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케티가 주목한 노동이사제 도입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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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과 이데올로기> 한국어판 출간 기자회견서 강조

“임금인상 속도가 자본소득이 늘어나는 속도에 현저하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 나라의 현실입니다. 노동자들이 이사회에 참여해 기업 결정구조에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면,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은 달라질 것입니다.”

고기영 법무부 차관이 지난 6월 10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검에서 다중대표소송 도입, 감사위원 분리 선임 등을 골자로 하는 상법 개정안 관련 개요를 발표하고 있다. 다중대표소송제도는 임무를 게을리해 회사에 손해를 발생시킨 자회사 이사를 상대로 모회사 주주가 법적 책임을 묻는 제도다. /연합뉴스

고기영 법무부 차관이 지난 6월 10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검에서 다중대표소송 도입, 감사위원 분리 선임 등을 골자로 하는 상법 개정안 관련 개요를 발표하고 있다. 다중대표소송제도는 임무를 게을리해 회사에 손해를 발생시킨 자회사 이사를 상대로 모회사 주주가 법적 책임을 묻는 제도다. /연합뉴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지난 6월 8일(현지시간) <자본과 이데올로기> 한국어판 출간 기자회견 자리에서 ‘노동이사제’를 강조했다. 누진세를 강화해 확보한 재원으로 사회 평균 자산의 60% 정도를 만 25세가 된 청년에게 기초자산으로 제공하자는 제안과 함께 불평등을 해소하는 한 방안으로 제시했다.

노동이사제는 노동자나 노동자가 추천한 사람이 기업 이사회에 참여하는 제도다. 회사의 사정을 잘 알고, 회사의 장기적 성장이 자신의 이해와 일치하는 노동자 대표가 이사회에 참여함으로써 기업 경영의 투명성과 민주성을 높이고, 노사 협력 문화를 정착시켜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독일·스웨덴 등 서유럽을 중심으로 1970년대부터 노동조합대표 이사제나 노사공동결정제도 등으로 도입됐다.

노동이사제 도입, 공감대 확보 필요

피케티는 노동이사제를 불평등 해소의 수단으로 봤지만 국내에선 관련 논의가 수년째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야당 시절이던 2016년 당시 김종인 비대위원장 등 122인의 의원이 공동발의한 상법 개정안에 주주대표소송 요건 완화와 함께 ‘근로자추천이사제(노동이사제)’가 들어갔지만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서 2018년부터 공공기관에 노동이사제를 도입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실행 방안이 마련되지 않았다. 법무부가 지난 6월 11일 입법예고한 상법 개정안에서도 노동이사제는 빠졌다.

노동이사제 도입이 지지부진한 것은 폭넓은 공감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벌개혁을 강조하는 전문가 사이에서도 온도차가 있다. 김우찬 고려대 경영대학 교수(경제개혁연구소 소장)는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사이기 때문에 노동자 이익과 주주의 이익이 부딪힐 땐 노동자 이익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면서 “이사회 이사라면 일단 주주의 이익을 위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해가 상충한다”고 말했다.

이창민 한양대 교수(경제개혁연구소 부소장)는 노동이사제가 지배구조의 핵심 문제는 아니라고 봤다. 그는 “민주당 대선 경선 과정에서 엘리자베스 워런이 기업 내 소득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이사회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한국의 경우 총수로 불리는 지배주주와 소액주주의 갈등이 가장 큰 문제이고, 미국만큼 최고경영자와 일반 직원의 소득 차가 크지 않다는 점에서 노동이사제는 아직 논의를 더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창민 교수는 노동이사제를 도입한다면 노동조합 대표가 들어가는 방식보다 노조가 추천한 인사가 이사가 되는 ‘근로자추천이사제’ 방식이 순서상 맞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노동이사제 도입을 위해선 노조의 태도 변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최근 대한항공 경영권 분쟁에서 노조가 현 조원태 회장 편을 들었던 것처럼 노조가 총수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지 않고,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상황에서 노조 대표가 이사회에 들어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서울시 2016년 도입 “투명성·민주성 높여”

반면 이정우 한국장학재단 이사장(경북대 명예교수)은 형식적이고 유명무실한 사외이사제에 비해 노동이사제가 재벌개혁에 더 효과적이라고 봤다. 단기적 이익을 주로 보는 주주보다 노동자의 목소리가 이사회에서 더 중시되어야 한다는 견해다. 이정우 이사장은 “주식을 팔고 떠나면 그만인 주주나 잘 모르고 와서 훈수만 두는 사외이사와 달리 노동자를 대표하는 이사는 회사에 애착이 많고, 회사에 관해서 아는 것도 많기 때문에 재벌 총수를 견제하는 장치로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협력적인 노사관계를 발전시키는 데도 획기적인 조치가 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노동자 이사가 이사회의 3분의 1 정도를 차지하면 사용자 측도 지배권 확보 측면에서 안심할 수 있다”며 “중요한 건 이사회 표결에서 이기고 지고가 아니라 노동자의 목소리, 소수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노동이사제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선 현재의 기업별 노조를 서구 선진국처럼 산업별 노조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정우 이사장은 “노동 통제 목적으로 도입된 기업별 노조는 임금인상 투쟁만 하는 노조를 낳았다”면서 “전체 산업과 국민경제 수준에서 노동조건을 논의하고, 기업 안에서는 화합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장학재단은 노동이사제 도입을 위한 실험의 성격으로 노동자 대표의 이사회 참관 제도를 시범 시행하고 있다.

서울시의 경우 2016년 9월 노동이사제 조례를 제정하고, 2017년부터 서울시 산하 투자·출연기관에서 기관별로 노동이사를 선출했다. 올해 2월 현재 16개 기관에서 22명의 노동이사가 활동하고 있다. 서울시의 뒤를 이어 여러 지자체가 노동이사제 조례를 제정했고, 지난해부터 경기도와 광주광역시에서 노동이사가 선출되어 활동하고 있다.

서울시 노동이사제 실태조사에 참여한 이상준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서울시만 놓고 보면 아직 이르긴 하지만 투명성과 민주성에서 긍정적인 영향이 관찰된다”며 “다만 귤이 강을 건너면 탱자가 될 수 있듯 한국적 현실에 맞게 잘 변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노동이사제가 직장 내 민주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중소기업의 경우 가족 경영을 하면서 이사나 감사, 총무팀에 가족을 임명해 법인카드 등을 함부로 쓰는 등 전횡을 일삼는 경우가 많은데 이사회에 노동자 대표가 들어가면 이를 견제하거나 최소한 눈치를 보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준 위원은 “경제 민주화라는 개념을 대기업 집단의 지배구조 개혁 문제로 좁게 해석하기보다 일터 민주화라는 의미로 바라보고 접근할 때 더 많은 공감대를 얻을 수 있다”며 “제도 자체의 목표가 경영의 투명성·민주성 확보지만 갈등이 심해지기 전에 서로가 대화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둔다는 점에서 생산성 향상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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