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언 킹’이 남긴 깨지기 힘든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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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그를 ‘라이언 킹’이라 불렀다. 그의 축구 인생은 영화 <라이언 킹>에서 아기 사자 심바가 태어남과 동시에 모두의 기대를 받다가 온갖 역경을 딛고 끝내 아프리카 평원의 왕이 되는 것과 똑같았다. 많은 사람을 울리고 웃겼던 그가 이제 선수로서의 마지막을 준비한다. 모두가 인정하는 레전드 오브 레전드, 이동국(41·전북 현대)이다.

전북 현대가 이동국의 은퇴를 기념해 만든 ‘아듀 라이언킹’ / 전북현대 제공

전북 현대가 이동국의 은퇴를 기념해 만든 ‘아듀 라이언킹’ / 전북현대 제공

전북 현대 모터스는 지난 10월 26일 “23년간 프로축구 선수로서의 활약을 마치고 제2의 인생을 선언한 이동국이 이번 시즌 K리그 최종전이 열리는 11월 1일 선수로서 마지막 경기를 치른다”고 밝혔다. 이동국은 그에 앞서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아쉬움과 고마움이 함께했던 올 시즌을 끝으로 저는 제 인생의 모든 것을 쏟았던 그라운드를 떠나기로 했다”며 “은퇴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오랜 생각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심경을 전했다.

은퇴 선언한 K리그의 전설

이동국은 K리그에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불멸의 발자취를 남겼다. 1998년 포항 스틸러스에서 데뷔와 함께 신인왕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K리그에서만 통산 547경기에 출전해 228골 77도움을 올렸다. 이동국은 K리그 역대 최다 득점, 최다 공격포인트(305개)에서 1위에 올라 있고, K리그 최초의 70-70클럽 등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출전 경기 수는 김병지(706경기)에 이어 통산 2위지만, 골키퍼를 제외한 필드플레이어 중에서는 독보적인 1위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조별리그 2차전 네덜란드와 경기에 만 19세 52일의 나이로 출전, 아직도 깨지지 않는 한국선수 최연소 월드컵 출전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라운드를 누비며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사자 갈기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생긴 별명이 바로 라이언 킹. 이 별명은 이후 20년 넘게 이동국만의 시그니처 별명으로 자리 잡았다.

흔히 이동국을 ‘국내용’이라고 부르며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다. 확실히 이동국이 K리그에서 남긴 기록에 비하면 국가대표로 남긴 성적은 초라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A매치 105회 출전으로 센추리클럽에 가입한 13명의 한국 남자 축구선수 중 한명이며, A매치에서 기록한 33골은 차범근(58골), 황선홍(50골), 박이천(36골)에 이은 한국 역대 공동 4위 기록이다. 월드컵에도 두 번이나 출전했으며, 2000년 일본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는 득점왕에도 올랐다. 아시아 최고 클럽들이 경쟁하는 ACL 역대 최다골의 주인공도 바로 37골의 이동국이다. 대한축구협회에 따르면, 이동국이 각급 대표팀과 소속팀에서 뛴 공식 경기와 골은 총 844경기 344골로 한국선수 역대 최고 기록이다. 국제축구연맹(FIFA)과 아시아축구연맹(AFC)이 주관하는 메이저 대회에 모두 참가한 한국선수 역시 이동국이 유일하다. 1998년 처음으로 A매치에 데뷔한 이래 2017년 러시아 월드컵 최종 예선에 출전할 때까지 무려 20년에 걸쳐 A대표팀에 몸담은 것 또한 이동국이 처음이다. 그 밖에 부가적인 기록들은 다 세기 힘들 정도다. 그는 전설이다.

‘라이언 킹’이 남긴 깨지기 힘든 기록들

이동국의 시작과 끝은 분명 화려했다. 하지만 끝으로 가는 과정까지 모두 화려했던 것은 아니었다. 포항 시절이었던 2000년 독일 분데스리가의 베르더 브레멘(임대)에 입단했지만 많은 기회를 얻지 못하고 초라하게 돌아왔다. 한국축구가 월드컵 4강 신화를 썼던 2002년 한일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도 들지 못했다.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동국을 가리켜 말한 ‘게으른 천재’는 이후 이동국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단골 멘트가 됐다.

4년 후 절치부심하며 독일월드컵을 준비했으나, 월드컵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리그 경기 도중 오른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불운이 겹쳤다. 2007년에는 당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미들즈브러로 이적했지만, 부상 후유증에 소속팀과 대표팀을 오가는 강행군이 겹쳐 부진을 면치 못했고, 결국 1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귀국 후 성남 일화에 입단했지만 부진은 계속됐다. 모두가 이동국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동국이 반전의 계기를 만들어낸 것은 2009년 당시 전북 사령탑이었던 최강희 감독을 만나고부터다. 당시 최 감독은 감바 오사카(이적)로 이적한 조재진의 공백을 채울 수 있는 공격수를 원했고, 이동국이 부활할 수 있다는 확신에 구단 고위층에 이동국 영입을 줄기차게 요청했다. 2008년 시즌 후 트레이드를 통해 전북으로 이적한 이동국은 2009년 득점왕과 함께 K리그 최우수선수에 등극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전북 왕조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동국을 향한 존경의 말말말

불혹이 넘은 나이에도 그라운드에서 젊은 선수들에 뒤지지 않는 활약을 펼친 이동국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존재다. 이동국과 A대표팀을 함께했던 한국영과 신광훈(이상 강원 FC)은 이동국을 회상하면 감탄부터 한다. 이동국의 포철공고 후배이기도 한 신광훈은 “정말 성실한 선배다. 몸 관리도 잘했고, 리더십도 있어 모든 면에서 본받을 게 많았다. 심지어 인성까지 훌륭했다”고 말했다. 한국영 또한 “시간이 나는 대로 치료실에서 마사지나 근육을 관리하면서 몸관리를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부담이 될 법한 경기에서도 자기 자신을 믿고 있는 느낌을 받아 정말 인상 깊었다”고 회고했다.

같은 팀에서 오랫동안 함께한 트레이너의 눈에도 이동국은 특별한 존재다. 김재오 전북 의무트레이너는 “스스로 자기관리를 잘했다. 너무 자기 자신한테 철저해서 어떤 경우는 무섭게 느껴질 정도였다”며 “은퇴를 하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선수를 떠나 팀에서 너무나 큰 존재였다”고 말했다.

이동국이 은퇴 후 지도자로서 대성할 것이라는 의견도 많다. 이동국의 군대 동기로, 지도자 연수를 같이하기도 했던 후배 조원희(수원 FC)는 “(이)동국이 형과 지도자 교육에서 C급(2015년)과 B급(2018년)을 같이 받았다. 동국이 형은 이론과 실기 모두 완벽해 수석을 받았다”며 “어떤 축구를 보여줄지 궁금하다. 공격수로 워낙 큰 업적을 남겼지만 지도자 교육 때는 수비도 강조했다. 지도자로 성공할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홍명보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 또한 “지도자의 길을 걸을지는 아직은 모르겠다. 다만 여러 경험을 많이 한 선수들이 나중에 더 좋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지도자로 잘해 낼 것이라 생각한다”고 덕담을 건넸다.

<윤은용 기자 plaimsto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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