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음모 집단 ‘큐어넌’은 어떻게 세계로 퍼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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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탄생한 온라인 음모론 집단 큐어넌(QAnon)이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독일과 프랑스, 브라질, 호주 등 각국 상황에 맞춰 큐어넌의 음모론이 퍼진다. 말하자면 큐어넌의 ‘세계화’다. 문제는 온라인에서 ‘가짜뉴스’를 뿌리던 이들이 이제 거리로 나와 극우세력 집회와 결탁한다는 것이다. 큐어넌의 성장은 곧 ‘민주주의의 위기 신호’라는 경고가 나온다.

2018년 8월 2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배러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유세 집회를 앞두고 한 시위자가 온라인 음모론 집단 큐어넌을 뜻하는 ‘Q’라는 글자 소품을 들어보이고 있다. / AP연합뉴스

2018년 8월 2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배러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유세 집회를 앞두고 한 시위자가 온라인 음모론 집단 큐어넌을 뜻하는 ‘Q’라는 글자 소품을 들어보이고 있다. / AP연합뉴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큐어넌을 들어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큐어넌은 2017년 10월 미국 인터넷 게시판인 4챈에 ‘Q’라는 닉네임을 쓰는 이가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등을 겨냥한 각종 음모론을 제기하면서 탄생했다. ‘Q’는 수천명의 지지자가 생기자 자신이 기밀정보 접근 권한을 가진 백악관 내부고발자라고 주장했다. 큐어넌은 미 에너지부 최고기밀등급을 뜻하는 ‘Q’에, ‘익명의(anonymous)’란 단어를 붙여 만든 조어다.

큐어넌의 실체와 세계화

큐어넌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클린턴 전 국무장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투자자 조지 소로스를 포함한 엘리트 집단을 제거하기 위한 비밀 업무를 수행한다’고 믿는다. 이들은 엘리트 집단이 ‘딥스테이트(deep state)’라는 비밀 세력과 결탁돼 있고, 소아성애·인신매매 등을 즐기는 범죄 조직이라고 주장한다. 전문가들은 큐어넌이 기존 극우세력과 다른 점은 ‘종교적 종말론’에 강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분석한다.

큐어넌은 ‘미국적 환경’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추종자들이 만드는 음모론은 국경을 매우 쉽게 넘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9월 8일 웹사이트·소셜미디어 신뢰성을 평가하는 미 시민단체 뉴스가드의 보고서를 인용해 큐어넌이 최근 유럽을 비롯해 해외에서 자리 잡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영국과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루마니아, 호주 등에서 큐어넌의 웹사이트 및 소셜미디어 계정이 등장했고, 급속도로 팔로워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유튜브에서 독일어로 개설된 큐어넌 페이지의 조회수는 1700만건을 넘어섰다. 독일어 큐어넌 텔레그램 계정 팔로워도 12만4000명에 달한다. 지난달 말 브라질 일간 에스타두 지 상파울루가 자체 조사한 결과, 브라질에선 큐어넌 추종자가 170만명가량으로 추산됐다. 최근까지 큐어넌이 활동하는 국가는 최소 15개국이라고 영국 가디언은 집계했다.

큐어넌은 각국 극우세력과 손잡고 음모론을 토착화시킨다. 뉴욕타임스는 독일 극우파들이 큐어넌의 탄생 이전부터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외국 정부와 손을 잡고 독일 문화와 인종을 말살하기 위해 일부러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식의 음모론에 노출돼 있었기 때문에 큐어넌식 음모론에도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뉴스가드의 유럽 에디터인 차인 라비는 지난 12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세계 어느 나라든 엘리트 집단이 있고, 큐어넌은 이미 각 지역에 퍼진 음모론을 추려내 ‘비밀 세력’과 연관시키기 때문에 빠르게 퍼져나간다”고 말했다.

큐어넌의 득세는 ‘민주주의의 위기’

지난 8월 29일 독일 베를린에서 정부의 코로나19 방역 지침에 반대하는 집회에서 한 시위 참가자가 “우리는 ‘Q’”라고 쓰인 종이를 들고 나왔다. ‘Q’는 미국에서 탄생한 온라인 음모 집단 ‘큐어넌’을 가리킨다. /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8월 29일 독일 베를린에서 정부의 코로나19 방역 지침에 반대하는 집회에서 한 시위 참가자가 “우리는 ‘Q’”라고 쓰인 종이를 들고 나왔다. ‘Q’는 미국에서 탄생한 온라인 음모 집단 ‘큐어넌’을 가리킨다. / 로이터연합뉴스

큐어넌은 소셜미디어를 토대로, 특히 올해 코로나19 확산을 계기로 당국의 방역 지침에 대한 대중의 불만, 반체제 정서에 기승해 세를 키웠다. 구글 트렌드 분석에 따르면 7월 큐어넌 검색 관심도는 1월 중순에 비해 10배가량 높았다. ‘빌 게이츠가 인구 조절을 위해 코로나19를 퍼뜨렸다’는 음모론은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믿었다. 독일에서는 지난달 말 음모론을 믿는 시민들이 ‘반(反) 마스크’ 집회를 열어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지난 6월 브라질리아에선 ‘코로나19 방역 실패’ 평가를 받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 지지자들이 큐어넌 추종자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함께하자’는 뜻을 의미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왔다. 호주에선 9월 5일 정부의 코로나19 방역 지침에 반대하는 ‘자유의 날’ 시위에서 큐어넌 추종자들이 등장했다. 문제는 이러한 큐어넌의 음모론과 집회가 당국의 코로나19 방역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선 인종차별 항의 시위 현장 곳곳에서 큐어넌의 음모론이 득세했다. 최근 미 서부 지역 산불이 확산하자 ‘극좌파들이 산불을 일으키고 있다’는 가짜뉴스가 퍼졌다. 소방 당국에 문의 전화가 쇄도하면서 당국이 애를 먹었다. 음모론을 믿는 오리건주 포틀랜드 일부 주민들은 대피명령도 거부한 채 자체 검문소를 세웠다.

큐어넌의 득세는 미 정치권에 책임이 적지 않다. 미연방수사국(FBI)은 지난해 큐어넌을 국내 테러리즘 위협 가능성이 있는 집단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 인사들은 큐어넌을 옹호하는 듯한 행보를 보여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기자회견에서 큐어넌 음모론자들에 대해 “그들은 나를 매우 좋아하는 것으로 안다”며 호감을 드러냈다. 뉴스가드에 따르면 11월 미 대선과 함께 치러지는 연방 상·하원 선거에 나가는 공화당 후보 중 큐어넌 지지자는 12명이나 된다.

소셜미디어 기업들의 대처가 늦었다는 지적도 있다. 소셜미디어들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음모론 확산 대처를 소홀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트위터는 지난 7월 큐어넌 관련 계정 7000개를 삭제했고, 15만개의 계정은 검색에서 걸러지도록 조치했다. 페이스북도 지난달 큐어넌 연관 그룹 1만개 계정을 삭제하거나 제한했다.

큐어넌은 이제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콘스탄틴 폰 노츠 독일 하원의원은 9월 7일 뉴욕타임스에 “모든 수단을 동원해 민주주의 담론을 파괴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현상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 기반 급진 우익 분석센터의 연구원인 차밀라 리야네이지는 지난 8월 27일 터키 TRT월드에 “큐어넌의 세계적 확산은 매우 우려스럽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라고 말했다.

<김향미 국제부 기자 sokh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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