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표현’ 대 ‘재갈 물리기’ 웹툰계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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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안84 웹툰으로 촉발된 논쟁…‘창작의 자유’ 미명하에 방치 중인 웹툰 플랫폼 책임도

혐오 표현이냐, 창작의 자유냐를 두고 웹툰·만화계 안팎의 논쟁이 뜨겁다. 논란의 발단이 된 인물은 방송인으로도 활동하는 유명 웹툰작가 기안84(36·본명 김희민)다. 전부터 여성과 이주노동자, 장애인 등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작품에 그대로 반영했다며 비판을 받았던 그가 연재 중인 웹툰 <복학왕>에서 또 한 번 여성혐오 논란을 촉발시킨 것이다. 논쟁은 소수자를 향한 혐오·비하 표현에 민감한 ‘정치적 올바름(PC)’을 강조하는 입장과 이들이 과도한 반응으로 표현과 창작의 자유를 위축시킨다는 입장이 맞서며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만화계성폭력대책위원회, 기본소득당 젠더정치특별위원회 등 정당·시민단체 회원들이 8월 19일 경기 성남시 네이버웹툰 본사 앞에서 기안84 웹툰 <복학왕> 연재 중단 등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연합뉴스

만화계성폭력대책위원회, 기본소득당 젠더정치특별위원회 등 정당·시민단체 회원들이 8월 19일 경기 성남시 네이버웹툰 본사 앞에서 기안84 웹툰 <복학왕> 연재 중단 등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연합뉴스

논란이 된 기안84의 웹툰 <복학왕>의 대목은 ‘무능한 여성이 남성 직장상사와의 성관계를 맺은 덕에 정직원으로 채용되는 데 성공했다’고 읽힐 수 있는 내용이다. 작품의 여자 주인공인 봉지은은 대기업 인턴으로 일하고 있지만, 업무 능력이 미숙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정직원 채용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회식 자리를 빌려 해달처럼 조개를 배에 올린 뒤 깨부수는 일종의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이후 상사인 남성 팀장은 다른 인물과의 대화 장면을 통해 봉지은을 정직원으로 채용했다고 말하며 “잤어요?”라는 물음에 “ㅋ”라고 답한다. 일부 독자들은 두 사람이 성관계 후 채용이 결정됐다는 사실을 암시한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여성을 보는 작가의 시각을 비판했다.

사회적 약자를 향한 비하·혐오

여성이 ‘성 상납’을 통해 일자리를 얻으려 애쓰는 모습이 여성혐오에 해당한다고 본 독자들은 청와대 국민청원에 <복학왕> 연재 중단을 요청하는가 하면, 작가가 출연하는 MBC <나 혼자 산다> 게시판에도 하차를 요구하고 있다. 유독 기안84 작가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센 배경에는 과거에도 그가 비슷한 지적을 받아온 이력이 자리 잡고 있다. 문제를 여러 차례 일으켰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도 같은 작품에서 동남아시아 출신 이주노동자와 청각장애인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비판을 받았다. 지난 6월 또 다른 작품 <회춘>에서 <나 혼자 산다> 출연진 이름과 비슷한 캐릭터를 등장시켜 룸살롱에 방문한 남자 손님과 그를 접대하는 여자 종업원으로 표현한 점도 입길에 올랐다.

기안84 작가는 논란이 된 장면이 일종의 풍자로 읽히길 바랐으나 표현과 전달이 서툴러 오해를 불러일으켰다고 해명했다. 그는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봉지은이 귀여움으로 승부를 본다는 설정을 추가하면서 이런 사회를 풍자하고 싶었다”며 “봉지은을 해달에 비유하려고 조개를 배에 올렸다”고 해명했다. 이후 문제가 된 장면은 다른 그림으로 바뀌어 수정본이 재게재된 상태다.

작품 속 장면이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여지도 없지 않기 때문에 논란은 쉬 그치지 않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중견 만화가는 해당 장면에 대해 “여성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성을 도구로 썼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성적인 착취를 거쳐야만 고용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비틀어 풍자한 것으로 볼 여지도 있긴 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물론 풍자의 의도로 그렸다고 해도 의도가 명확하게 독자에게 전달되지 못해 반대로 오해를 불렀다면 그 점은 작가에게 분명 책임이 있으므로 비판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 출판만화가 전성기를 맞던 1990년대 이전까지 국내 만화시장에서는 사실상 검열에 가까울 정도로 만화 창작에 각종 규제가 뒤따른 바 있다. 작품 연출에 꼭 필요한 장면들도 성적인 묘사가 있으면 청소년 정서에 유해하다는 이유를 들어 잘려나갔다. 1997년 7월 <천국의 신화>를 그린 이현세 만화가가 ‘음란만화’를 제작했다는 혐의로 검찰수사까지 받았던 일이 대표적이다. 청소년보호법 제정 이후 만화에 대한 사전검열이 사후심의로 바뀌기는 했으나 오히려 과도한 심의는 유지된 탓에 만화가들은 2012년에 와서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심의 강화 방침에 맞서야만 했다.

논란이 된 기안84 작가의 <복학왕> 중 한 장면. 등장인물 봉지은이 배에 조개를 놓고 깨고 있다. / 네이버웹툰 캡처

논란이 된 기안84 작가의 <복학왕> 중 한 장면. 등장인물 봉지은이 배에 조개를 놓고 깨고 있다. / 네이버웹툰 캡처

검열받던 과거가 부른 트라우마

당시의 기억을 트라우마처럼 갖고 있는 중견·원로 만화가들이 이번에 벌어지고 있는 기안84를 둘러싼 논쟁에 강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나선 작가는 <풀하우스>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원수연 작가다. 그는 “작가들이 같은 작가의 작품을 검열하고 연재중단 시위를 벌이는 초유의 사태가 만화계 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다”며 “이들의 연재 중단 운동은 50년이 넘도록 심의에 시달려온 선배님들과 동료작가들이 범죄자로 몰리면서까지 투쟁해서 쟁취한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거꾸로 돌리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웹툰 작가 단체 중 하나인 웹툰협회에서도 “작가와 작품에 대한 비판은 얼마든지 가능하나 작가 퇴출, 연재 중단 요구는 파시즘”이라고 강경하게 맞서고 있다. 만화계성폭력대책위원회 등이 기안84 작가의 작품을 연재하는 네이버웹툰 본사 앞에서 연재 중단 등을 요구하는 등 여론전에 앞장선 데 따른 것이다. 논쟁의 구도가 만화계 내부에서 벌어지는 첨예한 갈등을 넘어 정당·시민단체까지 연관되면서 확대되는 양상도 나타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만화계 일각에서는 작가 개인만 논란의 여파를 감당하게 하고 한 발 뒤로 물러서 있는 플랫폼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도 나온다. 혐오·비하 표현을 규제할 방도를 찾기 위해선 작가와 플랫폼 소속 편집자의 소통과 사전예방이 필수적임에도 네이버웹툰 등 거대 플랫폼은 ‘창작의 자유 보장’만을 내세우며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조경숙 만화평론가는 “네이버웹툰이 말하는 ‘창작의 자유’는 지금까지 만화계가 투쟁해 왔던 ‘창작의 자유’와는 완전히 다른 용어”라며 “작품 안에서 일어난 혐오 표현에 대한 플랫폼의 책임을 가리고 작가에게 책임을 더 부과하며, 나아가 독자들에게는 피드백 반영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근거로서 ‘창작의 자유’를 차용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지금처럼 작가 개인에게 모든 책임이 돌아가는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논란이 언제든 재점화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표현·창작의 자유와 혐오 표현 사이의 딜레마는 만화계를 넘어 다양한 영역에서 계속 드러나고 있는 만큼 치열한 논쟁을 거쳐 최소한의 합의점만이라도 만들어둬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 웹툰 작가는 “표현의 자유에 제약이 가해지는 기준을 사회적 약자에 두고 봐야 한다는 막연한 원칙이야 작가들도 알고 있지만 실제로 어떤 장면이 문제가 될지는 작가가 모두 예상하기 어렵다”며 “구체적인 대안이 제시되면 오히려 판단하기 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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