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동 골목-활기차고 번화하고 풍요로운 시장 골목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서울 서북부의 아주 오래된 마을 대조동. 그 골목엔 동네 이름 그대로 대추나무가 흔하디흔하다. 오래된 집 마당엔 당연히 그래야 하는 듯 대추나무가 보인다. 이제 막 대추꽃이 피고 난 후라 작은 열매들이 송이송이 맺혔다. 마당뿐 아니라 골목길 곳곳에도 주인 없는 대추나무들이 서 있다. 대추나무는 본디 햇빛이 많고 습하지 않은 곳에서 잘 자라니 대조동은 그야말로 양명한 동네일 것이다.

불광역 인근 대조동 골목은 대추나무가 흔하다.

불광역 인근 대조동 골목은 대추나무가 흔하다.

골목에서 유모차를 끌고 지나는 젊은 부부에게 동네가 어떠냐 묻자 “살기 좋다. 북한산도 가까워서 공기가 맑다”고 한다. 동네 골목길에서 멀리 말끔한 바위능선도 보인다. 역촌동으로 이어지는 진흥로와 남북을 관통하는 통일로 주변을 제외하고 뒤편 골목길은 대부분 오래된 주택과 연립주택이 있다. 골목길엔 유난히 아이들이 많이 보인다. 주변의 불광초등학교와 대조초등학교, 대은초등학교는 서울에서 학생 수가 많기로 유명하다. 아이들이 대추처럼 바글바글 골목길을 훑고 지나는 모습은 보기에도 즐겁다. 늘 보던 사이인 듯 아이는 어른에게 인사하고, 나이든 이는 엄마의 전갈을 아이에게 전했다.

동네 이름 그대로 흔하디흔한 대추나무

지하철 3호선과 6호선이 만나는 불광역이 대조동의 중심이다. 불광역 주변으로 제일시장과 대조전통시장이 오랜 단골손님을 맞고 있다. 그 옆에 바로 대형백화점도 들어서 있지만 전통시장은 기세에 밀리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백화점 앞 행사 매대엔 비교적 젊은 층이 옷더미를 뒤지고 있으나 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끌고 나선 노인들은 눈길조차 건네지 않는다.

대조동 골목 절반은 재개발로 사라진다.

대조동 골목 절반은 재개발로 사라진다.

제일시장은 상가건물 안에 아주 오래된 역사를 펼쳐놓고 있다. 주인과 함께 세월을 보낸 물건들이 긴 형광등 아래 먼지를 덮어쓴 채 자리를 지킨다. 시장에서 가장 활기찬 곳은 긴 공간을 차지한 포장마차들로 낮술을 즐기는 나이든 주객들과 안주를 다듬으며 시시껄렁한 농담을 들어주는 주모의 모습이 느린 화면처럼 보인다. 상가 안 골목골목엔 손님보다 가게주인들이 더 많고, 서로 날씨 탓을 하거나 젊은 트로트 가수의 활약을 이야기한다.

낡은 재봉틀이 돌아가는 옷 수선 가게는 문을 연 지 50년이 넘었단다. 옷을 고치러 온 손님도 돋보기안경을 쓰고 틀질을 하는 주인도 주름에 새겨진 세월의 풍파를 숨기지 못했다. 여러 차례 고치러 온 듯 수선하는 옷은 낡아 보인다. 옷을 맡긴 노인은 “오래되고 낡아도 정든 물건이라 버리지 못한다. 고칠 수 있을 때까지 고쳐서 입는다”고 했다. 새 물건이 넘치는 세상이지만 무엇 하나를 버린다는 건 그것에 깃든 기억과 그리움까지 지워버리는 일이라 더 두려울 수 있다. 한갓 물건이 아니라 그가 안고 있는 세월을 애착하는 것이다.

주택 마당뿐 아니라 골목길 곳곳에도 대추나무가 있다.

주택 마당뿐 아니라 골목길 곳곳에도 대추나무가 있다.

큰길을 마주하고 제일시장 건너편엔 대조시장이 있다. 전통시장이라지만 길가 난장과 골목시장에 가깝다. 그래도 요즘 동네시장치고는 그 규모와 팔고 사는 물건들이 꽤나 다양하다. 시장의 상인과 손님들의 연배가 거의 비슷해 보였다. 장 보러 와서는 서로 안부를 묻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기별을 전한다. “그 사람 참 애쓰면서 자식 뒷바라지하느라 평생을 보냈는데, 참으로 안 됐다”며 혀를 차는 이야기 속엔 자기 삶에 대한 아쉬움도 담겨 있다. 이제 보이지 않는 빈 좌판의 주인이 살아온 인생의 역정은 다름 아닌 자기의 것이기 때문이다.

갖가지 푸성귀를 파는 노인은 인근 서오릉 근처에 밭이 있다고 했다. 아침저녁으로 밭일을 해서 가지나 호박, 오이 따위를 따다가 판다는 것이다. 연배 비슷한 손님 하나가 “오이가 왜 이리 비싸?” 하고 묻자 “대신 호박이 싸잖아”라고 대꾸했다. 오이값이 비싼 것도 탈이지만 장마가 시작되면서 못나고 맛도 없다고 한다. 호박은 뚱뚱하게 살이 쪘고 맛도 좋단다. 호박을 이리저리 살피다가도 “호박 갖고 냉국을 해 먹겠나. 소박이김치를 하겠나” 하며 고개를 젓는다. 오늘의 장나들이 소득은 신통치 않나 보다.

대조동은 서울 서북부의 오래된 주택가 골목이다.

대조동은 서울 서북부의 오래된 주택가 골목이다.

손님을 대하는 주인도, 물건을 고르는 손님도 낯이 익고 익숙한 모습이다. 생물 오징어를 고르던 노인은 “이 동네는 뜨내기들이 적고 오래 산 사람들이 많다. 젊은 사람들이야 백화점에 가겠지만, 토박이들에겐 늘 오가는 시장이 좋다”고 했다. 시장이 가깝고 큰 마을은 살기가 편한 법이다. 인근의 노인들에게 시장은 물건을 사는 곳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집안에서 답답하면 훌쩍 나서서 이리저리 낯익은 찬거리를 고르거나, 단골가게에서 수다를 떨거나 아주 오래전 시간 속의 기억들을 뒤적일 수 있는 추억의 곳간이 시장에 숨어 있다.

북한산 인근이라 무당들 살던 동네

청소년기의 학생들도 왁자하게 몰려와 닭강정이며 군것질거리를 사냥했다. 젊은 엄마는 춤추며 길을 걷는 어린 딸내미의 팔목을 낚아채면서 시장으로 등을 떠밀었다. 대조시장은 대체로 활기차고 번화하고 풍요롭다. 아주 오래된 주택가 근처에서 세월을 쌓아온 연륜이 시장 곳곳에 살아 있는 것이다.

대조동에 있던 서울서부시외버스터미널은 역세권 청년주택 개발로 아파트가 들어선다.

대조동에 있던 서울서부시외버스터미널은 역세권 청년주택 개발로 아파트가 들어선다.

골목 깊숙한 곳으로 발을 옮기자 대장간이 보인다. 서울미래유산이란 명판이 붙은 불광대장간. 1963년에 대조동 골목에 자리를 잡았다 하니 문을 연 지 곧 60년 세월을 내다보고 있다. 열네 살 때 대장일을 배운 아버지를 이어 지금은 아들이 쇠망치를 잡았다. 무쇠 칼이며 도끼, 괭이, ‘빠루’라 알려진 노루발장도리며 호미 따위가 차곡차곡 쌓여 손님을 기다리지만 이젠 일부러 찾아와 물건을 사가는 이들이 있을 뿐 이 골목을 오가며 손 연장 하나를 사 갈 이들은 사라졌다. 대신 시절에 맞게 맞춤형 캠핑망치 따위가 인기를 끌고 있단다.

골목을 따라 이런저런 신선·도사·선녀들의 집이 보인다. 장대 위에 하얗고 붉은 신장기를 걸어두고 ‘갓 신 내려서 영험한 집’ 따위의 간판을 붙여 두었다. ‘인생고민, 진로상담, 자녀문제, 취업치성’ 등의 부연설명도 읽을 수 있다. 무당들이 깔고 앉은 집들은 세월의 흔적을 감추지 못한 채 낡고 퇴색해간다. 인근 가겟집 주인은 속상한 노인들이 자식문제에 답답한 가슴으로 찾아가고 벽보고 이야기하느니 신령님께 털어놓는 심정으로 가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세상 시시콜콜 골 아픈 이야기는 다 몰려올 터이니 신령님도 참으로 편치 않겠다 싶다.

마을 노인 이야기로는 대조동·불광동 일대에 본디 무당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북한산 인근이라 산기도를 많이 하고 굿판도 흔하게 열렸는데, 요즘엔 동네에서 굿하는 일은 없고 이곳에서는 손님을 맞아 공수를 보고 멀리 일영이나 송추 쪽 굿당으로 나가 굿을 벌인다고 한다. 6·25전쟁 직후에는 두 집 건너 무당집이었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이제는 대신 그 자리를 교회가 차지한 듯 골목 안에는 제법 큰 교회들도 볼 수 있다. 사람이 사는 곳이니 시름 근심이야 당연한 일일 테고, 그 문제를 슬기롭게 지나치는 일 또한 인간의 숙제일 것이다.

대조동 골목엔 60년 가까이 된 대장간이 있다.

대조동 골목엔 60년 가까이 된 대장간이 있다.

골목 안 건물 외벽에 격한 현수막이 걸려 있다. ‘갈 곳이 없다. 시세기준 한다더니 경매가보다 못한 보상 떠날 수가 없다’, ‘낮게 평가된 토지단가 상향해주세요.’ 그리고 ‘지난 31년간 감사했습니다’는 인사도 보인다. 대은초등학교 옆쪽부터 길가에 보이는 집과 건물에 쇠파이프로 비계가 쳐지고, 철거공고가 붙어 있다.

골목을 둘러보자 부동산 업소들이 고추 모종에 붙은 진딧물마냥 줄줄이 보인다. 부동산 사장은 “이제 다 끝났다. 곧 철거 시작하고 공사 들어간다. 2024년에 입주하고, 모두 2389세대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자랑한다. 오래도록 뜸 들이던 재개발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이제 이 동네의 골목 절반은 사라질 것이다.

철거를 앞둔 건물들은 흉물이 됐다. 사람이 살던 흔적은 지워지고 오가던 골목길엔 버려진 가구와 쓰레기가 점령했다. 집을 비우고 떠난 이들은 사라질 골목 안에 대추나무도 남겨두고 갔다. 주인을 잃은 대추나무들은 아마도 이번 가을이 가기 전 덜 익어 맺힌 대추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대조동 언덕배기를 달리던 아이들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잃고, 평생 자식 뒷바라지에 등이 휘었던 노인들은 더 이상 추억을 함께 나눌 이웃이 없어질 것이다.

부동산 업소들은 신이 났다. 가게마다 ‘재개발 물량 대량 확보’ 또는 ‘재개발 물건 환영’이거나 ‘갭 투자 물량 있음’ 등의 광고판을 붙였다. “부동산이 너무 많아 큰 재미는 보지 못한다”고 엄살을 떨던 부동산 업자는 “그래도 입주 시기가 오면 또 한 번 기회가 닥칠 것”이라고 낙관했다.

재개발 예정지로 부동산 업소 흥청

부동산 업소 벽에는 곧 공사가 시작될 대조1구역뿐 아니라 불광역을 중심으로 지구단위계획구역 표시와 연신내 일대의 개발계획, 구산동과 역촌동 일대의 지구단위계획 구역과 우선 검토대상 구역 등이 붉고 푸르고 노랗게 표시되어 있다. 이번 정부에서 부동산 투기를 잡겠다고 벼르고 있고 부동산 대책이 줄줄이 발표되고 있지만, 업자는 “그래 봐야 얼마나 가겠느냐”며 흘려버렸다. 불광역 주변 오래된 주택들을 전세 끼고 잡으면 1억~2억원 정도만 투자하면 크게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며 부추기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땅과 집이 부를 가져다주던 시절의 기억이 살아 있는 한 생생한 욕망의 벌거벗은 속살은 감출 수 없을 것이다.

대조동 일대에서 가장 활기차던 곳은 서부시외버스터미널이었다. 문산·일산·의정부 쪽으로 가던 시외버스가 있어 군인들로 북적이던 곳이다. 달라진 교통지형에 터미널은 사라졌고, 한동안 서울서부경찰서 임시 청사로 쓰이다가 지금 그곳엔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역세권 청년아파트’란 간판이 붙어 있는 것으로 봐서 서울시의 청년 임대주택 사업 현장인 것 같다. 젊은 군인들의 발길은 예전 같지 않지만, 군장집들은 두어 곳 남아 있다. 그 시절 번창하던 요상한 술집들은 동네 호프집으로 바뀌었고, 아직도 간판을 바꿔 달지 않은 지하다방엔 중늙은이들만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다.

‘대추 보고 먹지 않으면 늙는다’는 속담처럼 대추는 양기를 높이는 보양식품과 약재로 인기가 높다. 주렁주렁 열리는 열매가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라 시집가는 딸의 짐 속에 대추를 넣어 보내고, 폐백엔 으레 대추꾸러미를 던져준다. 꿈속에 대추와 대추나무를 보면 아들을 얻는 태몽이라 하고, 양기가 뻗쳐 잡신을 쫓는 영험 있는 나무라 했다. 그 대추나무가 흔하게 널렸던 골목의 반쯤은 사라졌다. 마당을 지키던 대추나무는 ‘콧구멍에 낀 대추씨’란 속담처럼 보잘것없는 물건이 되고 말았다. 오래도록 골목을 지키며 사는 대조동 노인들은 세월의 풍파 앞에서도 꼬장꼬장한 대추 몽둥이처럼 자리를 지킬 것이다. 아직도 대조동 골목은 양명한 기운이 넘친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

골목내시경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