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공화국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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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산 곳은 서울 변두리의 조그만 양옥이었습니다. 시멘트 바닥이긴 했지만 아담한 마당이 있었고, 라일락 한 그루가 서 있는 작은 화단도 마당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연탄아궁이로 난방을 하고, 석유곤로로 밥을 지어먹던 시절이었습니다. 초록색 철대문을 옆에 끼고 있던 마당 구석에는 재래식 ‘변소’도 있었습니다. 좁디좁은 공간에 쭈그려 앉아 코를 막고 용변을 보던 기억도 납니다.

[편집실에서]아파트공화국의 그늘

제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1970년대 초·중반 집이라고 하면 거의 단독주택을 가리켰습니다. ‘양옥’이냐, ‘한옥’이냐의 차이 정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아파트에 산다는 것은 삶의 수준이 달라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수도꼭지만 열면 온수가 콸콸 쏟아지고, 연탄불을 갈 필요도 없이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는 아파트는 가히 ‘신세계’였습니다.

서울 강남이 개발되면서 아파트 건축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우후죽순처럼 뻗어 올라간 아파트는 이제 서울뿐 아니라 수도권 전역을 거의 덮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1975년 전국의 아파트는 전체 주택 473만4169호 가운데 8만9248호로 채 2%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2018년에는 1763만3327호 중 1082만6044호가 아파트(연립주택 제외)인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율이 61.4%에 이릅니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 사는 나라, ‘아파트공화국’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아파트가 늘어나면서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입주민 갑질과 같이 공동주택의 기본적인 예절을 무시한 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 쓰레기 무단투기나 층간 소음으로 인한 이웃 간의 다툼 등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지난 5월에는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에서 근무하던 경비원이 입주민의 폭언과 폭행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갖가지 이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재건축·재개발 비리도 끊이지 않습니다. 지난해에만 162건의 재건축·재개발 비리가 국토교통부에 적발됐습니다. 아파트 관리를 둘러싸고 잡음도 불거집니다. 입주자대표회의와 관리사무소가 짬짜미해서 저지르는 비리 탓에 애꿎은 주민들만 피해를 입는 단지도 적지 않습니다.

이번 호 표지 이야기는 ‘아파트 민주주의’로 잡았습니다. 왜 아파트에서 금품수수나 횡령과 같은 비리가 일어나는지, 입주민의 권리가 어떻게 무시되는지 실상을 짚어보고 해결책을 모색해 봤습니다. 아울러 <아파트 민주주의>의 저자인 남기업 토지+자유연구소 소장을 만나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비민주적 행태와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한 대책은 무엇인지 들어봤습니다.

얼마 전 이해찬 민주당 대표의 ‘천박한 도시’ 발언 논란이 일었습니다. 이 대표가 행정수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자리에서 “서울 한강변에는 아파트만 있다. 이런 천박한 도시가 아닌 품위 있고 문화적으로 성숙한 도시를 잘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말한 게 발단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발언이 부적절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아파트 내부에서 횡행하는 천태만상의 부조리를 들여다보면 ‘천박하다’는 표현이 그리 틀린 말 같지는 않습니다.

<조홍민 에디터 겸 편집장 dury12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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