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물증이 없더라도 유죄 선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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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자료 등 물증이 없는 상황에서 유력 정치인에게 뇌물을 제공했는지가 문제된 사건에서 대법원은 준 사람의 말이 신빙성이 있다고 보아 유죄를 선고했다.

재판 기사는 실시간으로 보도된다. 양측의 입장과 공방을 지켜본 독자들은 답답함을 호소하곤 한다. 재판정에 선 법률가들의 주장과 논리가 온전히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박형남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가 격주로 ‘법정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연재한다. 박 부장판사는 자신의 재판 경험을 녹여 재판과 법률을 둘러싼 오해와 진실을 다룬다.

[법정에서 못 다한 이야기](1)물증이 없더라도 유죄 선고할 수 있다

세상을 뒤흔들 만한 사건이 터지고 특수부 검사와 유명 변호사가 치열하게 다투면, 언론은 법정에서 ‘실체적 진실’이 밝혀질 거라고 보도한다. 유감이지만 유·무죄를 가를 마법의 열쇠를 찾기란 쉽지가 않다.

1999년 5월 재벌총수 부인이 장관 부인의 알선으로 검찰총장 부인에게 고급 옷을 선물했다는 ‘옷로비 의혹사건’이 터졌다. 수사와 재판, 국회 청문회에 나온 사람들은 서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로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있었다면 로비가 성공했는지에 대해 판단하는 사람마다 결론이 전부 달랐다. 밝혀진 것은 증인 선서 때 나온 ‘앙드레 김’의 본명뿐이라는 우스개만 남았다.

피고인은 검사가 범죄 혐의가 있다고 해서 기소한 사람이다. 나중에 대부분 유죄 판결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법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고 선언한다.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을 처벌하기보다는 열 명의 범인을 놓치는 것이 낫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에 유리하게’라는 법언에 따른 것이다. 형사재판을 한 손에 칼을 들고 다른 손에 저울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상’으로 보면, 검사는 저울 한쪽에 유죄의 증거를 올려놓고 변호인은 다른 한쪽에 무죄의 증거를 올려놓으면, 판사는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 판단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저울이 되돌릴 수 없이 검사 쪽으로 기우는 경우에만 유죄로 선고할 수 있다는 점이다. 판사가 여러 면에서 꼼꼼히 보더라도 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의문이 없을 때, 즉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정도의 증명’이 있을 때만 유죄다.

‘인증’과 ‘물증’으로 나뉘는 증거

형사재판은 범인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는 절차이고, 사건의 진상을 명백히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판사는 실제 있었던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찾아내야 할 직무상 의무가 있다. 하지만 목격자도 없고 범인의 지문도 발견되지 않은 살인 사건, 서로 말이 전혀 다른 성범죄 사건 등에서 실체적 진실을 찾는 것은 30여년 재판만 해온 판사에게도 힘들고 어렵다. 위증을 하면 처벌받기로 맹세한 증인들이 편을 갈라 정반대로 증언하거나 말을 바꿀 때도 곤혹스럽긴 마찬가지다.

사건은 과거로 묻혀버렸고 범인이 남긴 흔적은 부족하거나 때가 묻었다. 같은 사건도 그 사람의 경험과 관심에 따라 느끼고 기억하는 내용이 다르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은 희미해지고 유리한 부분만 부풀려져 편향적으로 남는다. 같은 사람이라도 비공개로 진행된 검사실에서 한 말과 변호인의 도움을 받고 공개된 법정에서 한 말의 뉘앙스가 다르다. 실체적 진실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재판을 통해서 그대로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할수록 판사는 오판에 빠질 위험이 있다. 형사소송법은 판사의 오판과 독단을 막기 위해서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하고 판사가 지켜야 하는 ‘적법절차’를 자세히 규정한다. 실체적 진실은 적법절차라는 틀 속에서 검사와 피고인이 주장하고 반박하며 판사가 판단하는 과정에서 진실에 가깝게 재구성될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온당하다.

내친김에 형사증거법을 더 살펴보자. 증거는 ‘인증’과 ‘물증’으로 나뉜다. 인증은 피해자의 증언이나 피고인의 진술과 같이 사람의 말이 증거로 되는 것이다. 물증은 범행에 사용한 흉기나 장물, 금융자료와 같이 물건의 존재와 상태나 내용이 증거가 되는 것이다. 언론에서는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어서 유죄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보도한다. 예를 들면 ‘5·18 광주학살’의 책임자에 대해 심증이 있지만 물증이 없을 뿐이어서 아쉽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법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그가 지시한 문건이 발견되지 않더라도 부하들의 양심선언이 있고, 판사가 믿을 만하다고 생각을 굳히면 유죄다. 판사가 마음을 굳혔다는 뜻의 ‘심증’을 언론은 일반인이 의심한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금융자료 등 물증이 없는 상황에서 유력 정치인에게 뇌물을 제공했는지가 문제된 사건에서 대법원은 준 사람의 말이 신빙성이 있다고 보아 유죄를 선고했다. 사체가 발견되지 않아도 여러 정황증거에 비추어 볼 때 피고인의 행위로 피해자가 사망했다는 사실이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되었다면 유죄다.

오판 사례에 속하는 ‘과거사 사건’

형사재판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정치적 반대자나 사회적 약자들을 유죄로 몰아서 오판한 사례가 많다. 몇 년 전 역사에 자취를 남긴 형사사건을 모아서 <재판으로 본 세계사>를 펴낸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사 사건’이 이런 유형에 속한다. 하지만 수사가 강압적으로 진행되고 법정에서 위증이 만연한 현실에서 오판의 대부분은 판사가 엇갈리는 주장과 증거를 합리적으로 분별하지 못해 나온다. 풍부한 법적 경험과 훈련을 받았지만 판사도 사람인지라 처음 가진 생각이나 판례에 집착해서 곧바로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에게 어떤 전형(피해자다움)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에 벗어나는 사정이 있으면 유죄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수 있다. 검사가 기소했으니까, 또는 하급심 판사가 유죄로 인정했으니까 그들을 믿고 사실관계를 꼼꼼히 따지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로든 판사의 아둔함과 불성실, 아집과 편견은 용납될 수 없다. 형사 재판관은 몇 가지 법지식보다 사람과 사회에 대한 앎이 훨씬 중요하고, 선의로 이해하는 마음과 올곧은 결기를 아울러 갖추어야 한다.

30년 전 무죄를 선고한 사람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밤에 아무도 없는 치킨가게에서 불이 나서 건물이 전소되었는데, 검사가 임차인을 업무상 실화죄로 기소했다. 전관 변호사를 선임했으나 유죄를 선고받자, 항소심에서는 직접 나서서 소박한 말과 글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재판장과 합의한 뒤 판사로서 처음 무죄 판결문을 썼고, 며칠 후 가슴 절절히 고맙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법복을 계속 입으면서 매너리즘에 빠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재판과 판사를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바뀐 것일까. 옷로비 의혹사건의 특별검사가 고급 옷가게 주인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필자는 알선수재 혐의는 소명이 부족하고, 위증 혐의는 특검의 수사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영장을 기각했다. 기자회견에서 “얼마가 걸리더라도 매일 대한민국 모든 판사에게 청구해서 기어코 영장을 받아내겠다”던 특검의 사자후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박형남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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