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보수’ 대법원장의 진보적 판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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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인의 대법관으로 구성된 미국 연방대법원의 수장인 존 로버츠 대법원장(65)이 주목을 받고 있다. 대법원이 6월 마지막 2주 동안 잇단 진보적인 판결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에 제동을 걸면서다.

존 로버츠 미 연방대법원장 / 로이터연합뉴스

존 로버츠 미 연방대법원장 / 로이터연합뉴스

대법원은 6월 15일(현지시간) 동성애자 또는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해고하는 것은 위법이라고 판결했다. 성별을 이유로 고용차별을 할 수 없다고 규정한 1964년 민권법에 따라 ‘성적 지향’ 또는 ‘성 정체성’을 이유로 해고하는 것은 고용차별이라고 판단했다. 이어 6월 18일에는 불법 체류자의 자녀들에게 31세가 될 때까지 미국에 체류할 권리를 보장하는 ‘불법체류 청소년 추방 유예제도(DACA·다카)’를 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판결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반이민 정책에 제동을 건 것이다. 6월 29일에는 낙태 진료소 및 낙태 시술을 할 수 있는 의사의 숫자를 제한하는 루이지애나주의 낙태 의료시설법에 대해 헌법에 보장된 여성의 낙태권을 침해한다고 결정했다.

첨예한 사안에 잇달아 진보 손 들어줘

이는 보수와 진보의 견해가 첨예하게 갈리는 사안에서 대법원이 연이어 진보 진영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현재 대법원의 인적 구성을 고려할 때 ‘이변’으로 평가받는다. 9명의 대법관 중 로버츠 대법원장을 비롯해 새뮤얼 엘리토, 클래런스 토머스, 닐 고서치, 브렛 캐버노 등 5명의 대법관이 보수 성향인 반면, 진보 성향 대법관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스티븐 브라이어, 소니아 소토마요르, 엘리나 케이건 등 4명이다. 대법관들의 이념 지형으로만 본다면, 진보적 판결이 나오기 어려운 구조다.

이 같은 ‘보수 우위’ 대법원에서 연이어 진보적 판결이 나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로버츠 대법원장이다. 세 사안 모두 진보 성향과 보수 성향 대법관들의 견해가 팽팽하게 맞섰는데, 보수 성향 로버츠 대법원장이 진보 성향 판사들의 손을 잡으면서 중심추가 진보 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여론의 이목이 집중된 판결에서 캐스팅보트를 행사하면서 로버츠 대법원장의 존재감은 급상승했다. CNN은 “2주 동안의 놀라운 판결에서 로버츠 대법원장은 진보적 대법관들의 편에 서면서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자리매김했다”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는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학의 법학자 리 엡스타인의 말을 인용해 “로버츠 대법관은 법원에서 가장 힘 있는 인물일 뿐만 아니라 적어도 1937년 이후 가장 강력한 대법원장”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보수 진영에서는 배신감을 토로한다. 톰 코튼 공화당 상원의원은 대법원이 낙태 제한에 제동을 건 것과 관련해 “로버츠 대법원장이 여성들과 태아들을 위한 정의를 기대해온 미국인들을 실망시켰다”며 “대법원장은 자신이 법원의 신뢰성을 지킨다고 믿고 있겠지만 실제로는 정치적인 의사 결정으로 법원의 신뢰성을 깨뜨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테드 크루즈 공화당 상원의원도 “정치적 줄타기를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뉴욕주 버펄로 태생인 로버츠 대법원장은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로펌과 법무부 등에서 일했다. 2005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그해 7월 은퇴한 샌드라 데이 오코너 대법관의 후임으로 로버츠를 지명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원장이 사망하자 부시 대통령은 그를 대법관이 아닌 대법원장 후임으로 재지명했다.

이민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활동가들이 6월 1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연방대법원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 EPA연합뉴스

이민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활동가들이 6월 1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연방대법원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 EPA연합뉴스

로버츠 대법원장이 진보적인 판결을 통해 ‘보수 성향 대법원장’이라는 선입견을 깬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2012년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이 추진하던 건강보험개혁법 ‘오바마케어’에 대해 예상을 깨고 합헌 의견을 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로버츠 대법원장의 인준을 반대한 적이 있고, 로버츠 대법원장은 오바마 전 대통령의 국정연설을 비판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의외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지난해 ‘2020 인구총조사’ 설문조항에 시민권 보유 여부를 묻는 질문을 추가하려던 트럼프 행정부의 계획과 관련한 판결에서도 진보 진영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의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 강조

<파이낸셜타임스>는 “로버츠 대법원장의 최근 판결만으로 그가 진보 쪽으로 기울었다고 보는 것은 실수”라면서 “(그의 최근 판결들은) 좌우의 범주로는 선명하게 포착할 수 없다. 그는 무엇보다 미국의 민주주의 전통에 초점을 맞추는 제도주의자”라고 지적했다.

루이지애나주 낙태법 관련 판결은 이 같은 평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낙태를 제한하는 루이지애나주 낙태법은 2016년 연방대법원에서 위헌 결정을 받은 텍사스주 낙태법과 거의 같은 내용이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당시에는 텍사스주법 낙태법이 합헌이라는 소수 의견을 냈다. 그러나 로버츠 대법원장은 이번에는 루이지애나주 낙태법이 위헌이라고 결정함으로써 낙태 제한 반대에 힘을 실어줬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자신의 결정이 낙태 자체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선례 구속의 원칙’을 따른 것이라고 별도 의견을 냈다. 동일한 사안에 대해 다른 판단을 내릴 경우 법원의 신뢰성이 깨진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뉴욕타임스>는 로버츠 대법원장이 법원의 독립성을 강조해온 인물이라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것은 2018년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반 이민정책에 제동을 건 연방순회법원의 존 S. 티거 판사를 ‘오바마 판사’라고 부르며 비난했을 때다. 티거 판사는 2012년 오바마 전 대통령이 임명한 인물이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이에 성명을 내고 “미국에 ‘오바마 판사’나 ‘트럼프 판사’, ‘부시 판사’나 ‘클린턴 판사’는 없다. 우리에게는 자신들 앞에 선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헌신적인 판사들의 비범한 집단이 있을 뿐”이라고 강하게 반박했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앞서 2012년에는 “우리는 민주당원이나 공화당원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대법원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기도 했다.

리처드 J. 라자루스 하버드대 법대 교수는 <뉴욕타임스>에 “로버츠 대법원장은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에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라면서 “그 메시지는 대법관들에게 특정 정당에 소속된 의원들처럼 행동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원식 국제부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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