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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예방이냐, 개인정보 보호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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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동의 없이도 자살 고위험군 개인정보 제공 법 개정 추진

2018년 4월 6일 충북 증평군의 한 아파트에서 40대 여성이 네살 딸과 함께 숨진 채 발견됐다. ‘증평 모녀 사건’이 당시 큰 충격을 준 것은 이 사건이 벌어지기 한해 전에 40대 여성의 남편 역시 극단적인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가장의 죽음 이후 모녀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유서에는 ‘남편과 사별해 정신적으로 힘들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결국 40대 여성은 남편과 같은 선택을 하고 말았다.

한 자살예방센터에서 상담원이 ‘자살 충동’을 호소하며 전화를 걸어온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최근 코로나19가 확산되는 가운데 센터에 상담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 자살예방센터에서 상담원이 ‘자살 충동’을 호소하며 전화를 걸어온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최근 코로나19가 확산되는 가운데 센터에 상담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들 모녀가 자살 고위험군(자살유가족)이었음에도 사회적 안전망은 전혀 가동되지 않았다. 모녀가 죽은 지 몇달이 지나서야 시신이 발견됐다. 증평 모녀 사건은 자살 고위험군에 대한 사회적 차원의 관리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남겼다. 당시 한 언론사의 보도에서 해당 군의 관련 공무원은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경찰에서 자살 사건이 접수돼도 관련 기관에 통보되지 않아” 이들 모녀를 전혀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경찰과 소방서 등 ‘자살예방업무 수행기관’에 자살 위험자나 자살유가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이들 기관이 업무를 적극적으로 수행하게 할 수 있을까. 현행법으로는 본인이 동의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사실상 해당 기관이 자살 고위험군에 대한 개인정보를 알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동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한국자살예방협회 법제위원회 위원장)는 “자살위기에 처한 사람이 직접 나서서 자신을 알리기도 힘들거니와 처음부터 본인이 정보제공에 동의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라고 말했다.

해당 정보의 삭제 및 파기 요구 권리도

21대 국회에서는 본인의 동의 없이도 자살예방업무 수행기관에서 관련 정보를 알 수 있도록 하는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송옥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6월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을 위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고, 지난 9월에는 김상희 민주당 의원이 비슷한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했다. 송 의원의 개정안은 “자살 위험이 높아 긴급한 지원이 필요한 경우 등 상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자살시도자 등의 동의 없이도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는 내용을 명시했다. 김 의원의 개정안에는 “다만 반복적으로 자살을 시도한 자 등 자살을 할 위험성이 높아 긴급한 지원이 필요한 경우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라며 본인 동의 조건에 대해 예외조항을 넣었다. 필요한 경우에는 정보제공이 가능토록 한 것이다. 김 의원의 개정안에는 당사자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는 조항도 넣었다. “당사자의 동의 없이 자살시도자 등의 정보를 제공받은 기관은 상담 등의 지원을 제공할 때 당사자에게 해당 정보의 삭제 및 파기를 요구할 권리가 있음을 안내하고 당사자가 이를 요구하면 지체 없이 해당 정보를 삭제 및 파기하여야 한다”고 명시해놓은 것이다.

국회 보건복지위는 검토보고서에서 두 개정안에 대해 “현행 법률은 자살시도자 등의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당사자의 동의를 받도록 하여 자살 위험 예방과 개인정보 보호 간의 균형을 이루고자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개인의 동의를 반드시 받도록 한 이유에 대해서도 “본인 또는 가족이 자살(시도)자라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개인에게 예기치 못한 불이익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라고 밝혔다. 개인동의를 반드시 받도록 한 또 하나의 이유로 “정보제공 요청에 응해야 하는 기관에 의료기관이 포함될 경우 의료법상의 정보누설 금지 의무와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이는 자살예방법 개정안이 개인정보법·의료법과 충돌되는 지점을 잘 말해주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감염확산 방지와 개인정보 보호라는 상충된 이해관계가 나타난 것과 비슷하다. 한쪽에서는 자살예방의 측면을 강조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개인정보 보호의 측면을 강조하는 셈이다.

[표지 이야기]자살예방이냐, 개인정보 보호냐

검토보고서에는 관련 내용의 개정에 대한 보건복지부의 입장도 나타나 있다. 보건복지부는 송 의원의 개정안에 대해서는 ‘수정 수용’의 입장을 나타냈다. “다만 동의 없이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를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하여 명확히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또한 당사자가 서비스 제공을 명시적으로 거부하거나 정보의 삭제를 요청할 경우 해당 정보를 파기토록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김 의원의 개정안은 보건복지부의 이 같은 ‘수정 수용’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의원 개정안에 대해 국회 보건복지위는 ‘기다려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국회 보건복지위는 검토보고서에서는 “아직 이 법이 시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보 공유의 효과 또는 필수적 동의 요구에 따른 비효율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다”며 부정적인 의견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개인의 동의를 필수적으로 요구하도록 한 사정이 변했다고 볼 만한 특별한 이유도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현행 법률의 시행 경과를 조금 더 지켜보고 결과를 바탕으로 법개정 여부를 논의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20대 국회에서도 발의됐으나 불발

보건복지위의 한 민주당 의원 측은 “코로나19 같은 감염병 확산과 개인정보 보호가 상충되는 측면은 감염병의 확산을 막아 피해를 줄여야 한다는 공공의 이익이 더 크게 작용할 수 있었다”며 “하지만 공공의 이익에 끼치는 영향으로 볼 때 자살예방은 감염병 확산과는 다르기 때문에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을 쉽게 예측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개정안을 낸 김상희 의원 측은 “해당 부처에서는 찬성 의견을 냈다”면서 “검토보고서의 부정적인 의견은 검토보고일 뿐이므로 개정안이 해당 상임위에서 무난하게 통과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동진 교수는 “자살예방의 사회적인 기반이 단단하고 안전망이 촘촘하다면 ‘기다려보자’가 합리적인 선택일 수 있지만, 지금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민감한 정보를 관계기관에 먼저 주는 것이기 때문에 ‘센 법’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도 “잘 운영한다는 전제 아래 일단 시도는 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자살률이 매우 심각하기 때문에 입법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인 동의 없이도 정보제공이 가능하게 하는 내용의 개정안은 20대 국회에서도 발의됐으나 결국 통과되지 못했다. 원혜영 전 민주당 의원과 김승희 전 자유한국당 의원이 발의한 자살예방법 개정안에는 본인 동의 없이도 정보를 관계기관에 제공토록 돼 있었다. 하지만 원혜영 전 의원의 개정안은 20대 국회가 지난 5월 폐회하면서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김승희 전 의원의 개정안은 다른 내용이 수정 반영이 됐지만 정보제공 내용은 포함되지 못했다. 이동진 교수는 “자살의 주요 요인으로 경제와 건강 문제가 있는데,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자살률이 심상치 않다”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자살을 예방하기 위해 정보제공의 입법을 시도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윤호우 선임기자 h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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