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소송제 왜 유명무실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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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동안 10건에 그쳐… “문턱 낮춰야 한다” 여론

A씨는 2007년 8월 한국투자증권이 발행한 원금비보장형 주가연계증권(ELS)에 투자했다. 중간 평가일과 만기일 삼성전자, KB금융 보통주 가격이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이면 연 14.3% 수익을 더해 상환받는 상품이었다. 만기 평가일인 2009년 8월 26일 삼성전자 주가는 기준가격을 훨씬 웃돌았고, KB금융은 장 마감 직전 상환조건인 5만4740원을 약간 웃도는 5만4800원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10분 동안 주가가 100원 떨어지는 바람에 A씨 등은 원금의 74.9%만 돌려받았다. 투자자들은 도이체방크가 10분 사이 KB금융 주식 12만8000주를 집중 매도하는 바람에 주가가 떨어졌다며 소송을 냈다. 이 소송에서 원고는 6명이었지만 전체 피해자 약 464명에게 약 86억원의 손해액이 비율에 따라 지급됐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 유족과 피해자, 환경보건시민센터 회원들이 지난 8월 31일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 앞에서 열린 가습기 살균제 참사 9주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가습기 살균제 참사 유족과 피해자, 환경보건시민센터 회원들이 지난 8월 31일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 앞에서 열린 가습기 살균제 참사 9주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소송 허가 결정에만 수년 걸리기도

2005년 주가 조작 등 증권 분야에 집단소송제가 도입된 이후, 14년이 지났지만 원고 승소 판결이 확정된 사건은 도이체방크 ELS 시세조종 사례가 유일하다. 집단소송건수 자체도 지난해 기준 10건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소송허가 결정이 난 경우는 5건에 그친다. 소송허가 결정을 받은 5건 중 3건은 화해로 종결됐다. 강지원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지난해 발표한 ‘공정거래분야의 집단소송제 도입방안’을 통해 “증권집단소송제 도입 초기에 남소의 우려가 제기됐지만 15년간 소송건수가 연간 0.9건에 그친 것을 보면 과도한 우려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집단소송제는 소송에 참여하지 않아도 피해자 일부가 제기한 소송이 승소하면 구제받을 수 있는 제도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나 아우디·폭스바겐 배기가스 조작사건처럼 소비자에게 광범위하게 피해를 끼치는 사례가 일어날 때마다 대안으로 제시돼 왔다. 지금까지는 소비자들이 집단적 피해를 입어 보상을 받으려면 단체(공동) 소송을 제기해야 했다. 단체 소송은 같은 사고를 겪은 피해자가 각자 소송을 하는 대신 모여서 하나의 소송을 제기하는 것으로 여러 사람이 모여 소송을 해 증거 수집이 상대적으로 쉽고 변호사 수임료 등도 줄어드는 장점이 있다. 5300명의 피해자가 릴리안 생리대 제조업체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소송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한계는 있다. 소비자단체가 대신해 소송을 제기하는 소비자단체 소송도 있지만 이미 발생한 손해에 대한 금전적인 배상은 청구할 수 없는 문제점이 있다.

반면 집단소송제는 소송에 참여하지 않아도 보상을 받을 수 있어 피해자를 결집시키는 효과가 있다. 실제 집단소송제가 가장 활성화한 미국은 제외신청을 하지 않는 한 원칙적으로 구성원 전부에 판결의 효력이 미치도록 하는 방식(제외신청권리·Opt-out 방식)이 적용된다.

남소를 걱정했던 집단소송제가 사실상 유명무실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오히려 활성화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받고 있다. 소송허가제도와 이에 대한 불복절차, 비용 예납제도 등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집단소송은 여타 소송과 달리 소송을 시작하려면 법원 허가를 받아야 하는 등의 진입 장벽이 있다. 소송허가 결정에 대해서도 즉시 항고할 수 있어 본안 재판 등을 포함하면 사실상 6심제 구조로 운영돼 재판이 지나치게 길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한화스마트 ELS 10 집단소송 사건에서는 2010년 12월 소송 허가신청이 제기된 후 허가결정이 확정된 것은 5년이 지난 2016년 3월이었다. 씨모텍 집단소송 사건의 경우도 2011년 10월 소송 허가신청 제기 후 2016년 11월에서야 허가 결정이 확정됐다.

불복절차·비용 예납제도 등 걸림돌

정부도 지난달 28일 입법예고한 ‘집단소송법 제정안’을 통해 이 같은 우려를 반영해 허가 결정에 대한 불복을 제한하고 본안 소송에서 다투도록 했다. 유가증권 총수의 1만분의 1(0.01%) 이상을 보유해야만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던 요건도 없애 문턱을 낮췄다.

자료 제출명령의 실효성을 확보한 점도 눈에 띈다. 최근 기업이 저지르는 불법은 은밀하게 진행되는 만큼 기업이 구체적으로 작성한 문건을 원고 측이 특정해 제출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기업이 문서 제출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특정 문서의 존재에 대해서만 진실로 인정될 뿐 문서 내용에 의해 소비자가 궁극적으로 입증하고자 하는 사실까지는 인정되지 않은 어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제정안에는 기업이 정당한 이유 없이 자료를 주지 않고 원고 측이 자료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주장하기에 곤란하거나 다른 증거를 통해 증명하는 것이 어렵다면 그 주장을 진실이라고 인정하기로 했다. 기업이 자료 제출명령에 불응한다면 해당 자료를 통해 소비자가 진실이라고 입증해야 하는 부담이 줄어든 것이다.

재계에서는 소송 부담이 커 경영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관련 소송이 제기될 경우에 복합적이고 다툼의 소지도 광범위한 사건의 속성상 시간과 비용 측면에서 막대한 소송 부담을 져야 한다”며 “기획소송 제기만으로도 감내해낼 수 없는 정도로 기업이미지가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라고 했다. 정부 일각에서도 신중론이 제기되고 있다. 경제부처 한 관계자는 “코로나19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기업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매우 큰 법안인 만큼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면 기획소송 등에 대한 우려는 지나치다는 주장도 있다. 경제개혁연대는 “원고 대리인 변호사는 승소 시 상당한 성공보수를 받을 수 있지만, 패소할 경우는 선지급한 위 비용을 상환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수년간 소송 준비로 투입한 시간을 허공에 날릴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실제 지난 9월 18일 법원이 GS건설을 상대로 낸 집단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보면 7년 동안 소송을 진행한 원고 대리인 변호사는 막대한 금전적·시간적 피해에 직면한 상태이다. 대기업을 주요 고객으로 삼고 있는 국내 법률 시장 특성상 오히려 집단소송제가 위축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강정민 경제개혁연대 연구위원은 “집단적 피해를 수반하지만 피해 입증이 쉽지 않은 사건이 방치되는 현실을 고려하면 집단소송제 확대와 같이 기업의 책임성을 강화하는 입법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상영 경제부 기자 s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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