화경’을 설했다는 북인도 어느 곳의 산 이름이다. 그 이름의 산이 어떤 연유로 월계동에 앉아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영축산은 잘 정비돼 인근 주민들이 산책하는 근린공원이 됐다.

골목을 나오면 곧바로 산길이 이어진다.

골목을 나오면 곧바로 산길이 이어진다.

영축산 주변에서 흔히 눈에 띄는 것은 원룸과 고시원 건물이다. 골목 어귀의 부동산도 모두 ‘원룸 전문’이라는 간판을 크게 내걸고 있다. 영축산을 두고 광운대와 인덕대가 있고, 북쪽으로 서울시립대, 남으로는 외국어대·경희대·삼육대 등이 줄줄이 이어진다. 화려하지 않은 대학가지만 골목 안 풍경은 대학생들이 이곳의 주인임을 알게 한다.

서울이라는 이름을 붙인 곳 땅 한뙈기라도 금값이기는 마찬가지라서 산 아래 오래된 집을 번듯하게 고쳐 젊은 세대가 들어와 사는 모습도 쉽게 눈에 띈다. 역에서 가까운 곳부터 산자락에 이르기까지 고시원 원룸촌, 연립주택, 단층 블록집들이 층을 두고 이어져 있다. 고시원 학생들이야 늘 들고 나기가 일상이지만 산자락으로 다가갈수록 팍팍하고 곤고한 삶의 모습이 골목에 배어 있다. 길가부터 산 아래까지 골목 안 풍경이 우리 사회의 계급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셈이다.

오래된 동네답게 월계동엔 옛 지명이 아직도 남아 있다. 광운대역 앞 월계1동의 이름은 또박이마을이고, 역에서 광운대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고갯길은 여우고개이다. 예전 이 근방에 여우가 많이 살았단다. 고개 넘는 이들의 시야에 잡힐 듯 거리를 두면서 기웃거리며 행인을 홀리던 여우는 이제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 이름은 아직도 여우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산 아래 오랜 주택들을 새로 고쳐 골목의 모습이 달라졌다.

산 아래 오랜 주택들을 새로 고쳐 골목의 모습이 달라졌다.

인덕대·서울시립대·외국어대·경희대

여우고개를 넘어 영축산 반대쪽으로 골짜기를 따라 길게 나 있는 마을이 벼루마을이다. 월계동 토박이들은 안골이라 부르고 벼루 모양의 연못이 있다 하여 벼루마을이란 이름을 얻었다. 다시 한자로 벼루 연(硯) 자를 써서 연촌마을로도 부르는 곳이다. 게다가 한때 학교 선생님들이 필지를 불하받아 많이 살았다 하여 교육촌이란 별명도 있다. 벼루마을 골목이 월계동에서 가장 깊고 길며 가파르다. 여러 차례의 도시 재정비 사업을 거쳐 골목은 잘 정비되어 있다.

월계동 골목엔 낡고 오래된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았다.

월계동 골목엔 낡고 오래된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았다.

골목은 지금도 고치고 또 다듬어 되살아나고 있었다. 하나의 마을이지만 아래 골목 윗골목마다 여러 이름이 붙어 있다. 산 아래부터 모과나무 골목길, 동네 마실길, 모퉁이 감나무길, 공원 가는 골목길, 어린이집 골목길, 숲으로 가는 계단, 아래 골목 갤러리, 갤러리 골목길, 쉬어가는 골목길, 짧은 계단 골목길, 텃밭 가는 길, 탱자나무 골목길, 계단 예쁜 골목길, 내부순환 길, 길공원 가는 길, 마음을 닦는 길, 돌고래 언덕길, 돌담길 가는 길 등이다. 이름만 봐도 길의 모양이나 행선을 알 수 있을 만큼 명료하다. 이름을 따라 골목을 걷는 재미가 있다. 입에 감기는 골목의 이름에서 주민들의 애정을 느낄 수 있다.

벼루마을 골목 초입이 소란했다. 담쌓는 공사를 두고 이웃의 언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시비의 발단은 주차 불편 때문이다. 어디나 오래된 골목길은 주차가 불편하고 다툼은 일상이다. 결국 싸움의 결정타가 터져 나온다. “나이도 어린 사람이…”, “신고할 겁니다.” 지켜보던 주민들은 옆 골목으로 피신하여 “언제 이사 온 사람이래?”, “얼마 안 됐어” 하고 소곤거렸다. 대부분 오래도록 산 주민끼리는 포용의 폭이 넓은 편이지만, 낯이 익지 않은 이가 새로 이웃이 되기엔 시간과 노력이 따라야 하는 법이다. 그 어느 단계에서 삐걱거리면 이런 소란이 당연한 것이 인간사 사바세계의 일이다.

골목 중간에 새로 집을 짓는 공사장도 조심스러운 모습이 역력했다. 트럭이 오가며 떨어뜨린 흙을 청소하는 모습에 공력이 들어갔다. 아마 이곳에도 분란이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툼과 공사판을 지나치면 골목은 별일 없다는 듯 시침을 떼고 있지만 팬데믹 사태의 영향인 양 문을 닫은 가게들도 여럿 눈에 띈다. 세상이 언제나 다시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지 누구도 모를 일이다.

주민들이 자신의 작품으로 골목길을 꾸몄다.

주민들이 자신의 작품으로 골목길을 꾸몄다.

주택가 대부분 아파트단지로 변신

어떤 골목엔 좁은 계단을 따라 색색이 타일을 붙인 화폭을 보여주고 있다. 오래된 집 벽에는 집주인의 아이가 자기 집을 그려 장식했다. 아래 골목 갤러리와 갤러리 골목길은 길 자체가 작품이 됐다. 어떤 집은 오래된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담벼락이 허물어져 무너진 몰골을 보인다. 골목을 거슬러 산에 다가갈수록 집들은 시간을 역행하는 모습이다.

아주 높이 자리 잡아 멀리 시내가 아련히 내다보이는 집 대문에 세입자를 구하는 간판이 붙어 있다. 붙여놓은 지 제법 된 듯 비닐을 씌운 푯말엔 군데군데 얼룩이 졌다. 어림잡아도 무척이나 저렴한 집세였지만, 이 높이를 감당할 세입자를 구하는 것도 일이겠거니 싶다. 큰길에서 멀어질수록 사람은 불편하고 집값은 내려간다. 세상을 멀리할수록 마음은 더 평화롭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저 가파른 길을 오르내릴 때마다 삐걱거릴 관절을 떠올리며 살며시 고개를 젓는다.

골목 끝에 문득 ‘광운대역 가는 지름길’이란 이정표가 보인다. 길은 오래된 집 사이로 이어지다가 산길로 뻗어 있다. 낙엽 진 나무 사이로 계절을 헷갈린 미친 목련이 꽃 순을 내밀고 있었다. 산길은 완만히 이어지다가 살짝 고개를 넘자 잘 정비된 등산로가 펼쳐졌다. 골목을 나서자마자 걸을 만한 산책길과 등산로가 있는 것도 벼루마을의 매력이다.

월계동이 품고 있는 예전의 모습 중엔 산을 둘러싸고 있는 버스와 택시차고지들이 있다. 월계동 넘어 중계동과 상계동까지 도심이 확장되면서 차고지들은 오도 가도 못 하고 그 자리에 남았다. 택시회사 차고지 앞에선 ‘부당노동 행위’를 규탄하고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노동자의 목소리는 길 건너 회사의 담을 넘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돈다. 사바세계는 늘 복잡하고 슬픈 일들로 가득하며 고되다.

월계동 곳곳 낮은 집들이 있던 자리엔 대부분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멀쩡해 보이는 아파트들도 벌써 재건축을 의논할 정도로 세월이 흘렀다. 변전소로 가는 길가에 산자락을 끼고 작은 마을이 남아 있는데, 주민에게 묻자 예전엔 닭이며 염소, 소를 키우던 농장들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 그 비싼 땅에서 닭을 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차라리 그린벨트 규정이 조금 더 풀려 아파트를 짓거나 빌라를 세우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커 보인다.

광운대역으로 이름을 바꾼 성북역을 보면 과거와 현재가 어떤 연관도 없이 따로 서 있는 것 같다. 예전 오밀조밀하던 꼬방동네는 흔적도 없어지고 골목은 모두 사라져 아파트가 섰다. 산자락 아래 간혹 옛날식 골목길들이 남아 있지만, 그 또한 언젠가는 없어질 것이다. 우리 삶의 방식이 변해가기에 당연한 일이다. 광운대역 앞 ‘희망 온돌’ 따뜻한 겨울 나누기 행사 안내판에 눈길이 머문다. 연탄 300장이면 겨울 석달을 날 수 있다니, 월계동 골목에 아직도 남아 있는 연탄 때는 옛집들도 춥지 않은 겨울이 되었으면 좋겠다. 월계동 골목길에서 우리가 지나온 망각의 시간을 되짚어 걸을 수 있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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