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프레,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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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떠서 꾸미고 싶은 사람이 흑인이었다. 그래서 얼굴을 검게 칠했다. 흑인을 비하하는 인종차별일까, 아닐까.

한 고등학교 졸업사진 촬영 현장에서 주목받은 학생들의 코스프레가 불러온 논쟁의 출발점이다. 한편에선 흑인처럼 보이기 위해 얼굴을 검게 칠한 행동에는 차별과 비하의 시각이 반영된 오랜 역사가 그 배경에 있다고 주장한다. 흑인 방송인이 학생들에게 인종차별이라고 지적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그러나 그 방송인은 여론의 뭇매를 맞고 결국 사과의 뜻을 밝혔다. 다른 한편에서 해당 ‘코스프레’는 당사자를 비하하려는 의도가 전혀 담기지 않았다고 맞섰기 때문이다.

2020년 경기 의정부고 졸업사진 중 ‘관짝소년단’ 코스프레를 한 학생들의 모습./의정부고 학생자치회 페이스북

2020년 경기 의정부고 졸업사진 중 ‘관짝소년단’ 코스프레를 한 학생들의 모습./의정부고 학생자치회 페이스북

인종차별이냐 아니냐 팽팽한 논쟁

코스프레는 소수 마니아만 즐기던 하위문화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대표적 사례다. 옷과 분장 등을 활용해 만화·게임·애니메이션 등의 등장인물과 비슷하게 꾸미는 행동을 뜻한다. 일본식 영어 표현인 ‘코스튬 플레이’를 줄인 이 말은 국내에서 ‘피해자인 것처럼 가장한다’는 뜻의 ‘피해자 코스프레’ 같은 파생 표현까지 만들어내며 순식간에 자리 잡았다. 그런데 바로 이 코스프레가 표현의 자유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경기 의정부고등학교는 학생들이 졸업사진을 찍을 때 화제가 되는 인물을 따라 코스프레하는 전통으로 유명하다. 이번에 논란이 된 코스프레 대상은 바로 일명 ‘관짝소년단’으로 알려진 가나의 장례업자들이었다. 가나를 비롯한 서아프리카 지역에선 흥겨운 분위기에서 장례식을 치르는 문화가 있다. 이들 장례업자는 고인의 시신이 들어간 관을 어깨에 메고 박자를 맞추며 춤을 춰 장례식에 모인 가족과 친지들의 흥을 돋운다. 올해 초부터 전 세계로 확산된 코로나19 때문에 ‘거리 두기’를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서 이들이 관을 들고 춤을 추는 모습을 담은 영상은 세계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코로나19 확산 방지에 동참하지 않으면 영상 속 고인처럼 관에 들어갈 수 있다는 유쾌한 경고를 담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의정부고 학생 5명이 관짝소년단 코스프레를 하면서 얼굴을 검게 칠한 데 있다. 이 학교 학생들이 해마다 가장 화제를 모은 인물이나 캐릭터를 코스프레했기 때문에 관짝소년단 역시 코스프레 대상이 될 것이란 예상은 이미 전부터 나왔다. 올해도 관짝소년단처럼 인기를 모은 ‘밈(인터넷 등에서 유행하며 회자되는 특정 문화요소)’으로 가수 비의 노래 ‘깡’ 뮤직비디오 분장이나 유명 유튜버 ‘김계란’, 펭귄 캐릭터 ‘펭수’ 등을 패러디한 졸업사진도 이목을 끌었다.

그런데 다른 코스프레와는 달리 얼굴을 검게 칠한 ‘블랙페이스’는 민감한 주제여서 인종차별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단지 다른 인종의 피부색을 흉내 낸 정도가 아니라 역사적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코미디 공연 ‘민스트럴쇼’는 백인 출연자들이 흑인처럼 분장하기 위해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무대에 오른 것으로 유명하다. 이 코미디에 등장하는 흑인은 노예이거나 하층민이어서 특정 인종·계층집단을 비하해 웃음을 이끌어내는 방식을 선보였던 것이다. 이렇게 ‘블랙페이스’가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문화적 요소로 자리 잡자 1960년대 이후 흑인 민권운동이 번져나가면서 ‘블랙페이스’는 당장 몰아내야 할 문화적 적폐 현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나치 문양이나 깃발처럼 일종의 금기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논란은 가나 출신 방송인 샘 오취리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이 코스프레 졸업사진을 비판하는 글을 올리면서 더욱 커졌다. 오취리는 “2020년에 이런 것을 보면 안타깝고 슬프다. 흑인들 입장에선 매우 불쾌한 행동”이라며 흑인 입장에서 본 ‘블랙페이스’에 대해 글을 남겼다. 그러자 오취리를 비판하는 댓글과 함께 다양한 근거를 대며 해당 코스프레가 과연 인종차별인지 의문을 표하는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인종차별이냐, 아니냐를 두고 서로 맞서는 두 입장은 각각 나름의 논리를 제시한다. 인종차별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쪽에서는 해당 코스프레의 대상이 된 ‘원조’ 관짝소년단의 대표 벤자민 에두에게 소셜미디어(SNS)로 학생들의 코스프레 사진을 보냈더니 전혀 불쾌한 반응 없이 오히려 “졸업을 축하한다”는 답을 달았다는 점을 들었다. 당사자가 불쾌해하지 않는데도 인종차별이나 비하의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흑인 외의 다른 인종을 본뜬 코스프레는 문제로 삼지 않는다는 점을 제시하는 목소리도 있다. 영화 <기생충>에 소위 ‘인디언’으로 잘못 알려진 북아메리카 원주민을 따라 하는 장면이 나왔지만 이에 대한 논란은 없었다는 것이다.

샘 오취리, 비판 글 내리고 사과

반면 인종차별이라는 쪽에서는 ‘블랙페이스’의 역사적 배경 말고도 다른 근거를 든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조별예선에서 한국 대표팀이 예상을 깨고 독일에 승리를 거두면서 같은 조의 멕시코가 본선에 진출하게 되자 멕시코 국민은 한국팀에 감사한다는 의미로 ‘눈 찢기’ 표정을 사진으로 찍어 SNS 등에 게시했다. 한국인을 비롯한 동아시아인들이 비교적 눈이 작다는 점을 강조하는 이 표현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멕시코인들은 몰랐던 것이다. 나름 선의를 바탕으로 행동했지만 상대방으로서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던 이 현상을 두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블랙페이스 코스프레와 다를 것이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

여기에 더해 서구 사회에선 나치를 상징하는 문양에 대해서는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만 일본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욱일기에 대해선 잘 모른다는 이유로 방관하는 현상을 언급하기도 한다. 한국인들이 무지를 이유로 제국주의와 침략의 상징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유럽인들을 비판한다면, 같은 이유로 무지를 핑계 삼아 블랙페이스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할 때 모순이 생긴다는 논리다.

오취리의 SNS를 비롯해 의정부고 ‘관짝소년단’ 사진이 올라간 인터넷 공간마다 외국인 이용자들까지 합세해 “블랙페이스는 옳지 않다. 피부를 검게 칠하는 분장을 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답글이 달리는 등 논쟁은 가열됐다. 이 과정에서 오취리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도 점차 거세지자 결국 오취리는 첫 글을 올린 바로 다음날 원래의 게시글을 지우며 “학생들을 비하하는 의도가 전혀 아니었다. 제 의견을 표현하려고 했는데 선을 넘었다”는 사과문을 올렸다.

결국 코스프레가 표현의 자유를 둘러싸고 어디까지를 한계로 정할 수 있을지 양쪽이 팽팽히 맞선 갈등은 봉합되지 않은 채로 남았다. 이에 대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를 쓴 사회학자 오찬호 박사는 “어떤 행위가 차별인가 여부는 행위자의 의도와는 상관없다”며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웃기려고 한 말은 차별이 아니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보니 블랙페이스에 대한 비판을 ‘학생들이 조롱하려던 것은 아니’라며 강한 거부반응을 부르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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