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처럼 번지는 ‘2030 등산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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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유정운씨(24)는 올해 1학기를 휴학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개강이 연기되고 뒤늦게 열린 강의도 모두 온라인으로 진행되자 ‘답답하고 학업 능률도 안 오르는데 꼭 들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대신 남아도는 시간에 소일거리를 찾다 산행에 맛을 들였다. “처음에는 학과 친구들을 불러 가까운 산이나 오르자고 했다가 등산이 정말 상쾌하단 걸 알고는 등산크루 모임이나 오픈채팅방 산행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죠.” 서울을 비롯해 전국에서 수은주가 30도를 넘길 정도로 때 이른 더위가 찾아온 지난 6월 8일에도 유씨는 등산가방을 꾸려 관악산에 올랐다. ‘시간 되면 나오라’고만 채팅방에 썼는데도 20대 회원 2명이 나와 유씨와 동행했다.

코로나19 확산 예방을 위한 물리적 거리 두기 강도를 완화한 지난 4월 26일 북한산 백운대가 등산객들로 붐비고 있다./연합뉴스

코로나19 확산 예방을 위한 물리적 거리 두기 강도를 완화한 지난 4월 26일 북한산 백운대가 등산객들로 붐비고 있다./연합뉴스

기온이 다소 꺾일 시간대인 오후 5시에 모였지만 해가 길어져 산에 오르기엔 무리가 없었다. 유씨와 동행한 직장인 전유나씨(27)는 마침 이날 연차를 썼던 터라 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전씨 역시 ‘등산크루’에 가입해 회원들과도 이따금 산행을 같이한다. 등산크루는 중년층 이상에서 익숙한 산악회란 이름을 대신하는 것인데 한편으론 비슷하면서도 또 다르다. 주말에 회사 상사가 같이 등산하자고 불러내 억지로 끌려간 경험이 드문 젊은 세대에선 산행에 대한 거부감도 오히려 적다. “크루에서 언제 등산을 하자고 공지하면 해당 세션(산행)에 모이는 사람끼리 등산도 하고 내려와 밥이랑 술도 함께하는 건 비슷하다”는 전씨는 “가장 큰 차이는 패션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티셔츠·레깅스·러닝화 등 편한 옷차림

사실 전씨의 말처럼 산에 오르고 내려오는 단순하다면 단순한 행위가 세대마다 크게 달라질 지점은 별로 없다. 눈에 띄는 것은 이들 젊은 산행족의 옷차림이다. 편한 티셔츠 차림의 상의에 몸에 달라붙는 스타일의 ‘레깅스’나 ‘컴프레션 기어’ 같은 하의가 이들 사이의 유행을 보여준다. 비교적 색상이 화려하고 땀 배출 같은 기능에 중점을 둔 중년층 등산 동호인의 아웃도어 패션과는 구분된다. 발목을 넘겨 하의 위로 등산양말을 올려 신는 모습은 이들 젊은층도 마찬가지지만 오히려 젊은 세대에선 산에 오르지 않는 일상에서도 양말을 올려 신는 이른바 ‘모내기룩’이 유행이다. 무겁고 튼튼한 등산화보다는 평소에도 신기 편한 산악 러닝화를 신는 점까지 산행과 일상에 경계가 없는 옷차림을 추구하는 모습이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등산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는 데에는 소셜미디어(SNS)나 각종 동영상 공유 사이트에서 ‘산행 인증’ 콘텐츠를 올리는 인플루언서들이 늘어난 점도 한몫했다. 스스로를 ‘산린이(산행+어린이)’라고 지칭하는 초보 등산객이나 코로나19 거리 두기 방침에 맞게 혼자 또는 둘이서만 산에 오르는 ‘혼산’·‘둘산’이란 표현도 낯설지 않게 됐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도시를 끼고 있는 산에서 최근 탐방객이 늘어난 점에서도 확인된다. 국립공원공단에 따르면 코로나19 확산으로 옥외활동이 급감한 지난 3월 북한산 국립공원(도봉산 포함)에는 탐방객 67만5900명이 방문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1.7% 증가했다. 치악산·계룡산 국립공원도 비슷한 증가세를 보였다.

여기에 세대를 가리지 않고 쉽게 등산크루나 산악회를 꾸릴 수 있게 만들어진 플랫폼이나 앱도 보편화되면서 등산을 생활과 가까운 취미로 받아들이는 데 기여했다. 아웃도어업체 블랙야크가 운영하는 국내 최대 등산 커뮤니티 ‘BAC’ 가입자는 15만 명을 돌파했다. 특히 올해 4월 BAC 신규 가입자는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2배 이상, 산행 인증수 역시 약 30% 증가했는데 이중 2030세대의 비중이 절반을 넘었다. 블랙야크 관계자는 “올해는 거리를 두면서 즐길 수 있는 산행이 대체 활동으로 주목받은 후 혼산·둘산족이 등장하는 등 산을 찾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났다”며 “건강과 심리적 안정을 위해 자연을 찾는 젊은 산행족 역시 꾸준히 증가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거리 두기 방침 따라 ‘혼산’ ‘둘산’도

젊은 세대가 많이 활동하는 등산크루 중 인스타그램 활동을 통해 모이는 대표적인 크루 ‘스트레인저’나 ‘젊산모’ 등은 달리기 모임인 러닝크루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밖에도 달리기와 등산을 겸하는 크루는 많다. 이 때문에 달리기와 등산이 결합한 산악 달리기(트레일러닝)에 관심을 쏟는 인구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장거리를 달리는 전문적인 트레일러닝 동호인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체중 감량과 건강을 위해 운동하는 동호인들 사이에서도 트레일러닝은 주목받고 있다. 개인운동교습(PT) 트레이너로 일하는 정동규씨(31)는 빠른 감량을 원하지만, 운동시간을 따로 내기 어려운 회원들을 데리고 가까운 산으로 향할 때가 많다. 심박수를 급격히 올린 뒤 짧은 휴식을 반복하는 고강도 인터벌 방식 운동은 심폐기능 향상은 물론 체중 감량에 높은 효과를 나타내는데 여기에 트레일러닝이 제격이기 때문이다. 정씨는 “코로나19 걱정으로 일반 헬스장 같은 실내에서 운동하는 대신 오르막 산길을 달리면 별다른 기구를 준비할 필요도 없이 간편하고 기분전환이 된다며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생활 속 거리 두기를 유지하기도 어렵지 않고 산행 과정에서 쓰레기를 줍는 등 환경을 생각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등 사회적인 의미를 둘 수 있다는 점 역시 최근 등산이 널리 유행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등산크루마다 SNS에 ‘클린세션’이란 태그를 붙이며 이런 활동을 널리 알리고 있어서 새롭게 참여하는 참가자들도 환경을 생각하는 움직임에 익숙하다. 일회용품을 쓰지 않은 도시락과 물병을 준비하고 정상이나 산길에서 야생동물에게 피해가 갈 만한 행동은 피하라는 수칙도 산행 전에 전달한다.

산행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과도한 교제와 관계맺기를 기대하고 오는 참가자들을 솎아내는 문화도 정착돼 있다. 낮시간 등산이 어려운 직장인들을 위해 낮은 고도의 둘레길을 중심으로 야간산행을 자주 하는 한 크루의 방장 김대현씨(32)는 “간단히 맥주나 간식을 먹는 시간은 자유롭게 가질 수 있지만 지나치게 접근하려는 참가자가 있으면 다음부터는 그 사람이 나오는 세션에 아무도 나오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일종의 자정작용이 나타난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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