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사회 부조리에 반기 든 1020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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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4일, 오전부터 사람들이 태국 방콕 랏차담넌 거리에 모이기 시작했다. 랏차담넌 거리는 민주주의 기념탑이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거리 한쪽에는 시위대를 저지하기 위한 경찰이 배치됐다. 태국의 학생운동가 네티윗 초티파이산(24)도 일찍 집을 나섰다. 네티윗은 태국에서 최초로 병역 거부를 선언했으며, 홍콩·대만·태국 활동가들의 연대체인 ‘밀크티 동맹’을 제안한 이다. 10월 3일, 14일 두 차례 인터뷰를 통해 현지 상황을 들었다.

오토바이를 탄 태국 민주화 시위대가 10월 14일 방콕 민주주의 기념탑 주변에서 쁘라윳 짠오차 총리 사임, 개헌, 군주제 개혁 등을 요구하며 시위 상징인 ‘세 손가락 인사’를 하고 있다. / 방콕 | AP연합뉴스

오토바이를 탄 태국 민주화 시위대가 10월 14일 방콕 민주주의 기념탑 주변에서 쁘라윳 짠오차 총리 사임, 개헌, 군주제 개혁 등을 요구하며 시위 상징인 ‘세 손가락 인사’를 하고 있다. / 방콕 | AP연합뉴스

“처음에는 조심하며 설마 했던 사람들이 지난달 집회부터 낙관적인 전망을 하는 것 같다. 분위기에 변화가 있다. 벌써 많은 사람이 모였다.” 현장 분위기를 묻자 돌아온 답이다. 지난 9월 19일에도 주최 측 추산 10만명이 모였다. 2014년 이후 최대 규모다. 시위대의 공식적인 요구는 ▲민주화 활동가 탄압 중지 ▲군부 중심 의회 해산 ▲새 헌법 제정을 위한 기구 구성 3가지다. 그래서 이들의 제스처는 세 손가락 경례다. 영화 <헝거 게임>에 등장한 저항의 제스처를 차용했다.

저항의 제스처 세 손가락 경례

집회를 이끄는 것은 네티윗과 같은 태국의 10·20대다. 이에 대해 네티윗은 “너무도 당연한 흐름”이라고 말했다. “끊임없이 반복된 군부 쿠데타로 인해 태국 정치는 늘 불안정했다. 그런 불안정성 속에서 살았던 기성세대에 왕실은 피난처였고, 왕은 정신적인 지주였다. 왕실은 아주 오랫동안 왕실이 국민의 행복과 안전을 위한다는 선전을 해왔다. 하지만 지금의 10·20대는 왕실의 선전을 믿지 않으니까.”

실제 70년간 집권한 푸미폰 아둔야뎃 전 국왕은 ‘살아 있는 부처’로 불렸다. 그러나 2016년 왕위를 계승한 마하 와찌랄롱꼰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다. 애완견 ‘푸푸’의 생일파티에 세 번째 부인이 반라 상태로 참가한 영상이 퍼졌고, 지난 3월에는 왕이 코로나19를 피해 여성들과 독일의 한 호텔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이 보도됐다. 네티윗은 “우리는 ‘하렘’에 있는 왕을 위해 더 이상 돈(세금)을 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하렘은 이슬람 국가에서 여성들이 기거하는 방을 이르는 단어다.

그래서 10·20대는 3가지 요구 이상을 요구한다. 3가지 요구에서는 군주제가 언급되지 않아서다. 네티윗은 “왕실이 헌법 아래에 있지 않다면 태국은 진정한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없다. 헌법 위에 존재하는 왕실이 아닌 헌법의 적용을 받는 왕실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네티윗만의 생각이 아니다. 앞서 8월, 청년들은 개혁을 위한 10대 요구안을 발표했다. 10개 조항은 모두 왕실을 겨냥했다.

▲왕의 잘못을 국회가 조사할 수 있게 한다 ▲왕실을 비판하면 3~15년형에 처하는 형법 제112조를 폐지해 군주제에 대한 비판을 허용한다 ▲2018년 만들어진 왕실재산법을 폐지해 왕실 재산과 왕 개인 재산을 분리한다 ▲모든 왕실 재산을 감시한다 ▲군주제를 미화하는 홍보와 교육을 중단한다 ▲왕은 더 이상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는다 등이다.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태국인은 학교와 군대는 물론이고 태어날 때부터 왕실을 경외하고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방송에서는 애국가와 더불어 왕실가가 매일 흘러나오고, 왕실가가 나올 때는 움직여서도 안 된다. 왕·왕비·왕세자를 비방하거나 위협한 자는 3년형에서 최고 15년형에 처해질 수 있다. 성명을 대독한 이 역시 스물한 살의 파누사야 시티지리와타나쿨이다. 그는 BBC에 “모든 인간은 붉은 피를 가지고 있다. 세상에 누구도 푸른 피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네티윗의 지난 행보도 태국 10·20대의 이런 의식과 맞닿아 있다. 그는 고등학생 때부터 학생들이 교사 앞에 무릎을 꿇고 꽃을 바치는 스승의 날 의식과 조례 때 애국가 제창 등을 비판하는 운동을 이끌었다. 18세가 되던 해에는 태국에서 최초로 병역 거부를 선언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태국 사회가 변화하고 있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지금 태국 군대는 인류와 나라를 위해 복무하지 않는다. 정치에 군대가 악용되고 있다. 많은 청년이 군대에서 가혹행위 등으로 사망하고 있고, 이에 대한 불만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2년 뒤 생일이 되면 네티윗은 군대 대신 감옥에 가게 된다. 스물여섯 살이 되면 더 이상 징집을 미룰 수 없다.

트위터에 만들어진 ‘밀크티 동맹’

온라인은 이들의 또 다른 활동 기반이다. 올해 초 이들은 트위터에서 ‘우리에게 왕이 왜 필요한가’(#WhyDoWeNeed aKing)라는 해시태그를 확산시켰다. 7월에는 ‘보이콧 레드불’(#BoycottREDbull)이라는 해시태그가 확산됐다. 레드불 창업자의 손자가 뺑소니 사고를 냈는데 이에 대해 검찰이 불기소 처분을 내린 것에 대한 비판이다. 9월에는 트위터에서 ‘밀크티 동맹’(#MilkTeaAlliance)이 만들어졌다.

네티윗은 “중국 정부는 여러 국가 많은 사람의 삶을 고통스럽게 한다. 우리가 연대하지 않는다면 중국에 대항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며 “그렇게 우연히 밀크티 동맹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연’이라고 했지만, 밀크티 동맹은 디즈니 영화 <뮬란> 보이콧을 이끌었고 서로 국가에 이슈가 있을 때마다 지지 성명을 발표하는가 하면 각국 언론에 연결해주는 역할도 한다. 다이얼로그차이나 한국대표부도 이들과 교류하며 5·18 광주항쟁을 알리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활동을 이어가는 게 쉽지만은 않다. 네티윗은 태국의 많은 활동가가 신변에 위협을 느낀다고 했다. 지난 6월에 캄보디아로 도피한 활동가 완찰레암 삿삭싯(37)이 정체불명의 검은색 밴에 태워지는 모습이 CCTV에 찍혔다. 그는 아직 실종 상태다. 2018년에는 행방불명됐던 활동가가 라오스 메콩강 강가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2014년 이후 최소 9명의 활동가가 실종됐다.

“사람들이 실종되고, 사람들을 탄압하기 위해 법이 남용될 때는 두려움이 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공포와 두려움은 분노와 용기로 바뀌었다. 공포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더 이상의 희생자가 생기길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거리로 나와 공개적으로 군주제와 군부에 반대하는 것이다.”

다시 14일, 집회에서 돌아온 네티윗은 메신저로 “오늘 집회에도 많은 사람이 모였다. 앞으로 열릴 집회는 이전에 열렸던 역사적인 집회의 규모를 넘어설 것 같다.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태국 정부는 이날 집회 참가자들이 해산하기도 전인 15일 오전 4시 긴급 칙령을 통해 오전 4시를 기점으로 5인 이상 집회금지, 국가안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보도와 온라인 메시지 금지, 정부청사 등 당국이 지정한 장소 접근금지 등의 명령을 내렸다.

<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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