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동 뚝섬 골목-아직도 버티고 있는 황혼의 산업 구두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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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하철 2호선 뚝섬역과 성수역 사이에 한참 전부터 떠오르는 골목길이 있다. 성수동 뚝섬 골목길. 오래된 공장과 새로 생긴 카페, 그리고 젊은 작가들의 공방이 혼재돼 있다. 옛 지명은 살곶이벌, 태조 이성계가 날린 화살을 태종이 된 이방원이 기둥 뒤에 숨어 피했다 하여 화살이 날아 꽂힌 벌판이란 전설이 전한다. 좀 더 널리 알려진 이름은 뚝섬. 홍수 때면 모래땅 곳곳에 물길이 생겨 섬처럼 보였다 하여 그런 이름을 지녔다고 한다. 왕의 행차 때 커다란 둑기(纛旗·행렬 앞에 내세우는 깃발)를 세운 연유로 둑이 뚝으로 변하여 지명이 됐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뚝섬에는 섬이 없다.

성수동 뚝섬 골목은 오래된 공장과 젊은 유행의 명소들이 공존한다.

성수동 뚝섬 골목은 오래된 공장과 젊은 유행의 명소들이 공존한다.

성수동 뚝섬 일대는 옛 모습을 완전히 벗었다. 지금의 골목길을 걸으면서 아무도 이곳이 조선시대 활을 쏘고 말 달리던 병사들의 훈련장이며 왕의 사냥터였음을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한강의 범람으로 퇴적된 땅이라 토질이 비옥해 근세에는 서울 일대에 채소를 공급하는 채마밭이 있었다. 한국전쟁 직후 본격적으로 뚝섬의 전성시대가 오는데, 신설동 경마장이 이곳으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병사들 훈련장이며 왕의 사냥터

경마장은 1954년에 세워져 과천으로 옮긴 1989년까지 수많은 경마꾼의 애간장을 녹였다. 경마로 부자가 됐다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지만, 집 몇 채를 날렸다는 패가망신의 사례는 경마장 주변의 단골 안줏거리다. 경마장은 서울숲이 됐다. 그곳에서 달리던 말과 일확천금의 꿈은 6필의 달리는 경주마 동상으로 박제돼 공원 한편에 남아 있다. 뚝섬경마장 시절에는 승부 조작의 소문과 의심도 짙었고, 표나게 조작하다 걸려 난동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그 시절 일대는 경마장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먹여 살렸다.

오래된 골목을 국내 최고 분양가의 아파트가 내려다보고 있다.

오래된 골목을 국내 최고 분양가의 아파트가 내려다보고 있다.

지하철 뚝섬역을 나서면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서울지역대학이 보인다. 옆 골목으로 들어서면 교재를 파는 서점과 스터디 모임이며 공부방들이 골목 여기저기에 박혀 있어 여느 대학가와 다를 바 없다. 젊은 취향의 식당과 주점도 보이지만 골목길 사이사이엔 오래된 연립주택이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서울숲을 향해 더 나아가면 성수동의 옛 골목 정경이 드러난다.

1960년대 서울의 도시정비사업으로 이 일대는 경공업단지가 됐다. 굵직굵직한 공장들이 아직 남아 있고 쇠를 깎는 소리와 기계가 내는 쿵쿵 소리가 낮게, 그러나 분명하게 골목을 울린다. 주물 등 금속가공 공장과 도금, 피혁과 섬유 염색 공장들이 주를 이루었으나 환경문제로 도금공장과 염색업체들은 대부분 성수동을 떠난 지 오래다. 공장들은 넓게 자리를 잡고 높게 지어졌다.

공장들도 자리바꿈을 하게 마련이라 철공장이 있던 자리는 가죽공장이 들어섰고, 피혁산업이 쇠락하자 거대한 윤전기를 돌리는 인쇄공장이 들어섰다. 지금도 공장은 자리를 바꿔가고 있지만 한눈에 봐도 재래식 공장들의 설자리는 줄어들었다. 대신 전철역 주변으로 지식산업센터 등의 생소한 산업체들이 들어서고 있고, 공장 자리는 식당이나 카페 따위로 변해간다. 뚝섬에 말 달리던 시절부터 일하던 노동자들은 아직도 남아 있는 연탄불 석쇠구이집에서 퇴근 후 소주잔을 꺾으면서 급변하는 시대를 욕할 뿐 세월 앞에서 무력할 따름이다.

주택가 골목 사이에도 카페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다.

주택가 골목 사이에도 카페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다.

60년 넘게 돌아가는 공장도 있다.

60년 넘게 돌아가는 공장도 있다.

서울숲에는 서울에서, 아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싼 분양가의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뚝섬 성수동 일대의 골목골목을 근엄하게 내려다보고 서 있는 한 쌍의 고층아파트 건물은 멀리서 봐도 대지에 박혀 있는 쇠말뚝이다. 아파트 한 채에 30억원을 훌쩍 넘고 여차하면 60억원을 돌파하는 비싼 몸값 덕에 주변의 오래된 아파트들도 덩달아 춤추기 시작했다. 재개발추진위 설립을 경축하는 현수막이 걸렸고, 1970년대 지은 연립주택들도 몸값이 뛰었다. 토박이임을 강조하여 간판을 건 부동산 중개인 말로는 “환경·교통 기반시설 교육 등 강북 최고 요지가 성수동 일대”라며 지금 못 잡으면 물건이 없다고 침을 튀긴다.

강북 최고 요지로 올라선 살곶이벌

성수동 골목길에서 아직도 주인행세를 하는 것은 구두공장들이다. 신발산업이 기울어지고 중국이나 베트남 등지로 빠져나가면서 성수동 제화 노동자들은 섬에 갇힌 꼴이 됐다. 골목 입구부터 ‘세일’ 간판을 걸어둔 좌판도 볼 수 있고, 수제화가게마다 ‘염가’·‘할인’ 등의 표지판이 걸려 있다. 멋진 가죽 구두가 여자 신발은 2만원부터, 남자 신발은 8만원부터. 가죽 샌들은 5만원 정도가 이 동네의 가격표이다. 군데군데 더 싼 할인매장도 보인다.

골목 곳곳에 ‘인싸’들의 사진 명소가 숨어 있다.

골목 곳곳에 ‘인싸’들의 사진 명소가 숨어 있다.

골목 큰길가에 자리 잡은 가죽도매상들은 빛바랜 간판으로 얼마나 오래 버티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문을 닫은 곳도 보이고, 이제 막 철거하는 가죽가게도 있었다. 철거가 한창인 곳에서 뭐가 들어 오느냐고 묻자 “카페가 들어온다”고 답한다. 수제화 골목의 절반 정도는 이미 젊은 층을 겨냥한 카페와 식당들로 들어서 있다.

골목길 벽화 앞에서 셀카를 찍는 젊고 꽃 같은 남녀 청춘들을 흔히 볼 수 있어 성수동 순례가 젊은이들의 유행이 된 지 오래다. 군데군데 촬영 포인트에서는 사진을 찍고 분주히 몰려가고 또 다른 청춘들이 금세 그 자리를 메웠다. 그들 사이에서 가죽 한두 평을 사들고 자전거를 끌며 공장으로 부지런히 달려가는 나이든 직공들의 모습이 묘하게 겹친다. 같은 골목이지만 누군가는 생존을 위해 달리고, 어떤 이들은 유행을 누리며 유랑하고 있었다.

심란한 구두공방들을 지나치면 왕년의 뚝섬을 보여주는 전통시장이 있다. 뚝도시장. 180개 정도 가게가 있다고 하나 빛을 잃기는 신발공장이나 마찬가지다. 근처에 우뚝 선 재벌가의 대형마트 하나가 시장 안 가게들을 다 아우르고도 남는다. 자본 앞에서 무전무구(無錢無口)일밖에 도리가 없다. 시장 안은 한가하고 상인들의 허리는 굽었고, 오가는 젊은이들은 사진 찍기에 바쁘다.

성수동은 국내 제화산업의 중심지다.

성수동은 국내 제화산업의 중심지다.

성수동 수제화의 실력은 대통령의 구두를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평균 30년 이상 일한 숙련공들이 성수동의 자산이다. 남 앞에 나서는 일 없이 공장에서 가죽을 다듬고 깁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해온 이들이라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낯설고 품값을 제대로 쳐서 받아내는 일도 익숙지 않았다. 그러니 하청을 주는 갑 앞에서 고개도 제대로 못 드는 을로서 살아온 것이 일생 업이 되고 말았다. 어느 사이 1000켤레를 만들던 일이 고작 50켤레나 겨우 만들 정도로 줄어들었고, 성수동 일터는 장마철의 뚝섬처럼 고립되고 말았다.

가죽가게 주인에게 수제화 공장이 몰린 이유를 물었다. “신발 한 켤레 만들려면 공정이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간다. 부자재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죽부터 신발창까지 공정별로 필요한 것을 다 구할 수 있다”고 답한다. 1970~1980년대가 구두 공장의 전성기였는데 밤새도록 일해도 주문을 따라잡지 못할 정도라 했다. 그때 돈 번 사람들은 다 빠져나갔고, 이젠 가진 것이라곤 기술밖에 없는 이들만 남았다고 한다. 그는 “평생 해온 일이라, 신발밖에 모르는데 환갑을 훌쩍 넘겨 어디 가서 뭘 할 수 있겠냐?”며 한숨을 짓는다.

황혼의 산업이지만 골목길에 낙조만 비추는 것은 아니다. 군데군데 젊은 디자이너들의 가게도 보이고, 신발뿐 아니라 가방이며 디자인 소품을 만드는 곳도 들어섰다. 진열된 제품들은 하나하나 작품처럼 빛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명품점에 견줘도 밀리지 않을 정도의 감각 있는 가게도 보인다. 디자인만 담당하는 공방도 간판을 걸고 있는데, 최근에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단다. 지는 해도 있고 떠오르는 태양도 있으나 그 빛의 양지는 점차 줄어든다.

곳곳에 신발 세일 좌판을 볼 수 있다.

곳곳에 신발 세일 좌판을 볼 수 있다.

성수동 골목길은 대표적인 젠트리피케이션 지역이다. 저개발 지역이 유명해지면서 가겟세가 오르고 또 밀려나는 악순환을 고스란히 겪고 있다. 성수동 뚝섬 일대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그 파장의 몸살을 앓고 있다. 길가 테이블에서 낮술을 마시던 중늙은이의 격렬한 울분이 들린다. “지금 5년 계약했다가 또 건물 짓는다고 나가라면 어떻게 하나?” 그 옆 일행은 “어쩔 수 없지, 어쩌겠어”라고 대꾸를 한다. 핏대를 높이던 이는 공장 건물이 팔려 옮길 곳을 찾다가 분통이 터진 모양이다. 골목을 오가던 그 나이 또래들이 아는 체 인사를 건네는 것을 보니 이 바닥에서 뼈가 굵은 이였다. 그는 열이 식지 않는 듯 길 가던 이들을 붙잡아 자리에 앉히고 소주잔을 건넸다. 한낮의 우울한 대화는 지나쳐 스쳐가는 처지에서 들어도 입안이 쓰다.

지금은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몸살

그 옆 부동산 업소 안에선 또 다른 언성이 높았다. 텔레비전에서 정부의 부동산 대책이 보도되자 “아니 국민이 부동산을 올렸냐고? 자기들이 올려놓고 왜 이제 와서 난리냐”고 웅변하는 이는 아마도 건물주거나 그 비슷한 인물일 것이다.

이런저런 사연들이 밀물과 썰물처럼 스쳐가도 골목 안을 거대하게 버티고 선 공장도 볼 수 있다. ‘1956년’ 설립 명패를 당당하게 붙이고 오늘도 분주하게 돌아가는 물감공장이 보인다. 공장은 환갑을 훨씬 넘기고, 어쩌면 이 골목에서 가장 노숙한 연배에 속할 터였다. 코흘리개 꼬맹이 시절 그 회사의 크레파스를 손에 묻혔던 기억을 되짚어 보니 왠지 반갑고 고맙다. 흔들리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는 일은 숙연하다.

부동산의 장담대로 성수동 뚝섬 일대의 골목길은 앞으로 더 눈부시게 변할 것이다. 젊은이들이 새로 문을 연 가게들도 유행 따라 살아남거나 사라지거나 할 것이다. 역에서 골목으로 들어가는 길 어귀에 “건물주님, 너무나 힘듭니다. 임대료 좀 내려주세요” 하는 절규가 내걸려 있다. 슬프지만 그 호소는 들어주지 않을 확률이 대체로 높다.

잘 꾸며진 넓은 공원이 있고,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비싼 아파트가 들어서고, 젊은이들이 몰리는 화제의 골목길이 있는 동네. 학교도 있고 지하철도 지나는 곳이라 흔히 말하는 부동산 투자의 요지다. 좋은 곳에 살고 많이 벌려는 이유는 좋은 삶을 누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부동산 가격이 들썩이는 성수동 골목길의 삶은 좋은 삶일까를 묻게 된다. 골목이 빛나고 풍요로운 삶의 요소 중에는 ‘연대’라는 보이지 않는 끈이 있다. 노동자의 연대, 건물주와 세입자의 연대, 이웃 간의 연대, 노인과 청년의 연대. 번영하는 뚝섬 도시 골목길에서 연대는 점점 옅어져 가는 유령처럼 떠도는 것은 아닐까 싶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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