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이야기

늘어나는 지역화폐 지속가능할까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생선 다듬는 손길이 분주하다. 대목은 대목. 9월 28일 추석을 앞둔 전통시장에 모처럼 활기가 돌았다. 경기 고양 능곡시장에서 17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상범씨(51)의 생선가게에도 손님 발길이 이어졌다. 가게 벽에는 제로페이와 모바일 온누리상품권 그리고 고양페이 스티커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고양페이는 고양시에서 발행하는 경기지역화폐다. 지역화폐는 지역 내 전통시장 등 특정 가맹점에서만 쓸 수 있는 상품권으로 소비자는 액면가의 10% 안팎으로 싸게 구입할 수 있다. 지역화폐 발행하는 지자체는 경기도를 포함해 전국 229곳, 발행 규모는 9조원에 달한다.

전통시장 점포 벽에 지역화폐 온누리상품권 제로페이 결제 안내 스티커가 붙어 있다. / 반기웅 기자

전통시장 점포 벽에 지역화폐 온누리상품권 제로페이 결제 안내 스티커가 붙어 있다. / 반기웅 기자

“10명이면 4명 정도가 고양페이로 결제합니다. 전보다 자주 보이는 건 맞아요.” 이씨는 최근 몇달새 지역화폐 결제 비율이 부쩍 늘었다고 했다. “그런데 전체 매출에는 거의 변화가 없어요. 결제 수단이 바뀐 거지. 그냥 ‘없는 것보다는 낫다’ 이 표현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시장에서 20년째 곱창집을 운영하는 김현숙(가명)씨의 얘기도 다르지 않았다. “매출이 늘었을 때는 정부에서 재난지원금 풀었을 때예요. 그때는 진짜 많이들 와서 드시고 지역화폐로 결제하더라고. 그때 말고는 매출에 도움되는 건 없어요.”

전통시장 상인들은 지역화폐보다 전통시장 전용 온누리상품권을 선호한다. 왜일까. 박원식 능곡시장 상인회장은 “지역화폐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다만 주요 고객이 노인인 전통시장과는 맞지 않는다. 지역화폐를 쓰려면 먼저 휴대폰에서 원하는 금액을 충전하고 써야 하는데 노인에게는 너무 어렵다”고 말했다. 전체 전통시장 이용객의 63.6%가 50대 이상이다.(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전통시장 점포경영 실태조사 결과 보고서)

지역화폐는 주로 20~40대 젊은 층에서 이용한다. 모바일 금융에 익숙한 세대다. 2019년 4월부터 2020년 8월까지 전체 경기지역화폐 이용액의 68%를 2040에서 썼다. 50~60대 이용률은 18%에 그친다. 국내 주요 소비지출 연령대가 20~40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격차가 크다.

프랜차이즈에 몰리는 지역화폐

전통시장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어디에서 지역화폐를 쓸까. 지역화폐는 지역 가맹점 사용을 제한해 역내에서 소비하도록 강제한다. ‘서울’로 몰리는 돈을 막고 소비가 역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물론 지역 내 모든 점포에서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매출 규모에 따라 사용처를 제한한다. 대부분 지자체는 연매출 10억원이 넘는 곳에서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규제를 걸어뒀다. 이는 지역화폐의 취지가 단순히 역내에서 소비하는 것뿐 아니라 골목상권을 활성화하는 데도 있기 때문이다. 브랜드 인지도가 높은 대기업 프랜차이즈 가맹점에 몰리던 돈의 일부가 동네 점포로 흘러야 성공적인 지역화폐 정책이다.

그렇다면 역내 소비의 질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2020년 상반기 경기도 기준 지역화폐 가맹점은 전체 50만3890개로 전체 가맹 업종은 33개다. 전체 지역화폐의 약 60%가 일반휴게음식점과 유통업(편의점·마트), 음료식품(제과점 등) 3개 업종에서 사용됐다. 성남과 시흥 등 일부 지자체를 제외하면 경기지역화폐는 연매출 10억 이하 프랜차이즈 가맹점과 편의점에서 사용 가능하다. 전통시장이나 골목상권보다는 도심 편의점과 대형마트 등 소수 가맹점으로 지역화폐 사용이 몰리기 쉬운 구조다. 프랜차이즈 가맹점이 다 열려 있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기존 소비패턴을 그대로 따라가기 쉽다. 고양 덕양구 아파트 상가에서 개인 피자집을 운영하는 이수철(36·가명)씨는 “지역화폐로 프랜차이즈 피자 구매가 가능하기 때문에 지역화폐 덕분에 나 같은 동네 피자집 매출이 오르거나 경쟁력이 생기는 건 아니다”라며 “세금 감면 같은 현실적인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역화폐 가맹점 / 반기웅 기자

지역화폐 가맹점 / 반기웅 기자

전체 지역화폐 가맹점 가운데 연매출 3억 미만 영세업체는 37만245개로 전체의 73.5%다. 반면 연매출 10억 이상 가맹점 수는 1만6840개로 전체 3.3%에 불과하다. 경기지역화페는 ‘연매출 10억 이하’가 가맹승인 기준이지만 일부 지자체에서는 연매출 10억원 이상의 업소에 대해서도 가맹승인을 했다. 연매출 5억~10억원 이상 가맹점은 전체 가맹점의 12%(6만1807개) 정도다.

그런데 지역화폐는 5억~10억 이상 가맹점에서 더 많이 사용된다. 12%에 불과한 5억 이상 가맹점에서 결제된 지역화폐 금액은 4977억원. 전체 가맹점의 70%가 넘는 3억 미만 영세 가맹점의 결제금액 4780억원을 웃돈다. 신정현 경기도의원(더불어민주당)은 “특정 업종과 매출 규모가 큰 소수 매장에서만 지역화폐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며 “정작 코로나19로 폐업위기에 처한 소상공인은 사각지대에 있다”고 말했다.

지자체는 왜 지역화폐를 프랜차이즈 매장과 편의점, 대형마트에 열어뒀을까. 현재 ‘한국형 지역화폐’는 발행량으로 성공 여부를 가늠한다. 전국의 지자체들이 발행금액을 정해두고 ‘완판’되면 홍보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역화폐 발행량을 빠르게 늘리려면 소비자 호응이 필수다. 소비자는 어떤 지역화폐를 원할까. 높은 할인율도 구매 요인이긴 하지만 소비자 편의는 사용처 제한을 허물수록 커진다. ‘이 매장에서 지역화폐를 쓸 수 있나’라는 고민 없이 사용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구매율이 높다. 여기서 지역화폐를 발행하는 지자체의 고민이 시작된다. 가맹점을 늘리고 규제를 풀면 그만큼 빠르게 제도가 정착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골목상권을 살린다는 취지가 퇴색되기 쉽다. 소비자 편의와 동네 상점 활성화 사이 어딘가 적절한 지점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균형이 무너졌다. 소비자 편의로 무게 중심이 기울었다. 전국 229개 지자체에서 지역화폐를 발행해 경쟁구도가 생기면서다. 더군다나 지역화폐 발행량은 지자체장의 성과로 남는다. 지역화폐 실무진들은 단기간에 발행량을 늘리는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다. 프로모션을 통해 할인·캐시백을 확대하고 가맹점 제한을 푼다. 정치경제연구소 대안의 조혜경 연구원은 “정책 취지를 살리기 위한 규제와 소비자 편의 사이의 균형을 잃는 순간 지역화폐는 소비 쿠폰으로 전락한다”며 “이미 한국에서 지역화폐는 정체성을 잃고 소비쿠폰이 됐다”고 말했다.

지역화폐 가맹점 / 반기웅 기자

지역화폐 가맹점 / 반기웅 기자

사라진 균형발전

지역화폐가 소비 쿠폰에 불과하더라도 쓰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역균형발전 차원에서 지역화폐는 여전히 유효한 아이템이다. 재정자립도가 낮고 낙후된 군 단위 지역에서 할인율 높은 지역화폐는 역내 소비를 진작시키고 지역 소득의 역외 유출을 막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 특히 공장 폐업으로 도시 전체가 위기를 맞은 군산시나 지진을 겪은 포항시 등 재난 지역에서 지역화폐는 효과적인 재난지원 정책으로 쓸 수 있는 카드다. 군산지역화폐는 출시 2년 만에 8000억원대의 판매고를 올렸는데 군산시 조사에 따르면 지역화폐 가맹점의 총매출액이 지역화폐 도입 전보다 31%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구균철 교수(경기대 경제학과)는 “지역 위기 상황에서 지자체가 지역주민에게 필요한 정책을 찾아 실행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며 “이 과정에서 지방 정부의 자율성과 정책역량이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전국 지자체 94%가 지역화폐 발행을 시작하면서 지역화폐는 ‘지역’ 화폐로 볼 수 없게 됐다. 지역불균형 해소라는 정책적 효과도 약화됐다. 전남 곡성군은 지난 2001년부터 지역화폐인 심청 상품권을 발행하고 있다. 할인율은 액면가의 10%, 지난해 12월부터는 제로페이와 연동해 모바일상품권도 발행한다. 올해 목표로 정한 유통량은 약 75억원이다.

그런데 서울에도 똑같은 지역화폐가 있다. 10%의 할인율, 제로페이와 연동하는 방식도 같다. 서울 25개 자치구에서 발행하는 서울사랑상품권이다. 한 사람이 구별로 최대 100만원까지 구매할 수 있는데 구매자 대부분이 100만원어치를 구매한다. 구매력 있는 소수 소비자가 상품권이 풀리면 ‘묻지 마 구매’를 하면서 상품권은 풀리는 족족 조기 품절된다. 강남 등 일부 자치구는 발행 10여분 만에 완판된다.

잇따른 매진에 서울시는 올해에만 두 차례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 4000억원 규모의 상품권을 발행했다. 서울 자치구 가운데 재산세 부과액 1위인 강남구와 재정자립도 전국 최하위권인 곡성군에 똑같은 지역화폐가 유통되고 있는 것이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지역화폐는 낙후된 지역에 제한적으로 유통해야 효과가 있다”며 “최소한 지역별 할인율이라도 차등을 둘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지역의 재정자립도와 경제상황에 따른 맞춤형 지역화폐를 만들 수는 없을까. 지난 5월에 제정된 지역사랑상품권 이용 활성화에 관한 법률(지역사랑상품권법)은 각 지자체장이 상품권 발행 권한을 갖도록 규정한다. 상품권의 종류와 발행에 필요한 사항은 지자체 조례로 정한다. 지자체 스스로 차별화된 ‘지역’화폐를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천편일률적인 지역화폐들

그런데 발행되는 지역화폐는 천편일률적이다. 왜 그럴까. 지자체가 발행하는 지역화폐는 발행 준비부터 설계, 운영과 관리 모두를 민간 대행사업자가 맡는다. 일단 지자체장이 발행을 결정하면 속전속결로 출시되는데 이 과정에서 가맹 요건이나 사용처 제한과 같은 세부 사항은 타 지자체 지역페이를 따른다. 자칫 준비 기간을 길어지면 중앙 정부의 예산 지원을 놓칠 수 있다. 여기에 실무진들은 지자체장 재임 기간 안에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익명을 요구한 한 지자체 지역화폐 담당자는 “골목상권에 상황에 따라 구나 동별로 편의점 이용 여부를 다르게 하는 정도로 정교하게 설계를 해야 본래 취지에 맞는 지역화폐가 된다”며 “지역상권을 조사하고 지역 주민에게 지역화폐 취지를 설명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현실적으로 시간과 인력이 부족하다. 그렇다 보니 대행사에 맡기거나 다른 지역페이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화폐가 지역경제를 살릴까. 매출과 소득 증가, 고용, 생산 유발 효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현행 방식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2015년부터 지역화폐 ‘모아’를 운영해온 윤성일 마포 공동체경제네트워크 모아 대표는 지자체가 단순히 예산을 투입해 지역화폐를 양적으로 확대하는 데만 몰두할 게 아니라 지역공동체 활성화를 통해 지속가능성을 높여야 한다고 말한다. 모아는 지자체에서 발행하는 지역사랑상품권과 모양과 쓰임은 비슷하지만, 정부·지지체 지원 없이 지역 공동체가 발행 유통 관리하는 지역화폐다. 윤 대표는 “지역화폐의 지속성은 할인 인센티브가 아니라 공동체 간 관계에 있다”며 “주민들이 ‘인센티브 없어도 내가 사는 지역을 위해 지역화폐를 쓰겠다’는 인식이 확산되려면 무엇보다 공동체 역할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지역화폐가 지속가능하려면 먼저 성역화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박 교수는 “지역화폐가 향후 균형발전과 불평등완화 정책으로 발전한다면 포용적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며 “가장 큰 문제는 현행 지역화폐를 만병통치약처럼 간주하고 아무런 논리적인 비판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정치권의 태도에 있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관련기사

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