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잊힌 승전’ 절이도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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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7월 전남 고흥군 절이도(현 거금도) 인근 해역에서 벌어진 ‘절이도 해전’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해전사에서 거의 부각되지 않았다. 왜선 50여척을 부순 승리였지만, 당시 기록에서 절이도 해전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종 기록에서 전투 날짜가 각각 다르고, 전투 상황이 서로 다른 것도 절이도 해전에 대한 역사적 고증을 어렵게 만들었다.

전남 고흥군 거금도(옛이름 절이도)에서 보면 북서쪽 방향으로 작은 섬 우동도가 있다. 우동도의 왼쪽 위쪽이 절이도 해전의 교전 예상 지점이다. / 고광섭 교수 제공

전남 고흥군 거금도(옛이름 절이도)에서 보면 북서쪽 방향으로 작은 섬 우동도가 있다. 우동도의 왼쪽 위쪽이 절이도 해전의 교전 예상 지점이다. / 고광섭 교수 제공

이런 가운데 절이도 해전이 지형학적으로 거금도 북서쪽 바다에서 펼쳐졌고, 이순신 장군이 이 해전에서 학익진을 펼쳤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고광섭 목포해양대 교수(해군사관학부)는 한국해군과학기술학회지에 ‘절이도 해전의 교전 상황 및 학익진 연구’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이 학회지는 9월 말 발간될 예정이다. 이 논문에서 고 교수는 “절이도 해전은 이순신 장군이 7월 19일 아침 6시께 절이도 북서쪽 1~2km 해역에서 왜 수군 100여척을 상대로 학익진을 펼쳐 적선 50여척을 수장시킨 역사적인 해전”이라고 결론 내렸다. 절이도 해전의 시간, 장소, 전투 방식이 밝혀진 것이다.

시간·장소·전투 방식 고증

고 교수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클라크슨대 대학원에서는 전자항법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항법 전문가인 그는 거금도의 전장 환경을 고려해 교전 상황을 시뮬레이션함으로써 사료 속 사실을 고증했다. 그가 기준으로 삼은 사료는 실록이었다. 고 교수는 “이순신 장군의 장계를 바탕으로 실록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실록이 가장 신뢰도가 높은 사료”라고 말했다.

1598년 8월 13일 <선조실록>에는 “지난번 해상 전투에서 아군이 총포를 일제히 발사해 적선을 쳐부수자 적의 시체가 바다에 가득했는데, 급한 나머지 끌어다 수급을 다 베지 못하고 70여급만 베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선조수정실록> 8월 1일자에는 “이순신이 진린(陳璘)과 더불어 연회를 하려는데 적이 습격하려 한다는 보고를 듣고는 제장(諸將)으로 하여금 군사를 정돈해 대기하게 하였다. 얼마 후 적선이 크게 이르자 이순신은 스스로 수군을 거느리고 적중으로 돌격해 들어가면서 화포를 쏘아 50여척을 불사르니, 적이 마침내 도망갔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순신 장군의 조카인 이분이 충무공 사후에 쓴 <이충무공행록>에는 “7월 18일 적선 100여척이 녹도를 침범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공(이순신 장군)과 도독(진린)은 각각 전선을 거느리고 금당도에 이르렀다. 적선이 다만 2척이 있었는데 우리 군대를 보고 도망쳐 달아났다. 공과 도독이 그대로 돌아왔다”라고 나타나 있다. 또 <이충무공행록>의 7월 24일 기록에는 절이도에서 보고가 들어오기를, 새벽에 적을 만나 조선 수군이 물리쳤고 명나라 군대는 싸우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쪽 주변의 위치를 보면 고흥반도의 최남단에 녹동항이 있고, 여기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소록도가 있다. 왜 수군 100여척이 소록도를 방패 삼아 숨어 있을 만한 장소다. 소록도의 서남단 멀리에는 조선 수군의 기지가 위치한 전남 완도군 고금도가 있다. 그 사이에 금당도와 거금도가 있다. 고 교수는 왜 수군 100여척의 움직임을 알게 된 조선 수군이 그날 밤 먼 곳에 있는 고금도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인 금당도로 돌아간 것으로 추론했다. 당시 기록에는 ‘돌아갔다’는 내용만 나와 있다.

왜 수군이 있었던 녹동항에서 조선 수군이 있었던 금당도까지의 거리는 대략 15km다. 고 교수는 “전투 시점이 새벽이라는 기록을 감안하면 왜 수군이 해 뜨는 시간에 녹동항에서 출동했고, 조선 수군은 왜 수군의 움직임을 알게 된 후 금당도에서 긴급 출항했다”면서 “양쪽 수군의 기동 속력(3.5∼6노트)을 넣어 시뮬레이션한 결과 양쪽에서 7km 떨어진 중간지점, 거금도 북서쪽(우동도 인근) 넓은 바다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고 교수는 “이순신 장군의 기존 전술로 봤을 때 조선 수군이 소록도와 거금도 사이의 작은 섬 주위 좁은 곳으로 들어갔을 리가 없다”면서 “조선 수군의 경우 총통의 사거리가 1km에 이를 정도로, 조총보다 사거리가 길기 때문에 넓은 해역에서 교전하는 것이 유리했다”고 말했다.

고광섭 교수가 추론한 1598년 7월 19일 절이도 해전의 전투 상황

고광섭 교수가 추론한 1598년 7월 19일 절이도 해전의 전투 상황

“1:1 함대결전 벌였을 것”

2000년대에 새롭게 발굴된 <충무공유사>에서는 이 전투가 7월 24일 벌어진 것으로 나타나 있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절이도 해전에 대해 7월 19일설과 7월 24일설이 있었다. 고 교수는 7월 18일 왜 수군 100여척의 움직임이 보고된 것을 기준으로 삼아 7월 19일 새벽에 전투가 일어났다고 보았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초기에 왜 수군의 소부대만 격파하는 현존함대 전략을 쓰다가 한산도 해전에서 함대결전을 시도했다. 왜 수군은 한산도 해전 패배 이후 소극적인 요새함대 전략을 구사했다. 고 교수는 거금도 북서쪽 바다에서 조선 수군과 왜 수군이 1:1 함대결전을 벌였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함대결전은 양쪽이 각각 자신의 힘을 확신하고 있을 때 쓰는 방식이다. 절이도 해전은 명량해전(1597년 9월)과 노량해전(1598년 11월) 사이에 벌어진 전투다. 왜 수군은 남해안 전체를 장악하려 했다. 반면 조선 수군은 명량해전 이후 10개월 사이 힘을 비축했다. 명량해전에서 13척에 불과했던 배는 이 사이 60여척으로 늘어났다. 절이도 해전은 양쪽 수군이 벌인 정면대결인 셈이었다.

고 교수는 이곳 전장 환경과 이순신 장군의 전술을 고려했을 때 근접전·장사진 등의 해전 형태가 아니라 학익진이 펼쳐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고 교수는 논문에서 “거금도 해협 외해는 반경 2km 넘는 해역으로 학익진을 형성하기에 좋은 여건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학익진은 한산도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사용해 크게 승리한 전투 형태다. 학의 날개처럼 넓게 벌려 왜 수군을 에워쌈으로써 총통의 적중률을 높일 수 있었다.

절이도 해전은 최근 학계에서 부각됐지만, 사료의 한계로 벽에 부딪힌 상태였다. 고 교수는 “이순신 장군의 해전사는 사료뿐만 아니라 당시 이순신 장군의 전략전술, 무기 체제의 성능, 전선(戰船)의 특성, 바다라는 전장 환경 등을 융합적으로 고려해 인문학적·과학적 추정을 해나가야 한다”면서 “절이도 해전 연구 역시 이런 차원에서 어떻게 전투가 벌어졌는지를 추론했다”고 말했다.

<윤호우 선임기자 h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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