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상자에 구멍이 뚫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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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우정사업본부(우본)가 11월 25일부터 손잡이 구멍이 뚫린 우체국 소포상자를 내놓았다는 것이다. 배송 과정에서 상자를 10번 이상 들어올려야 하는 택배업 종사자들과 이들의 건강을 걱정하는 소비자 모두에게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수도권과 강원지역 우체국에서 먼저 판매하다가 내년에는 전국으로 확대한다고 한다.

최기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오른쪽 첫 번째)이 11월 23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중앙우체국을 방문해 이일곤 집배원(오른쪽 세 번째) 등 관계자들과 함께 우체국 구멍 손잡이 소포상자를 들어보이고 있다. / 과학기술정보퉁신부 제공

최기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오른쪽 첫 번째)이 11월 23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중앙우체국을 방문해 이일곤 집배원(오른쪽 세 번째) 등 관계자들과 함께 우체국 구멍 손잡이 소포상자를 들어보이고 있다. / 과학기술정보퉁신부 제공

“상자 손잡이에 구멍이라도 좀 뚫어 달라.”

먼저 이렇게 호소하고 나선 것은 마트 노동자들이었다. 지난해 추석 연휴를 이틀 앞둔 9월 10일, 명절 선물세트 물량이 밀려드는 상황에서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마트산업노동조합(마트노조)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오마이뉴스 기사를 보면 홈플러스 합정점 가공부문에서 일하는 오재본씨는 이 자리에서 “간장 5ℓ짜리 몇 상자면 15㎏이 넘고, 설탕 3㎏짜리 상자 4~5개를 동료들이 온종일 뛰어다니며 엘카(손수레)로 밀고 당기고 다닌다. 누군가는 갈비뼈가 골절되고 허리디스크가 오기도 하고 하반신이 완전히 돌아가 수술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고 얘기하며 울먹였다고 한다.

지난해 6월 마트노조와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마트 노동자 5177명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63.9%가 근골격계 질환 증상에 시달린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마트에서 음료, 주류 등의 운반을 담당하는 노동자는 평균 무게 10.8㎏의 상자를 하루 평균 403회씩 들어올리고 있었다. 선물세트가 들어오는 명절 시기에는 물량이 평소보다 최대 4배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노동환경연구소는 “포장상자에 손잡이만 부착해도 중량물의 무게를 9.7%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고, 작업 자세까지 개선하면 최대 38.7%까지 감소 효과가 있어 그만큼 요추부 부담이 줄어든다”며 손잡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곧이어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상자 손잡이 설치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올해 설 명절까지도 노동자들의 이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용노동부가 관계자들을 만나보니 마트 쪽에서는 “상자는 납품업체들 것이어서 간섭하기 어렵다” 했고, 생산 업체들도 각자의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상자 제조공장에선 구멍 뚫는 공정이 추가되면 생산 효율이 대폭 떨어지고, 구멍을 뚫으면 강도가 약해지기 때문에 더 단단한 재질의 종이를 써야 해 단가가 상승한다고 했다.

첨단 기술의 시대에 종이상자에 구멍 2개 뚫는 일이 이렇게 어렵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을 허탈하게 했다.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초고속으로 발달하는 기술이, 노동자의 건강권을 보장하는 문제에는 이토록 무심하다는 것이 상자를 계기로 드러나버렸던 것이다.

변화가 나타난 것은 또다시 추석 명절을 보내고 난 최근의 일이다. 코로나19 확산이 큰 영향을 미쳤다. 택배 수요가 폭증하면서 택배노동자의 과로사가 이어지자 정치권이 움직였다. 지난 9일 출범한 민주당 소확행위원회가 상자에 손잡이 뚫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올렸고, 전부터 자체적으로 구멍 뚫린 상자 생산을 검토하던 우본도 힘을 받게 됐다고 한다.

역시,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정치였음을 깨닫게 된다.

<최미랑 뉴콘텐츠팀 기자 r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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