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이지 못해도 시민 목소리 내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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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기후위기 호소 ‘신발시위’… 온라인 집회 열고 댓글로 소통

서울역 서부 만리동광장에는 ‘윤슬’이라는 공공미술 작품이 있다. 작품은 폭 25m, 깊이 4m의 광학렌즈 모양을 하고 있다. 움푹 들어간 공간은 2800개의 계단으로 연결돼 있어 노천극장 같다. 9월 12일 오후 5시. 1000켤레의 신발이 윤슬의 계단마다 놓였다. 운동화, 단화, 뾰족구두, 슬리퍼 등 종류와 크기도 가지각색이었다. 기후위기비상행동이 진행한 ‘우리는 살고 싶다- 기후위기를 넘는 행진 퍼포먼스’다. 기후행동 관계자, 연대 발언자 등 일부 인원만 현장에 있었다. 이 비대면 집회는 유튜브로 생중계됐다. 참가자들은 ‘2050년 온실가스 순배출 제로’를 촉구했다.

기후위기비상행동 회원들이 9월 12일 서울 중구 서울로 7017 만리동광장에서 ‘우리는 살고 싶다' 기후위기를 넘는 행진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 기후위기비상행동

기후위기비상행동 회원들이 9월 12일 서울 중구 서울로 7017 만리동광장에서 ‘우리는 살고 싶다' 기후위기를 넘는 행진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 기후위기비상행동

모이지는 못해도

지난해 9월에도 똑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집회가 있었다. 서울 대학로에 5000여명이 모였다. 참가자들은 대학로에서 종각까지 한 시간가량 행진했다. 종로거리 한복판에 드러눕기도 했다. 기후위기가 모든 인류와 생명을 위협한다는 것을 경고하는 ‘다이-인(die-in)’ 퍼포먼스였다.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모일 수 없었다. 시민들이 기증한 신발이 대신 행진했다.

“직접 모일 수도 없는 위기의 시대지만요, 저희는 저희의 방식대로 이렇게 모였습니다.” 사회자가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코로나19는 한 공간에 여러명이 모여 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전통적인 집회의 방식을 바꿔놓았다. 시민들은 저마다의 상상력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네덜란드의 의료·돌봄 종사자들이 9월 5일 헤이그의 한 공원에서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신발 시위를 벌이고 있다. / EPA연합뉴스

네덜란드의 의료·돌봄 종사자들이 9월 5일 헤이그의 한 공원에서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신발 시위를 벌이고 있다. / EPA연합뉴스

조천호 대기과학자의 연대발언은 왜 이렇게라도 모여야 했는지를 말해준다. “2018년 정부 간 기후변화 협의체 IPCC 총회에서 기후과학자들은 지구 평균기온 상승이 1도와 2도 사이에서도 돌발적인 기후위기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미 지구 평균기온은 1도 상승한 상황입니다. (…) 우리는 기후위기를 처음 인식한 세대이자 그 위기를 막을 수 있는 마지막 세대입니다. 과학적 인식을 토대로 지금 당장 행동해야 합니다.”

전국에서 모인 신발

지난 5월 18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트래펄가광장에도 어린이 신발 약 2000켤레가 일정한 간격으로 놓였다. 환경단체 ‘멸종저항’이 정부가 탄소집약적 산업을 구제하려는 데 항의하며 기후위기에 대응할 적극적 조치를 촉구하는 방식이었다. 2015년 11월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1) 개막을 하루 앞두고 프랑스 파리 레퓌블리크광장에 수천 켤레의 신발이 놓인 적이 있다. 파리 테러 사건으로 시위 금지령이 내려지자 이에 맞서 의미 있는 협약 타결을 촉구한 것이다. 5년 전의 신발시위는 올해 전 세계를 뒤덮은 불청객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재현됐다.

환경단체 ‘멸종저항’이 5월 18일 영국 런던 트래펄가광장에서 어린이 신발 2000켤레를 놓아두고 정부의 적극적인 기후위기 대응을 촉구했다. / 멸종저항 페이스북

환경단체 ‘멸종저항’이 5월 18일 영국 런던 트래펄가광장에서 어린이 신발 2000켤레를 놓아두고 정부의 적극적인 기후위기 대응을 촉구했다. / 멸종저항 페이스북

이지언 기후행동 집행위원장은 “신발은 우리가 못 모여서 대신 참가하는 의미도 있다. 신발만 덩그러니 있다는 건 기후위기로 인해 생물 멸종이 가속화된다는 걸 보여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신발을 얼마나 보내왔을까. “반응이 폭발적이었어요. 3000켤레가 넘게 도착했습니다. 직접 저희가 마련한 수거함에 넣어주기도 하고 전국에서 택배가 왔습니다. 윤슬 광장에 1000켤레밖에 들어가지 않아 아쉬웠어요.” 신발은 필요한 곳에 기증된다. 시민들은 신발과 함께 한마디씩 써보냈다. 한 시민은 이렇게 남겼다. “체념과 무기력을 뚫고 함께할 수 있는 행진이 있어 고맙습니다. 함께합니다.”

신발시위는 환경운동만의 영역이 아니다. 9월 5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한 공원 잔디는 간호사 등 의료·돌봄 종사자들의 신발로 가득 찼다. 의료 종사자들이 노동조건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신발로 대신 시위를 벌인 것이다. 참가자들은 처우 개선에 미온적인 정치권을 두고 “정치는 우리와 게임을 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박수를 받는 것도 좋지만 존경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노르웨이·독일 등에서 난민 수용을 촉구하며 열린 집회에선 신발이 난민을 대표했다.

코로나19 위기 속에서도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forFuture)’ 해시태그는 이어지고 있다. 스웨덴의 10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기후위기를 위한 즉각적 대응을 촉구하기 위해 2018년 8월 시작한 금요 결석시위는 이제 ‘미래를 위한 금요일’ 운동으로 전 세계에 번졌다. 툰베리는 코로나19가 확산하자 손팻말을 들고 찍은 사진에 해시태그를 달며 온라인 시위를 독려해왔다(최근 스웨덴 의회 앞에서 1인시위를 재개했다).

청소년기후행동이 삼성물산의 베트남 석탄발전소 건립 사업 참여 철회를 촉구하며 진행한 온라인 행동 / 청소년기후행동 페이스북

청소년기후행동이 삼성물산의 베트남 석탄발전소 건립 사업 참여 철회를 촉구하며 진행한 온라인 행동 / 청소년기후행동 페이스북

충북의 시민사회단체들이 9월 9일 SK하이닉스 LNG 발전소 건립을 반대하는 온라인 집회를 열고 있다. / 유튜브 캡처

충북의 시민사회단체들이 9월 9일 SK하이닉스 LNG 발전소 건립을 반대하는 온라인 집회를 열고 있다. / 유튜브 캡처

‘미래를 위한 금요일’에 동참하는 한국의 청소년들도 온라인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청소년기후행동은 최근 삼성물산의 베트남 석탄발전소 건립 사업 참여 철회를 촉구하는 온라인 행동을 벌였다. 오는 9월 25일에는 전 세계 청소년들이 ‘세계 기후정의를 위한 행동의 날’ 시위를 벌인다. 한국의 청소년들도 온라인 행동을 기획하고 있다.

방법은 있다

‘드라이브 스루’ 방식의 집회도 눈길을 끌었다. 지난 5월 16일 ‘5·18 광주항쟁 40주년 기념사업 시민추진위원회’는 서울 여의도를 출발해 전두환씨 자택이 있는 서대문구 연희동으로 향했다. 차량 70여대가 무릎을 꿇은 전씨 모습의 조형물을 실은 트럭을 필두로 줄지어 이동했다. 전씨 자택 인근에선 경적을 울렸다. 매년 광화문광장에서 열리던 세월호 참사 추모행사도 올해는 차량행진이 대신했다. 참가자들은 차량 앞뒤에 노란 깃발을 꽂고 경기 안산에서 광화문까지 행진했다. 동물자유연대, 동물행동권 카라 등 동물권 단체들은 초복이었던 7월 16일 서울 시내를 차로 돌며 ‘개식용 금지’를 촉구했다.

“동영상 오픈 시점 발송된 링크를 마구 퍼나른다. 집회에 입장 후 사회자의 구호에 맞춰 제멋대로 댓글 구호를 격정적으로 단다. 집회 종료 후 영상을 여기저기 퍼나른다.”

9월 9일 열린 SK하이닉스 LNG 발전소 건립 반대 집회의 수칙이다. 이 집회 장소 역시 ‘온라인’이었다. 대책위는 대기오염 등을 이유로 SK하이닉스 LNG 발전소 건설을 반대해왔다. 사회를 본 박종순 청주충북환경운동연합 정책팀장은 “사회적 거리 두기 기간이 연장돼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부 방침을 따라야 하고 집회도 필요했다. 그래서 새로운 방법을 찾은 것”이라고 했다. 박 팀장은 “일반 집회는 경직되고 무거운 면이 있는데 온라인 집회는 그런 분위기로 가면 시청자들이 재미없어 나간다. 1시간 동안 집회에 집중할 수 있도록, 나가지 않도록 하는 게 최대 목표였다”고 했다.

이날 100여명이 온라인 집회에 동참했다. 2명의 사회자는 모니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참가자들의 댓글을 읽고 소통했다. 사회자가 “청주시는 숨지 말고 시민의 목소리를 들어라”라고 구호를 외치면, 참가자들은 “들어라! 들어라!” 댓글을 달았다. ‘열혈 댓글자’에게는 선물이 돌아갔다. 집회 중간중간 환호 소리 효과음이 들렸다. 청주시청 앞에 나가 있는 리포터가 1인시위를 하는 시민과 실시간 인터뷰도 했다. 대책위는 9월 25일 2차 온라인 집회를 예고했다. “수고 많으셨어요. 온라인 집회가 정말 재미지네요.”, “다음엔 200명~”과 같은 댓글이 달렸다.

매년 여름 서울 도심을 무지갯빛으로 물들인 서울퀴어문화축제도 올해는 9월 18일부터 12일간 온라인으로 열린다. 코로나19 상황으로 두 차례 일정이 변경됐다. 지난 6월 온라인 영상매체 ‘닷페이스’는 퀴어축제가 연기되자 ‘온라인 퀴어 퍼레이드’를 진행했다. 각자 취향껏 캐릭터를 꾸민 뒤 캐릭터 이미지에 해시태그를 달아 SNS에 공유하는 방식이었다. 이미지들이 모여 실제 퍼레이드 기분을 냈다. 퍼레이드의 이름은 ‘우리는 없던 길도 만들지’였다.

<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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