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후핵연료 처리‘ 숙의 민주주의’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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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쪽짜리 공론화 강행으로 지역주민·탈핵시민연대 반발

‘사용후핵연료 처리’ 문제가 공론화 문턱을 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국민 의견수렴 과정을 거친 뒤 해결 방안을 도출하기 위해 출범한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이하 재검토위원회)’는 위원들의 집단 탈퇴로 반쪽짜리가 됐다. 지난 6월 정정화 재검토위원장은 “재검토위원회는 실패했다. 이를 타산지석 삼아 제대로 된 재공론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 뒤 사퇴했다. 공론화에 실패한 박근혜 정부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던 재공론화 역시 실패로 돌아간 셈이다.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사회단체가 핵폐기물의 위험성을 알리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우철훈 기자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사회단체가 핵폐기물의 위험성을 알리는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우철훈 기자

그럼에도 산업통상자원부는 재검토위원회의 새 위원장을 선임하면서 맞서고 있다. 반쪽짜리 공론화 절차가 강행되면서 시민사회와 정부, 인근 지역주민 간 갈등의 골은 깊어지고 있다. 집단지성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숙의(熟議) 민주주의’의 취지마저 사라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근혜 정부 때와 다를 게 없다”

당장 시급하게 결정해야 할 문제는 경북 경주 월성 원자력발전소 내 사용후핵연료 처리를 위한 임시저장시설(맥스터) 증설 여부다. 2019년 3분기 기준 월성 원전의 사용후핵연료 건식저장시설(캐니스터 300기·맥스터 7기) 포화율은 96.5%에 달한다. 핵연료봉 저장 용량 33만 다발 가운데 31만8480다발이 채워졌다. 이대로라면 내년 11월 즈음 맥스터가 포화돼 월성 원전 가동이 중단될 수 있다. 늦어도 오는 8월에는 맥스터 증설 공사에 착수해야 한다는 게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의 뜻이다.

맥스터 증설을 위한 사전 작업은 이미 완료된 상태다. 월성 원전 내에 맥스터 7기를 지을 수 있는 6300㎡ 규모의 부지를 확보한 한수원은 2016년 4월 맥스터 추가 건설을 위해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에 허가를 신청했다. 원안위 승인이 나기 전인 지난해 9월에는 실린더 등 공사를 위한 맥스터 설비 자재 반입을 진행했다. 당시 원안위는 ‘원안위 허가 없이 한수원이 자재와 공구를 반입했다’(원안위 111회 회의)며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지만 ‘원자력안전법상 문제가 없다’는 답을 듣고 올해 1월 맥스터 7기 추가 건설을 승인했다. 재검토위원회를 거친 ‘공론화’라는 형식적인 요건만 갖추면 바로 맥스터 증설이 가능하다. 남은 과정은 공작물 축조신고가 전부다.

지역주민과 탈핵시민사회는 이번 공론화가 박근혜 정부의 공론화 과정과 다를 게 없다며 반발한다. 사회적 소통과 합의, 의견수렴을 하지 않았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약속한 ‘사용후핵연료 정책 전면 재검토’ 과정이 되레 지역주민의 의견수렴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후퇴했다는 것이다.

경주시의 지역 여론수렴 과정에 대한 편향성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현재 유일한 지역 여론수렴 창구는 경주시가 단독으로 구성한 월성 지역실행기구다. 지역실행기구의 위원 추천권한은 경주시장이 갖는다. ‘친핵’ 인사로 분류되는 경주시장이 추천한 지역실행기구 위원들 역시 맥스터 증설에 우호적인 인사들로 채워졌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거수기’ 논란 속에도 지역실행기구는 맥스터 확충 관련 공론화를 강행하고 있다. 사퇴한 정 전 재검토위원장은 “맥스터 증설 여부에 대한 의견수렴을 위해 시민참여단 구성을 위한 설문 문항을 재검토위가 만들었는데, 실행기구가 재검토위와 상의도 없이 설문을 모두 바꿨다”고 밝힌 바 있다. 권영국 변호사(정의당 경주시 위원장)는 “맥스터 증설로 결론을 내린 뒤 밀어붙이는 현행 방식은 정상적인 공론화라고 볼 수 없다”며 “시민참여단 구성에 편파성 문제, 비공개 진행에 따른 문제 제기가 있으면 의견을 수렴하고 설득해 신뢰를 쌓아야 마땅한데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 여론 수렴 과정에서 편향성 논란

월성 원전은 행정구역상 경주시에 있지만 재난이 발생하면 울산시에도 영향을 미친다. 울산 북구는 월성 원전에서 불과 8㎞ 거리에 인접해 있다. 산업부는 원전 소재 지역이 아니라는 이유로 지역공론화 과정에 울산을 의견수렴 대상에서 제외했다. 울산 북구 지역주민들이 맥스터 증설과 관련해 1만1484명의 주민 서명을 받아 산업통상자원부에 주민투표를 청원했지만, 산업부는 ‘원전 관련 시설의 운영·설치는 국가사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결국 지난 6월 울산 북구에서는 민간주도로 주민 찬반투표를 시행했다. 울산 북구 지역주민 5만479명이 참여한 투표에서 투표자의 94.8%인 4만7829명이 맥스터 건설에 반대표를 던졌다.

탈핵울산시민공동행동과 울산 북구주민회 회원들이 월성 원전 사용후핵연료 저장고 증설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백승목 기자

탈핵울산시민공동행동과 울산 북구주민회 회원들이 월성 원전 사용후핵연료 저장고 증설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백승목 기자

그럼에도 여전히 울산 주민은 공론화에서 배제돼 있다. 지역 정치권은 주민여론에 미온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정부에서 의지를 갖고 추진하는 사업에 같은 당 소속 지자체장과 지역구 의원이 반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실정이다. 송철호 울산시장과 울산 북구 이상헌 의원은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다. 이은정 월성핵쓰레기장반대 주민투표 울산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는 “울산시장 면담도 많이 했는데, 하는 얘기는 ‘울산시가 수소에너지와 풍력 사업 관련해서 정부와 협력해 할 일이 많다’는 거였고, 지역구 의원 역시 이런 시설이 들어올 때 주민 의견수렴하는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는 원론적인 얘기만 반복하고 있다”며 “정부 여당에서 하는 일이라 눈치만 보고 있다”고 말했다.

공론화를 위한 재검토위원회 출범에 앞서 원전업계·탈핵시민사회·지역주민 등 이해 당사자들로 구성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정책 재검토준비단’은 전국 단위 공론화 과정을 통해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계획 로드맵’을 먼저 정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에 대한 방향을 정해놓은 뒤 맥스터 건설 여부를 정하는 게 순서라는 취지다. 그러나 산업부 재검토준비단의 합의를 뒤집고 월성 맥스터 증설로 논의를 축소했다. 이원영 수원대 교수·한국탈핵에너지학회(준) 준비위원은 “탈핵에 대한 구체적인 방침이나 로드맵 설정 없이 맥스터 증설을 논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며 “숙의 민주주의의 본래 의미마저 퇴색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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